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정새빈.
최태혁, 민선우, 남궁후, 남궁호와 함께 채예령과 엮인 다섯 명 중 하나이며,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하면서 가장 미스터리했던 인물.
간단히 설명하자면, 일단 이놈도 잘생겼고, 부자고, 천재다. 아니, 그렇다고 들었다.
채예령에 의하면 놈은 음악을 전공했는데 악기도 연주할 줄 알았지만 작곡에 일가견이 있는 듯했다. 무슨 큰 대회에서도 상도 받고 그랬다던데.
나야 그 세계를 잘 몰라서 별로 대단하단 생각이 들진 않았는데 정말 굉장한 놈이긴 한지 예령이가 드물게도 방정을 떨면서 그 선배는 천재야! 진짜 천재! 라고 소리쳤었다. 하지만 대학 때 몇 번 볼 기회가 있었던 내가 받은 이미지는, 좀 잘생긴 또라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일단 정새빈네 집안을 설명하자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잘나가는 가전제품을 만드는 대기업을 운영하고 있는 재벌가이다. 소문엔 회장이란 사람이 꽤 엄격한 인물이라 자식들 모두 그의 지시에 따라 공대나 경상대를 갔다고 들었다. 정새빈만 빼고.
정새빈은 장남이었다. 그 엄격하다고 소문난 아버지가 장남만 제외한 이유, 그것도 음악 전공을 하게 둔 결정적 이유는, 바로 정새빈의 또라이 기질 때문이었다.
짙은 밤색의 윤기 흐르는 머리칼, 새까만 눈동자, 오뚝 서 있는 코, 꾹 다물린 빨간색 입술, 하얀 피부에 갸름한 턱 선. 정새빈은 한마디로 전형적인 동양형 미소년이었다.
몸이 그렇게 연약하지도 않고, 180의 결코 작지 않은 키를 가졌지만 어딘가 병약한 미소년을 떠올리게 하는 얼굴과 분위기를 띠는 사람.
전생에서 감기에 걸린 채예령한테 감기 걸리면 어떻게 아픈 거야? 라고 물었다는 걸 보면 병약함과는 전혀 관련 없는 사람 같지만, 어쨌든 그런 묘한 느낌을 주는 외관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놈은 범상치 않은 행동만 일삼았다. 몇 번 못 봤지만 볼 때마다 멍- 하니 허공만 쳐다보고 있었고, 말이 없었으며, 얌전히 있는가 싶으면 어느 순간 별 해괴망측한 짓을 하고 있었다.
나는 평소 소문에 느린 편이었는데도 그를 안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들은 것만 이미 열 손가락을 넘어갔고, 그 내용은 하나같이 다 어마어마했다.
어느 날 정새빈이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뜬금없이 ‘섹스하자.’고 말한 것을 목격한 사람도 있었고, 강의실 옆자리에 앉은 사람한테 ‘내 거 빨아줄래?’ 하고 묻는 것을 목격한 사람도 있었다. 하도 말이 안 되니까 누군가 지어낸 헛소문일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정새빈과 같이 강의를 들어 봤거나 한 번이라도 1시간 이상 같은 공간에 있어본 사람들은 이 소문들이 모두 사실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여기까지만 들어도 충분히 또라이 같지만 아직 가장 최악인 부분은 나오지 않았다. 바로, 이 녀석은 말로만 끝내지 않는다는 것. 이 새끼는 진짜 했다. 상대방이 오케이만 하면 했다.
내가 정새빈을 두 번째로 본 건 동아리방이 있던 건물의 화장실이었다. 화장실 창문으로 하늘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던 놈이 갑자기 뒤돌아서더니, 볼일을 보고 있던 놈한테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
‘너 자위 잘해?’
당황한 남자애는 예? 하고 물었지만 놈은 그걸 예, 로 알아 처먹었는지 그가 볼일을 다 볼 때까지 기다리다 화장실 칸으로 끌고 들어갔다. 이미 볼일 다 보고 손을 씻고 있던 나는 그 광경에 입을 떡 벌렸지만, 둘 다 나 따윈 신경도 안 쓰고 앗흥, 하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소름 끼치는 건 앗흥 소리를 낸 사람이 병약한 이미지였던 정새빈이 아니라 끌려 들어간 남자애였다는 것이다. 나는 차마 젖은 손을 말릴 생각도 못하고 뛰쳐나왔다.
그나마 내가 본 건 나까지 합쳐 세 명밖에 없었던 화장실이지만 소문엔 강의실, 학교 수면실, 주말 오후 카페 화장실, 초저녁 술집 화장실, 게이 바, 그리고 내가 가장 경악했던 심야 버스 등, 다양한 장소에서 목격담이 나왔다. 무슨 포르노 배우도 아니고 그런 게 가능하리라곤 상상도 못했는데.
그때 그 꼴을 발견한 버스 기사가 너무 당황한 나머지 버스를 멈춰 세우고 뭐라고 소리치자, 포르노를 찍는 중이라며 핸드폰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는 우스갯소리도 들었다.
놈은 남자 여자 상관 안 하고, 지위나 나이도 상관 안 했다. 자기가 관심 있는 것에 비정상적으로 저돌적인 정새빈은 그 외의 것엔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했다.
나는 회상을 멈추고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맘 같아선 계속 현실도피성 추억 되살려 보기를 시행하고 싶었지만 핸드폰 진동이 장난 아니라 어쩔 수 없었다.
꽤 많은 생각들을 한 거 같은데 겨우 10분 지났다니, 절망적이다. 저 귀찮은 거 많은 정새빈의 성격상 시간 좀 끌면 그냥 가 버릴 거란 예상이 빗나갔다.
나는 죄송한 마음이 옅어지는 걸 느끼며 핸드폰 잠금을 풀었다. 저번에 아프고 난 후에 다시 메시지 폭탄이 시작됐기 때문에, 이제 메시지 100 단위는 별로 놀랍지도 않다.
나는 별 내용 없는 메시지들을 대충 넘기고 답장을 썼다. 사실 개수만 많지 넷 다 원하는 내용은 하나씩이었다.
최태혁은 내가 있는 위치, 민선우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물었고, 후는 심심하니 어디 나가 놀자고 꼬셨으며, 호는 할 일 없는데 우리 집에 와도 되냐고 묻고 있었다.
최태혁부터 순서대로,
[밖이요.]
[얘기해요.]
[싫어요.]
[안 돼요.]
라는 답을 보내줬다.
최근 들어 그다지 친절하게 굴지 않아도 되는 분위기라 용기 좀 내봤다. 그러고 나서 고개를 들고, 다섯 번째 인물인 정새빈을 마주 봤다. 이렇게 된 거 빨리 해결하자는 심산이었다.
“저기, 정말 죄송해요.”
솔직히 공연장을 나올 때까지만 해도 상대가 ‘그’ 정새빈이니까 이대로 빠이빠이 하는 거 아닐까, 하는 기대를 했었다. 하지만 웬걸. 앞에 가던 정새빈이 슬금슬금 옆걸음질 치던 날 보더니 제 쪽으로 고개를 까닥였다.
엄청 재수 없었지만 잘못한 건 나였기에 닥치고 따라왔다. 그리고 도착한 카페는 메뉴판에 가격도 안 쓰여 있는 곳이었다. 망할 놈. 사실 그때부터 죄송한 마음은 거의 자취를 감추다시피 했었다.
“너….”
멍하니 커피만 마시고 있던 정새빈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시선은 여전히 탁자를 향해 있었지만 별로 상관없었다. 내 머릿속은 오직 세탁비로만 가득 차 있었다. 얼마지? 얼마야? 얼마일까?
“나 알아?”
“…네?”
나는 너무 놀라서 심장이 철렁했다.
“아니…. 아닌가….”
다행히도 놈은 그 이상 묻는 대신 혼자 중얼거렸다. 나는 저놈과 엮일 생각이 없었다. 놈이 날 알아볼 리도 없으니 이대로 모르는 척 세탁비만 갚고 헤어지려 했는데 갑자기 저런 드립이라니.
내가 아는 척을 했던가? 지금까지의 상황과 몇 마디 나누지 않은 대화를 곰곰이 떠올려봤지만 딱히 없었다.
역시 미친놈의 감이란 게 있는 것인가. 일순 마주쳤던 또렷한 눈빛을 상기하며 다시 멍해진 눈을 뚫어져라 관찰했다. 확실히 뭔가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고, 오히려 아무 생각 없는 것 같기도 한 얼굴이다.
머리는 누가 또 장난이라도 쳐 놓은 건지 새파란 색이고, 손가락에는 항상 같은 자리를 지키던 커플링이 없었다. 정새빈은 성격이 이상하긴 해도 잘생겨서 좋다고 쫓아다녔던 애들이 많아, 일방적으로 사귀고 헤어지는 일이 빈번했다. 자기 손에 뭘 끼워 놓든 불편하지만 않으면 신경 안 쓰는 놈이라 그런지, 세 번 마주쳤을 때마다 다른 반지를 끼고 있었다.
소문엔 길면 일주일, 짧으면 하루에도 몇 번이나 바뀐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였다.
“아.”
깜짝이야! 정새빈이 갑자기 뭔가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치켜들었다.
오늘 참 여러 번 놀란다. 이래서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안 돼. 이거 봐. 30만 원짜리 공연은 역시 나한텐 아니었던 거야. 집에서 음악방송이나 볼걸, 뭐 하러 이런 델 와서 봉변을 당하고 앉아….
“나 너 알아.”
“……?!”
“음…. 맞아. 알아.”
“저 아세요?”
“응. 너-.”
지이이잉-.
나는 때마침 울려 주는 핸드폰을 재빨리 집어 들었다. 민선우의 전화였다. 정새빈이 날 기억한다고 해서 엮인다는 확신은 없지만 모르는 사람일 때보다 연결점이 생기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솔직히 누군가 날 기억해주고 있을지도 몰라, 하는 기대를 하긴 했지만 저런 놈이 날 기억하고 있는 것도 좀 싫은 일이라 뒷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나는 미안한 표정으로 양해를 구하고 폰을 귀에다 갖다 댔다.
“네, 여보세요-.”
-어디예요?
민선우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 지금 카페요.”
-어디 카페요? 저 지금 공연장 앞인데.
“네?!”
-데리러 오겠다고 했잖아요, 아까.
네가 언제?! 내가 무슨 어린애도 아니고 집 정도는 혼자 갈 수 있어!
나는 기어코 내 위치를 알아내야겠다는 듯 질문해 대는 민선우에게 과연 여길 알려 줘야 할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민선우랑 정새빈은 분명 서로 알아볼 것이 뻔하고, 정새빈은 여기서 왜 민선우가 나오냐고 물어볼 것이다. 아니, 저 만사에 관심 없는 태도로 봐선 물어보지 않을 수도 있겠다만, 그렇게 되면 민선우 쪽에서 먼저 정새빈에게 무슨 말이든 할 거 같다.
그렇게 대화가 시작되면 자연스럽게 내가 누군지에 대한 이야기도 나올 거고, 그럼 내가 그의 대학 후배라는 것이 밝혀질 것이다. 그럼 내가 누군지 기억이 날 수도 있는, 데. 잠깐.
나는 거기까지 생각하다 내가 김칫국을 한 사발 드링킹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후배인 게 밝혀지는 게 뭐 어때서. 그게 밝혀진다고 정새빈이랑 엮일 가능성은 객관적으로 봤을 때 한없이 영에 수렴했다. 하, 나 진짜 자의식 과잉이었네. 나도 모르게 정새빈이 내가 누군지 아는 순간 엮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걱정하고 있었다.
나는 네 명과 친해지려고 했던 나의 노력들을 떠올렸다. 그렇게 죽을힘을 써야 겨우 친해질까 말까 하는 것을 몸소 경험했으면서 무슨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었던 거야. 나는 쪽팔림에 한숨을 쉬며 조용히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민선우에게 말했다.
“저 지금 공연장 지하에 있는 카페요. 네. 네. 아, 지금 누구랑 있는데 괜찮아요. 네. 네-.”
나는 민선우에게 카페의 위치를 말했다. 기어코 데려다 주겠다는 놈 때문에 좀 껄끄러운 한편, 가슴이 간질거리기도 했다. 이 맛에 형들하고 친하게 지내는 건가 봐. 형이 있으면 이런 느낌인 건가?
점점 좋아지는 기분에 슬쩍 웃음이 나온다. 헤헤, 형. 지금은 채예령을 약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래서 그렇게 형들, 형들 노래를 불렀구나.
나는 빤히 보고 있던 핸드폰 화면을 끄고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자, 이제 민선우 오기 전에 세탁비를 해결해 놔야지. 일단 끊긴 말을 끝까지 들어야겠다. 그 때까지 계속 날 보고 있던 정새빈을 향해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아는 형이 오기로 했었는데 까먹어서….”
“응.”
정새빈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답을 했다. 아무래도 저 녀석, 지금 내가 방금 무슨 말을 했는지 안 듣고 대답한 것 같았다. 나는 슬쩍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저기…. 아까 저 아신다고….”
“아. 응. 그러니까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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