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호 이야기-36화 (36/234)

36화

“뭐냐?”

“이거, 너 주려고.”

“…이걸? 나한테? 왜?”

“보러 가라고.”

…그러니까 왜? 뭐 하러? 너 내 음악 취향 알잖아? 나는 지극히 평범한 서민 남성이다. 어렸을 때부터 고상한 음악이라곤 들어 볼 기회도 없었고, 그럴 환경도 아니었기에 지극히 대중적인 음악들만 좋아했다. 길거리에서 자주 들리는 아이돌 음악이나 힙합 음악, 차트 상위권에 있는 발라드를 가장 많이 듣고, 좀 마니악한 걸로 쳐도 알앤비 정도가 한계다. 즉, 클래식은 나에게 자장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란 소리다.

어쩌다, 정말 어쩌다 뮤지컬 음악에 빠진 적은 있어도 오페라만은 싫어했던 나에게 사람 목소리도 없는 생 악기 연주를 강요하는 건 너 빨리 처자, 란 소리와 같은 맥락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내 취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것은, 지금 내 앞에 있는 채예령, 이 자식이다. 어렸을 때부터 저가 좋아하는 모차르트, 베토벤 같은 사람이 만든 곡들을 들려주며 날 수도 없이 레드 썬 시킨 놈이기 때문이다.

나는 어이없는 얼굴로 놈을 바라봤다. 그러자 채예령은 장화 신은 고양이 같은 얼굴로 내게 매달렸다.

“네가 이런 거 지루해하는 건 아는데, 어쩌다 보니까 이날 중요한 약속이 생겨서.”

“싫어.”

“진호야-. 부탁해, 응?”

나는 한 번 더 싫다고 소리쳐 줄까 하다 그냥 조용히 소파로 올라와 앉았다.

괜히 그런 지루한 데 가서 시간 죽이긴 싫다. 요즘 김진호 인생 최초로 남는 게 시간이란 경험을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싫었다. 저거 갈 시간에 최근 즐겨 보는 드라마를 볼 것이다.

다 마신 커피 잔이나 가서 씻으라고 얘기하며 손을 휘휘 저었다. 그리고 너 친구 많잖아. 딴 사람 알아 봐, 하는 소리도 잊지 않았다.

뭐가 남으면 꼭 나 주려 하는 저놈의 습성 같은 버릇 덕분에 이것저것 혜택도 많이 받아 왔지만, 그만큼 손해 본 것도 많았다. 그중에 저건 내가 손해 볼 종류의 것이다.

나는 다년간의 경험으로 이럴 땐 매정하게 거절해야 한다는 걸 알기에 그냥 무시하고 TV 리모컨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녀석은 내가 TV를 틀자마자 얼른 끄더니 내 코앞에 티켓을 들이대며 씩 웃었다. 이 자식, 내가 웃는 얼굴이라고 침 못 뱉을 줄 아나본데, 나는 그런 착한 놈-.

“이거, 30만 원짜리야. 거기다 어머니가 사 주신 거고.”

이야. 나는 그런 착한 놈이야.

역시 녀석은 날 너무 잘 안다. 나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하등 쓸데없는 종이쪼가리라 생각했던 고귀한 티켓 님을 두 손으로 영접했다.

이게 30만 원이나 한다니…. 세상 말세란 생각도 좀 들었지만 일단 내 손바닥 위에 느껴지는 사치의 증거가 먼저였다. 30만 원이면 그게 뭐든 일단 가야 하지 않을까? 마음이 완전히 기울었다.

채예령은 그런 내 모습을 보고 혼자 킥킥대더니 그렇게까지 할 필욘 없다고 건방진 소릴 나불댔다. 나는 티켓 님이 들으시고 기분 상하실까 봐 얼른 한 손을 위로 올려 소리를 막아 드렸다.

저 새끼 저거, 나한테 30만 원은 지 몸값보다 더 나간다는 걸 모르는 게 분명하다. 야, 인마! 나는 누가 널 28만 원에 사 간다 그럼 팔 거야, 새꺄!

* * *

“우와…”

원래 음악회 하는 데는 다 이런 건지, 내가 온 데가 특히 이런 건지 모르겠지만, 건물 안은 먼지 한 톨 없이 번쩍번쩍했다.

넓은 홀엔 나 같이 양복을 차려 입은 멋진 남자들과 드레스 차림은 아니지만 한껏 꾸민 여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고상하게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군데군데 대기하고 있는 직원들은 꼿꼿이 서 있다가 누군가 말을 걸면 상냥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주변 구경을 끝내고 넥타이를 어색하게 만지작거렸다. 자리가 자리인 만큼 제대로 갖춰 입어야지 싶어 옷장을 뒤진 건 좋은데, 넥타이 매는 법을 영 모르겠어서 민선우를 불렀었다. 이런 방면으로 생각나는 게 그놈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냥 안부전화 겸 가벼운 인사나 할 생각으로 연락한 건데 부담스럽게 바로 달려와 준 민선우는, 아직 넥타이 매는 법도 모르고 있었냐는 타박과 함께 가르쳐 줄 테니 기억하라고 말하며 뒤에서 천천히 매는 방법을 설명해줬다. 덕분에 방법은 알았지만 어째선지 내가 매면 모양이 영 이상해졌다.

‘역시 진호 씨는 제가 없으면 안 되겠군요.’

민선우는 그렇게 대놓고 나를 무시하며 넥타이를 매줬다. 솔직히 어이도 없고 기분도 나빴지만 닥치고 있었다. 해주겠다는데 맡겨야지, 뭐. 거기다 그거 매 주겠다고 우리 집까지 온 사람한테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여기 올 때도 민선우가 기어코 데려다주겠다 해서 편하게 차를 타고 왔다. 세상엔 정말 일을 자초하는 사람이 많다는 걸 새삼 알 수 있는 순간이었다.

“음음, 내 자리가….”

아까 들어올 때 안내해 준 사람이 이쪽 섹션이라고 했는데. 나는 티켓에 쓰여 있는 알파벳과 숫자를 중얼거리며 의자들을 유심히 살펴봤다.

“어! 여기다.”

내 자리는 무려 중간 섹션에서도 가장 가운데 있는 좌석이었다. 딱 봐도 좋은 자리인 것 같아 기분이 좋다. 나는 조심조심 사람들 무릎을 지나 푹신한 의자에 엉덩이를 부비며 앉았다.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 넓은 무대 위에 꽉 차 있는 의자들을 보니 좀 설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 영상이나 어플로 듣는 거랑 이렇게 직접 듣는 건 다를지도 몰라. 티켓 값이 30만 원이나 하는 걸 보면 악단도 엄청 유명한 팀일 게 분명한 데다, 자리도 제일 좋은 데인 것 같은데 확실히 뭔가 다를 거야. 감동의 물결이 확 밀려오는 거 아니야?

나는 별별 생각을 다 하며 조금씩 즐거워지는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고 열심히 주변을 둘러봤다. 이제 서 있는 사람보다 앉아 있는 사람이 더 많았다. 내가 앉아 있는 구역은 내 옆자리만 빼고 벌써 다 착석해 있었다.

아까 슬쩍 보니까 이 구역 전체가 내 티켓에 쓰인 등급이었던 것 같던데, 내 옆자리의 사람은 30만 원이 안 아까운 걸까? 업 된 기분 덕에 좀 너그러워져서 오지랖 넓게 옆 사람까지 걱정하고 있는데, 드디어 악기를 든 사람들이 나와 무대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얼떨결에 관객들을 따라 박수도 치고, 저절로 조용해지는 공기엔 같이 긴장하며 꿀꺽 침을 삼켰다. 그리고 곧 연주가 시작됐다.

“…저기.”

“으음….”

“…….”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지만 일어나기가 싫었다. 볼이 좀 축축하긴 하지만 딱 편하게 기대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잘래요오….”

나는 기대고 있는 곳에 머리를 부비며 뭉개지는 발음으로 힘겹게 말했다. 그러나 이번엔 누군가 내 어깨를 흔드는 것이 느껴졌다. 아, 정말. 조금만 자겠다는데 누가 자꾸 깨우는 거야. 나 어제 제대로 못잤…, 지 않지. 잠깐. 나 연주회 보고 있었는데?

나는 갑작스러운 깨달음과 동시에 온몸에 돋는 소름과 철렁 가슴이 내려앉는 걸 느꼈다. 나 잠들었…. 아니, 잠든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나 지금 어디 기대 있는 거야. 볼은 왜 또 축축해.

나는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상황 파악을 위해 실눈을 떴다. 시야에 들어오는 텅 빈 의자들과 빈 무대. 시선을 아래로 내리니 깔끔한 정장 바지를 입은 다리가 보였고, 옆으로 돌리니 굉장히 곤란한 표정의 직원이 내 쪽으로 허리를 숙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하하하, 아무래도 난 진상 고객이자 민폐 덩어리 옆자리 사람이 된 모양이었다.

역시 티켓을 팔았어야 했다. 아니, 채예령의 마지막 말만 아니었어도 팔려고 했다. 어머니가 구해 주신 표. 그 말에 다른 생각 못하고 와 버린 내가 원망스럽다. 그게 뭐라고. 채예령네 어머니가 나한테 뭐라고….

나는 내 맞은편에 앉아 있는 남자를 힐끗거리다 눈을 질끈 감았다. 젠장, 많이도 젖었네! 저 양복 물어보나마나 비싼 거일 텐데…. 세 시간 전의 내게 달려가 귀싸대기를 사정없이 날려주고 싶은 기분이다.

상황을 정리해 보자면 대략 세 시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니, 거슬러 갈 것도 없다. 박수를 치고, 같잖지도 않은 기대감에 침을 삼키고, 지휘자가 손을 올린 그 순간 연주가 시작되면서, 나는 바로 곯아떨어졌다.

눈을 다시 떴을 땐 이미 공연이 끝나 있었다. 중간에 깨기는커녕 꿈도 안 꿨다. 30만 원짜리 공연 보러 와서 처음 몇 소절 듣고 내리 잠만 처자다가 옆 사람 어깨에 기댄 채로 자다 깬 것이다.

사실 그 정도라면 간단히 사과하고 줄행랑쳤겠지만 내 볼 전체가 축축할 정도로 침까지 흘린 터라 차마 모른 척할 수 없었다. 거기다 눈앞의 현실이 꿈이길 바라며 최대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리고 나선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졌다.

언제부턴지 몰라도 어쨌든 내가 가슴언저리까지 침으로 적셔 놓을 정도의 시간 동안 머리를 얹고 있던 사람이, 어느샌가 잊고 있었던 정새빈이었기 때문이다.

칼 맞고 길거리에 쓰러져 있던 최태혁, 급하게 아르바이트를 구해야 했던 민선우, 스키장에서 우연히 마주친 쌍둥이들. 채예령이 ‘선배들’이랑 다시 마주치게 된 계기들은 이러했다. 가물가물했던 쌍둥이들과의 만남도 얼마 전에 회귀 전 기억을 정리하면서 떠올랐다.

그리고 다시금 느낀 건, 지금의 현실이 이전 생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었다.

최태혁을 내 집에 데려다 놓으면서 뭔가 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지만, 민선우 때까지만 해도 채예령이 만난 루트대로 만나서 그런지 그다지 실감 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내 삶의 패턴이나 두 놈의 이미지는 바뀌었다고 의식하면서도 큰 틀이 바뀌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은 것이다.

나는 그들과 조금이나마 친해지려 접근한 거지, 딱히 채예령과 그들의 만남을 막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그래서 정말 인연이란 게 있다면 무슨 일이 있든 여섯 사람은 다시 만나게 될 거고, 그들은 변함없이 채예령을 좋아할 거라 생각했다.

아무튼 쌍둥이들이 그렇게 어이없게 등장하지만 않았어도 아마 지금까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터였다. 내가 확실히 전과는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건, 쌍둥이의 등장 이후부터이기 때문이다.

당시엔 생각나지 않았던 스키장에서의 재회가 아니라, 최태혁과 민선우에게 잡혀 온 두 사람을 보았을 때부터 어렴풋이 상황이 많이 변했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그 뒤로 남궁 형제가 워낙 귀찮게 굴어서 차분히 생각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대충 넘겼지만, 며칠 전 침대에 누워 잠들 때까지 줄곧 전생과 지금에 대한 생각만 했다.

전과 변하지 않은 것들, 변한 것들, 변할 수 없는 것들과 변할 수 있는 것들까지. 힘닿는 데까진 최대한 자세히, 회피하지 않고 정리했었다.

결론만 말하자면 이제 더 이상의 변화는 필요치 않다는 것이었다.

앞으로 변할 가능성이 있는 것들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들이었기에. 괜히 일을 늘리는 것보다 이미 벌어진 변화들을 수습하고 관리하는 게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범주엔 지금 내 앞에 있는 정새빈도 물론 포함이었다. 즉, 그와 굳이 마주칠 생각이 저언-혀 없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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