39화
뭔가가 허벅지를 주무르는 느낌이었다. 손이 점차 위로 올라오는 듯하더니, 의식이 순식간에 깨어났다. 어딜 만지는 거야, 이 변태 새끼야!
“아아아아아!”
순간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벌떡 일어난 내 허벅지를 주무르고 있던 정새빈도, 뭔가 불쾌한 꿈을 꾸다 소리를 지르며 깨어난 나도. 서로를 마주 보곤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의문 1. 얘는 왜 여기 있는가.
의문 2. 얘는 왜 여기서 내 허벅지를 주무르고 있는가.
의문 3. 내 허벅지를 주무르던 손은 왜 이 순간에도 슬금슬금 위로 올라오고 있는가.
의문 4. 더듬더듬 내 허벅지를 주무르며 올라오던 손은 왜 거기서 옆으로 방향을 틀고 있는가.
네 번째 의문을 떠올리던 나는 기겁하며 놈의 손을 쳐냈다. 놈은 어이없게도 버림받은 강아지 같은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하나부터 열까지 하나도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 넋이 나갔다. 아니, 하나는 알겠다. 빌어먹을 열쇠공이 우리 집 열쇠를 뿌리고 다니는 게 분명해.
“참새.”
“…네?”
꽁꽁 얼어붙은 양 아무 말도 않던 놈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같지도 않은 호칭이지만 어쨌든 나를 부르는 거 같아 대답해 주니 볼에 홍조가 떴다.
“역시.”
그 소리가 그렇게 듣기 싫을 수가 없다. 뭐가 역시야 역시는. 나는 또라이가 또 무슨 또라이짓을 할지 몰라 천천히, 아아주 천천히 침대를 벗어났다. 다행히 놈은 내가 우뚝 서서 저를 내려다 볼 때까지 얌전히 자기 손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내 허벅지를 차지게 주무르던 그 손이었다.
뭔가 악몽을 꿨던 것 같은 날 깨워준 건 고마운 일이지만 허벅지가 아려올 정도로 주물러 댄 건 전혀 고맙지 않았다. 나는 아직도 양복 차림인 내 상태를 보고, 넥타이와 재킷을 벗고 와이셔츠 단추를 풀었다. 자다 일어나서 그런지 갑갑하게 느껴져서 그냥 몸을 편하게 하려는 의도였을 뿐이다. 절대 저 새끼가 저런 말 씨불이라고 한 게 아니라.
“내가 너 젖꼭지 깨물어 보고 싶은 거 어떻게 알았어?”
무시하자, 무시. 저놈은 원래 저런 놈이다. 나는 뒤돌아서 반쯤 열었던 단추들을 다시 채웠다. 이제 됐겠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다시 뒤돌아섰더니 이번엔 내가 엉덩이를 살랑대는 걸 보고 엉덩이를 깨물어 보고 싶어졌단다.
갑자기 쌍둥이들이 생각났다. 끼리끼리 논다더니, 딱 그 짝이다.
“저기요, 선배.”
나는 이것저것 다다다 묻고 싶은 걸 참고 또 참으며 애써 웃었다. 쌍둥이 때보다 상황이 나쁘다. 어제 자기 전에 배터리 잔량 15%라며 충전 권장 알림을 띄우던 핸드폰은 꺼진 지 오래일 거고, 집 전화기는 너무 멀리 있다.
뭔가 저 또라이의 분위기상 내가 뛰면 호러 영화 속 귀신처럼 날 잡으러 올 거 같아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다. 고로 지원군을 부르는 건 불가능. 아까 손을 쳐낼 때 느꼈던 반동과 아직도 아린 허벅지를 봐선 여차할 때 힘으로 제압하는 것도 불가능.
나는 매력 하나 없는 내가 왜 정조의 위협을 느껴야 하는지 심각하게 고민할 새도 없이 흐르는 식은땀부터 닦았다. 쌍둥이들처럼 울컥해서 날 약 올리고 싶은 것도 아닐 텐데 왜 저러는 거야.
내 나지막한 부름에 반응하여 날 향해 돌린 눈길이 엄청 부담스럽다. 왜 지금은 눈동자가 안 멍해? 왜 오히려 또렷해? 나는 미묘하게 웃는 것 같은 무표정을 주시하며 말을 하려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말을 하려고. 그러나 나는 살짝 열었던 입을 쩍 벌리고 경악하는 데 썼다.
“너 고추 얼마나 덜렁거려?”
“…네?”
“참새는 쫑쫑 걸으니까 걸을 때마다 쫑쫑 덜렁거려?”
“…예?”
“그럼 너는 쫑쫑이네? 쫑쫑아, 나 씹질하고 싶어. 구멍 벌려주지 않을래?”
나는 홀린 듯 녀석에게 가운뎃손가락을 내밀었다. 쌍욕을 입에 담기는 싫은데 뭐든 나쁜 욕을 해 주고 싶었다. 정새빈은 내 손을 보더니 고개를 옆으로 내밀어 나와 눈을 맞췄다.
“알겠어.”
씨익 웃으면서 그렇게 말하길래 그래도 말을 알아듣긴 하는구나 싶었다. 그러나 곧이어 그게 내 큰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손을 내리는 순간 달려든 미친놈이 나를 그대로 눕히더니 내 바지와 팬티를 한꺼번에 내린 것이었다.
“미, 미쳤어요?! 뭐하는 건데요!”
나의 비명에도 녀석은 아랑곳하지 않고 벗겨낸 바지와 팬티를 저 멀리 던져 버리더니 내 허벅지를 잡고 확 벌렸다. 당황해서 어버버하는데 아랫도리에서 뜨거운 입김이 느껴졌다.
“선, 선배 잠깐만요. 선배!”
나는 당연히 소스라치게 놀라서 녀석의 뒤통수를 잡아당겼다. 그래도 점점 더 가까워지는 입김에 나는 나머지 한 손으론 녀석의 이마를 밀었다. 그러자 정새빈은 살짝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을 마주쳤다.
“쫑쫑아, 이거 뭐야? 왜 밀어. 치워 봐, 응?”
“아니 이걸 왜 치워요. 선배 같으면 치우겠어요?”
그렇게 말하자마자 미간을 찌푸린 그는 다시 고개를 숙이려고 했다. 나는 녀석의 머리채를 잡고 있던 손에 더 힘을 주어 당겼다.
“자, 잠깐만요. 잠깐….”
저지하는 내 말은 한 귀로 흘리며 머리를 앞으로 숙이려던 녀석이 멈췄다. 나는 그 틈을 타 녀석을 완전히 밀어 버리려고 이마를 밀던 손을 내려 녀석의 뺨을 밀었다. 그러자 정새빈이 머리채를 잡고 있던 손의 손목을 잡아 왔다.
“악!”
여리여리해 보이는 놈이 힘은 왜 이렇게 센 건지, 놈에게 잡힌 손목에서 저릿한 통증이 올라왔다. 나는 너무 아파서 손목을 비틀어 뺄 생각도 못하고 그대로 잡혀 있었다.
“쫑쫑아, 나 삐진다?”
한쪽 뺨이 밀려서 얼굴 반절이 뭉개진 놈은 그 상태에서도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공포영화의 한 장면 같아 소름이 돋았다. 나는 본능적으로 뒤로 조금 물러났다. 그러자 웃음기를 싹 지운 정새빈이 남은 한 손을 들어 그의 뺨을 밀고 있던 쪽의 손목을 쥐었다. 강한 통증을 느낌과 동시에 팔 힘이 빠져 버렸다. 정새빈은 양 손목을 잡은 채로 내 얼굴 바로 앞까지 제 얼굴을 들이밀었다.
“애태우는 거야?”
“예, 예?”
“나 아직 자지 냄새도 제대로 못 맡았는데 왜 이래?”
말하는 내용은 터무니없으면서 얼굴만 보면 안타까워 안아주고 싶을 정도로 세상 억울한 사람의 표정이었다. 나는 내가 처한 상황도 있고 공감해 주려던 내 정신을 고개를 흔들어서 일깨웠다. 휩쓸리지 말자. 휩쓸리지 말자.
그렇게 중얼거리는데 정새빈이 반쯤 앉아 있던 나를 뒤로 밀어 완전히 눕히더니 오른쪽 손목을 잡고 있던 손으로 엉덩이를 턱 잡았다.
“왁!”
나는 놀라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순전히 본능적으로 손을 휘둘러 녀석의 얼굴에 내리꽂아 버렸다.
“아.”
심상치 않은 퍽 소리와 함께 녀석이 나를 잡고 있던 것을 놓고 얼굴을 감쌌다. 나는 그 틈을 이용해 얼른 옷을 입고 방으로 뛰어와 구석으로 숨었다. 스릴러 장르를 한 번도 제대로 본 적은 없지만, 아무튼 그런 영화에 나오는 살인마처럼 놈이 쫓아올 것 같았다.
나는 그냥 숨는 것으로는 부족할 것 같아 무기로 쓸 만한 게 없나 눈을 굴렸다. 그러다 침대 밑에 널브러져 있던 야구 배트를 찾아내 얼른 그걸 집어 들고 다시 구석으로 와서 쭈그려 앉았다.
와, 내가 사람을 때렸어. 진짜 때렸어. 너무 세게 때렸나? 아프겠지? 여러 생각을 복잡하게 떠올리면서 호신용으로 챙기긴 했지만 전혀 이용할 생각은 없는 야구 배트를 꼭 껴안고 놈을 몇 분 간 놈을 기다렸다.
그러나 예상외로 놈은 쫓아오긴커녕 뭘 하고 있는 건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때린 거라 그냥 막 내질렀는데…. 설마 어딜 잘못 맞아서 설마 기절한 건가?
문득 놀라서 껴안고 있던 야구 배트를 내팽개치고 헐레벌떡 거실로 뛰어갔다. 아까와 같은 자리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정새빈이 보였다. 다행히 기절한 것 같지는 않았다.
“형 괜, 괜찮아요?”
나는 얼른 앞에 앉아서 놈의 고개를 들어올렸다. 놀랍게도 29살 건장한 남자 정새빈은 훌쩍훌쩍 울고 있었다. 더욱 충격적인 건 그게 어울린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어디가 잘못되진 않아 보인다는 것에 일단 안심했다.
길게 한숨을 쉬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녀석의 우는 얼굴을 올려다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어이가 없네. 아니, 이 상황에 우는 모습이 예쁘기 있어…? 멍하니 그를 지켜보고 있자니, 맞은 쪽 볼이 심상치 않게 부어오른 보였다. 내가 세게 때리긴 한 것 같았다. 아픈지 손도 대지 못하고 우는 놈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한숨을 쉬었다.
“잠깐 기다려요. 얼음주머니 가져올게요.”
나는 정새빈의 어깨를 대충 두어 번 토닥이고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얼음주머니를 만들러 부엌에 가려는 내 발에 방에서 도르륵 굴러 나온 야구 배트가 걸렸다. 휘두를 생각도 없는 걸 덜덜 떨며 안고 있던 내 모습과 훌쩍훌쩍 아이처럼 울고 있던 정새빈의 얼굴이 겹쳐지면서 얼굴이 달아올랐다. 에이 씨…. 쪽팔려….
“…형.”
“뭐.”
정새빈은 누가 봐도 삐졌다는 걸 알 수 있을 만큼 입을 댓 발 내밀고 말을 틱틱 내뱉었다. 얼음주머니를 대고 얼마 안 있어 울음을 그치고는 저 상태로 돌입했다. 처음엔 내가 때린 거니까 맞장구쳐 주듯 달래 줬지만, 당최 풀릴 생각을 안했다.
내가 힘 조절 안 하고 냅다 때리긴 했지만 저렇게 삐져서 툴툴 댈 자격은 없다고 생각하는데. …하, 모르겠다. 때린 건 미안하고 아파 보여서 안쓰럽긴 한데, 사람 삐진 걸 풀어 주는 재주는 나한테 없단 말이다….
“많이 아파요?”
“응.”
…너무 솔직한 대답에 잠깐 할 말을 잃었다. 벌겋게 부어오른 볼에 얼음을 갖다 댔으니 아픈 게 당연할 테지만 그래도 보통은 괜찮다 그러지 않나? 나는 더 이상 지적하기도 싫어서 그냥 입을 다물고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줬다.
진짜 아파 보이는 모양에 맘이 안 좋긴 하다. 입만 다물고 있었으면 내가 당한 짓이고 뭐고 진짜 미안해했을 거 같은데. 삐죽이는 걸 무시하고 얼음 봉지를 뺏어 문질러 주는데 겉면에 맺힌 물방울에 머리와 옷이 젖어 가는 게 보였다.
“잠깐 수건 가지고 올게요.”
안 되겠다 싶어 일어나 수건을 가져왔다.
“자요.”
“필요 없어.”
기껏 가져와 내밀었건만 수고가 무색하게 놈은 단칼에 거절했다.
“어어, 그대로 기대면 소파까지 젖잖아요! 이거 뒤에 깔고 기대요!”
“…싫어.”
누군 저 생각해서 제일 깨끗한 수건으로 가져왔건만 입을 삐쭉 내민 정새빈은 젖은 채로 소파 헤드에 몸을 기댔다. 적반하장도 정도가 있지, 이쪽이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서 달래주면 얼른 잘못했다고 넙죽 엎드려야 하는 거 아니야? 다시 차오르는 화를 꾹꾹 누르고 억지로 웃으며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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