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떨떠름하게 묻는 말에 정새빈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 녀석이 진짜 나를 기억하는 건가 싶어 다음 말에 집중하는데, 전혀 다른 방향에서 내 이름이 들렸다.
“진호 씨!”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오는 민선우가 보였다.
“어? 빨리 오셨네요? 잠깐….”
나는 녀석을 맞이하기 위해 조금 엉거주춤한 자세로 일어났다. 그리고 내 맞은편에 있는 정새빈을 보고 놀랐는지 커지는 민선우의 눈을 보며 상황을 설명해주려고 입을 열었다. 그러나 나보다 정새빈이 더 빨랐다.
“참새.”
……? 뭐?
“너 참새지?”
물론, 상황을 설명하는 말이 아니라 매우 뜬금없는 개소리를 했지만 말이다.
나는 일단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대꾸할 가치가 없는 말에 굳이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아직 서 있는 민선우를 돌아보며 옆에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내 손짓을 본 민선우는 날 향해 어깨를 으쓱이더니 의자를 빼서 앉았다. 정새빈은 그 질문 같지도 않은 질문에 답해주길 기다리는 것인지 아직도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역시 저 놈이랑은 친해지고 말고 할 것도 없어. 불가능해. 그냥 세탁비 주고 집에 가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뒷주머니를 뒤적여 허름한 지갑을 꺼냈다. 언제 시킨 건지 커피를 마시고 있던 민선우가 왜 그러냐고 물었지만 멋쩍게 웃어주고 다시 정새빈에게 고개를 돌렸다.
“선배. 아, 기억 못하시겠지만 일단 저 선배랑 같은 대학, 같은 동아리 나왔거든요. 그러니까 선배라고 부를게요.”
내가 말을 꺼내자마자 참새 소리를 하며 반짝이던 눈이 다시 멍해졌다. 나도 그냥 집에 가고 싶은 걸 참고 도리를 지키려는 건데, 정새빈이 저런 태도로 나오니 힘이 쭉 빠진다.
“저기, 제가 침… 흘린 건 진짜 죄송해요. 제가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니고, 음악이 너무 좋아서 깜박 잠들어 버렸어요. 마음 같아선 새 양복 사 드리고 싶은데 형편상 그건 좀 무리구요, 괜찮으면 세탁비 드리는 걸로 어떻게 안 될까요?”
질문을 하자마자 정새빈은 갑자기 고개를 돌려 버렸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왜 저러나 싶어 그 시선을 따라가 봤더니 그쪽엔 벽이 있었다. 나는 그 벽과 정새빈을 번갈아 보다가 그냥 하던 말이나 마무리하기로 했다.
“이왕이면 후배…. 아, 그러니까 지금까진 모르셨겠지만, 제가 일단 후배잖아요. 그러니까 후배인 걸 감안해서 세탁비도 좀 깎아 주시면 감사…. 아하하하! 그렇다고 아예 그냥 넘어가 달라는 건 아니고요! 이게 또 뭐냐, 동문의 정을 봐서 조금만 깎아 주시면….”
느껴진다. 세탁비 얘기를 시작했을 때부터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정새빈의 눈빛과 깎아 달란 대목부터 미묘해진 민선우의 표정이….
하, 나도 안다. 세탁비를 배상해주겠다면서 할인 얘기를 하는 게 매우 구질구질해 보일 테지. 하지만 나는 한 푼이 아쉬운 사람이다. 그들이 어느 정도로 비싼 옷을 입고 다니는지 대충이지만 아는 상태에서 무턱대고 그냥 다 지불하겠다고 하기엔 내 지갑 사정이 그렇게 여유롭지가 못했다.
조금의 쪽팔림 정도야 고정 지출 내역들과 대출금을 떠올리면 금방 가라앉았다. 당당해라 김진호. 너는 할 수 있다! 지금의 쪽팔림이 중요한 게 아니다!
“됐어.”
비장하게 그의 입 모양만 보고 있던 나는 정새빈이 툭 던지듯 뱉어 낸 말에 바보 같이 되물었다.
“네? 지금 뭐라고…?”
“돈 됐어.”
“그래요, 진호 씨. 대출이랑 고정 지출비 때문에 힘들 텐데 왜 돈을 쓰려고 해요.”
나는 말한 적 없는 것 같은 내 걱정거리들에 대해 언급하는 민선우를 한 번 보고, 다시 벽 쪽으로 고개를 돌린 정새빈을 봤다. 민선우는 저걸 어떻게 안 거야. 아니, 그보다 지금 정새빈이 됐다고 한 거야?
나는 뭐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어서 입안에서만 어물거렸다. 그러다 일단 하던 대화부터 얼른 끝내자 싶어 정새빈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나는 정새빈의 맘이 바뀔까 봐 얼른 지갑을 집어넣었다. 아까 살짝 틈 사이로 보니 한 만 오천 원 정도밖에 안 들어 있었는데 진짜 다행이다. 입꼬리가 절로 올라가는 것을 느끼며 이번엔 민선우에게 아까 했던 말에 대해 물어보려고 고개를 돌리는데, 마침 종업원이 커피 한 잔을 들고 왔다.
“진호 씨가 아무것도 안마시고 있길래 주문했어요. 달달한 거 좋아하죠?”
느낄 새가 없었지만 이제 보니 둘은 정말 좋은 선배인 거 같다. 알고 보면 정새빈도 그렇게까진 병신이 아닐지도 모르고, 이렇게 센스 있게 내 커피를 챙겨주는 민선우는 정말 세심한 사람 같았다.
뜨거운 컵을 조심스레 들어서 마신 커피는 달달하니 맛있었다. 모두들 조용히 차를 마시는 테이블에 침묵이 찾아왔다. 나는 카페에 남자 셋이 앉아 있는 모습이 퍽 웃기겠단 생각을 하며 홀짝홀짝 커피를 마셨다.
사실 뜨거워서 조금씩밖에 못 마신거지 차가운 거였으면 벌컥벌컥 마셔서 애초에 바닥을 보였을 거다. 천성이 그래서인지 커피든 뭐든 우아하게 한 모금 마시고 사색에 빠지기보단 맛있는 만큼 빨리 먹는다.
“한 잔 더 마실래요?”
“네? 음…. 아니요, 됐어요. 집에 가서 밥 먹을래요.”
지금쯤 야식 먹을 시간인데 아무리 맛있어도 커피로 배 채울 수는 없지. 다 마신 것 같은 정새빈과 아직 조금 남은 민선우의 커피 잔을 확인하고 의자에 좀 더 기대앉았다.
요즘 카페는 의자도 이렇게 좋은 걸 갖다 놓는구나. 언젠가 채예령의 손에 이끌려 가 봤던 곳과 별로 기억하고 싶진 않지만 볼일이 있어 가봤던 곳을 떠올리며 살짝 눈을 감았다. 아, 편해. 나 말고 두 사람이나 더 있는 걸 생각했을 땐 좀 무례한 행동일 수 있건만 피곤하기도 하고, 두 사람도 별말 안 하기에 고개를 모로 조금 꺾으며 눈을 감았다.
어차피 좀 있으면 일어나자 할 것 같으니까 설마 잠드는 일은 없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잠이 들었다.
그냥 내가 제일 병신이다 내가.
“…야?”
“응…… 왔어.”
뭐라는 거야. 정신이 몽롱하니 깨야겠단 생각은 있는데 눈을 뜨기 싫다. 누가 뭐라고 하는 거 같은데…. 으윽, 자세 불편해. 푹신하긴 한데 짧고 좁아. 몸을 열심히 뒤척여 조금 더 편한 자세를 찾아보려고 했지만 다 거기서 거기다.
에이 씨. 조금 짜증이 치밀어서 인상을 찌푸리니 뭔가가 미간을 문지른다. 아 뭐야. 얼른 고개를 돌려 푹신한 벽 쪽으로 돌아누웠다.
이게 그나마 제일 편해. 이마에 닿는 차가운 표면에 머리를 살짝 부비다 슬쩍 웃었다. 헤헤, 다시 자야지. 또 엄마 꿈 꿨으면 좋겠다.
하지만 정신만 몽롱할 뿐 잠은 오지 않았다.
“…네.”
“너는 왜… 새랑?”
“참새?”
“응.”
대신 말소리가 점점 또렷해졌다.
나는 무거운 손을 들어 백 톤처럼 느껴지는 눈꺼풀을 비볐다. 아 진짜 뜨기 힘드네. 그나마 조금 가벼워진 눈을 천천히 깜박이고 하품을 늘어져라 했다. 기지개도 펴고 싶은데 내가 누워 있는 공간이 좁은 것 같아서 그냥 손발만 쫙 폈다.
“일어났어요?”
부스스 눈을 뜨니 앞에 있던 민선우가 말을 걸었다. 내 마지막 기억으로는 분명 카페 소파에서 잠이 들었는데, 주변을 보니 민선우의 차 안인 것 같았다.
일단 묻는 말에 대답해야 할 것 같아 운전석에 앉아 있는 민선우와 조수석에 앉아 있는 정새빈을 번갈아 보고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무거운 눈꺼풀을 다시 한번 힘차게 감았다가 떠 봐도 여전히 차 안이었다.
“둘이 얘기 좀 하느라 한 잔씩 더 마시는 사이에 잠들었더라구요. 깨우기 그래서 그냥 차에 옮겨 왔어요.”
“그냥 그때 깨우셔도 됐는데….”
“하하, 아니에요.”
몇 번이나 봤는데도 여전히 볼 때마다 상큼한 민선우의 미소가 뒷좌석을 환하게 만들어 준다.
예전에 알바할 때 무심코 한 되게 예쁘게 웃으시네요, 라는 말에 민선우가 내 볼을 톡톡 두드리며 이왕이면 멋있다고 해 줘요, 했었는데. 그땐 멋있다보단 예쁘다가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정새빈을 옆에 놓고 보니 민선우도 멋진 축에 끼는구나 싶다.
나는 내가 깨기 전에 뭔가 얘기하고 있던 두 사람을 상기하고 얼른 핸드폰을 확인했다. 액정에 뜨는 시간엔 어느새 AM이 붙어 있었다.
“헉!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저 이만 들어가 볼게요.”
늦은 시간까지 민폐 끼친 게 미안해서 헐레벌떡 인사하고 차를 빠져나왔다. 그러자 창문이 지이잉 열리더니 민선우가 잘 들어가고, 다음에 봐요- 하면서 차에 시동을 걸었다. 정새빈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끝까지 아무 말도 없었다.
차 뒤꽁무니도 보이지 않을 때까지 열심히 손을 흔들던 나는 아직도 뻑뻑한 눈을 비비며 집 안으로 들어와 소파에 털썩 누웠다.
다시는 안 하던 짓 하지 말아야지. 내일부턴 그냥 살던 대로 살아야겠다. 그런 다짐을 곱씹으면서 말이다.
* * *
채예령이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까이에 선 놈의 눈동자 속에 비친 나는 웃고 있었다. 보이는 건 내 시선인데, 나는 생각만 하고 행동은 다른 누가 해 주고 있는 게 영락없는 꿈이었다. 뭘까. 이번엔 무슨 꿈이려나. 나는 진짜 있었던 일을 다시 꿈으로 꾸는 것보단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일이 꿈이 되어 나타나는 걸 좋아하는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가만히 일어나는 일을 지켜보기로 했다. 어차피 꿈속에선 그럴 수밖에 없기도 했다.
나는 채예령의 손을 잡고 걸었다. 앞서 걸어가는 채예령은 참 씩씩하고 사랑스러웠다. 그러나 예령이가 걸어가는 길 저 너머에서 하얀 현관문과 그 문 안에 있는 네 명의 사람을 본 나는 다급하게 예령이의 손을 쳐내려 했다. 하지만 무슨 힘이 그렇게 센지 내 손목만 아팠다.
돌연 공간이 일그러지더니 뒤쪽에서 총소리가 들려 왔다. 고개를 돌려 보자 내 뒤에서 정체 모를 검은 물체들이 총을 들고 쫓아오고 있었다. 달아나는 나는 원하는 대로 걸음을 멈추지도, 그렇다고 채예령만큼 기껍게 걷지도 못했다.
제발…, 제발. 날 살려줘. 다급함에 눈물이 나오려는 그때, 갑자기 뜬금없는 감촉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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