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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호 이야기-35화 (35/234)

35화

어머니는 잘 지내시냐, 아버지 일은 잘 되시냐, 별 시답잖은 이야기를 주고받던 녀석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눈을 빛냈다. 어째 불길하다 싶더니 역시 네 명에 관한 얘기가 나왔다.

이 녀석은 내 옆집이고, 자주 집 밖으로 나돌아 다니는 놈이니까 어쩌면 길에서 스칠 수도 있겠다 생각은 했지만 막상 이렇게 들으니 또 느낌이 다르다. 나는 아직도 커피를 홀짝대고 있는 녀석에게 무심함을 가장하고 물었다.

“만나서 반가웠겠네?”

질문을 듣자마자 눈을 한 바퀴 굴린 녀석은 살짝 떨어져 있는 탁자를 자기 앞으로 끌어당기며 입을 열었다.

“그렇지 뭐. 근데 어젠 선배가 바빠 보여서 그냥 인사만 했어. 오랜만에 보니까 옛날 생각 나더라. 하, 우리 대학 때 동아리 활동하면서 진짜 재밌었는데. 그치?”

또 시작이네. 저 일방적인 추억 되새기기. 나는 무심코 나오려던 한숨을 속으로 삼켰다. 내가 시큰둥하거나 말거나 녀석은 말을 이어 갔다.

“처음엔 동아리 인원이 별로 없어서 동방 되게 넓게 썼잖아. 방학 때 스키장 갔을 때도 형들이 1 대 1 교습처럼 딱 붙어서 잘 알려 주시고. 그 덕분에 스키 되게 많이 늘어서, 이제 스키장 가면 누구 가르쳐도 되겠다는 소리 들어.”

“아아 그러냐. 부럽네.”

나는 첫 방학 때를 빼곤 스키장 활동에 참여한 적이 없었지만, 확실히 그때를 떠올려 보면 녀석들이 잘 가르쳐주긴 했던 것 같다. 저 녀석을.

나는 채예령한테 설명 하는 걸 옆에서 엿듣는 것처럼 들었다. 전혀 친하지 않은 그룹과 같이 어울리면 대충 그런 취급을 받는다. 그렇다고 나한테 살갑게 굴기엔 그들은 내게 관심이 없었고, 나는 먼저 다가가기엔 붙임성이 없었다.

그때 느꼈던 소외감을 떠올리며, 나는 문득 지금이라면 좀 다르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 생각을 마치자마자 깨달았다. 아, 확실히 많이 달라졌구나.

이제 그들에게 나는 더 이상 존재감 없는 채예령의 친구는 아니었다. 나름 지켜줘야 하고, 고용하고 싶고, 같이 놀고 싶은 상대인 것 같았다. 나는 조금씩 우울해지던 마음이 다시 밝아지는 것을 느끼며 여전히 대학 시절 추억 보따리를 풀고 있는 채예령을 보았다.

어쩌면, 어쩌면 지금은 내가 채예령보다 그들과 더 가까워진 것이 아닐까? 이번엔 녀석이 아니라 내가 그들과 먼저 만났고, 더 깊게 엮였잖아. 채예령이 내가 모르는 새 그들과 만난 것이 아니라면 그럴 가능성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내가 그들을 만날 기회들을 가로챘다고 하더라도, 그들과 만날 수 있는 방법이 그것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 나는 침을 한 번 삼키고 채예령의 말을 끊었다.

“예령아. 너 동아리 선배들이랑 지금은 연락 안 하는 거지?”

그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채예령이 대답했다.

“어…. 그… 랬지?”

“그랬다고?”

“응. 한동안 연락 안 했었는데, 얼마 전부터 이래저래 마주치면서 다시 연락하는 중이야.”

나는 그 말에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어 다시 한번 질문했다.

“다들 그냥 마주치기만 한 거 아니었어? 그 뒤로 연락 하고 있는 거야? 어쩌다?”

평소 같지 않은 내 집요함에 조금 이상하다는 듯 눈썹을 모으던 채예령은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는 성격답게 이런 저린 이야기를 풀어놨다.

“태혁 형이랑은 너희 집에서 같이 밥 먹는 것 때문에 연락해야 했잖아. 사람들이 잘 모르는데, 나는 그 형이 겉보기엔 무뚝뚝하고 차가워 보여도 내면은 굉장히 세심하고 다정하다고 생각해. 그때 돌봐 준 거 고맙다고 거의 매일 전화해서 내 안부 물어봐 주고, 나 취직 준비하는 거 하소연도 들어주는 거 있지? 내가 알던 형 그대로더라.”

“…다정? 세심하다고?”

걔가? 최태혁이? 우리 집 숟가락 반 토막 낸 그 녀석이?

“응. 거기다 웃을 땐 세상 순하게 웃잖아. 형이 웃는 거 처음 봤을 때 진짜 신기했는데. 낯을 많이 가리는 건지 사람들 앞에선 안 웃잖아. 근데 둘만 있으면 잘 웃어서, 나중에 적응하긴 했지만.”

웃, 웃어? 걔가? 세상 순하게?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최태혁과 채예령이 알고 있는 최태혁은 다른 사람인 건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 이게 채예령과 나의 클라스 차이구나. 한 달 동안 살 부대끼면서 살면 뭐해. 지나가다 몇 번 마주치는 게 다고, 전화 몇 통화 하는 게 다라고 해도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결국 최고지.

나는 세상 순하게 웃는 최태혁을 상상해 보다 닭살이 돋아서 팔을 쓸었다.

“태혁 형은 우리 집에서 만났고. 선우 형은? 선우 형도 만난 거야?”

“아 맞다. 야, 너 좀 섭섭해? 너 그 알바, 선우 형 집에서 하는 거였다며! 어떻게 말 한마디를 안 해 주냐?”

나는 갑자기 날아오는 질책과 째려보는 눈빛에 고개를 조금 뒤로 물렸다. 아니, 그게 섭섭할 일인가? 채예령의 급발진이 이해가 안 갔던 나는 인상을 썼다.

“그걸 굳이 말해야 해?”

“아니, 같이 동아리 활동한 선배 다시 만난 얘기 해 주면 반갑고 좋잖아. 그것도 고용주랑 고용인으로 만났다는데, 얼마나 흥미진진한 얘기야.”

이게 바로 사회성이라는 것인가, 아니면 얘가 그냥 말이 많고 오지랖이 넓은 것인가. 나는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다시 되물었다간 괜히 한소리 들을 것 같아서 그냥 미안하다고 했다.

“아무튼, 큰아버지가 선우 형네에 좀 죄송할 일이었나 봐. 일할 사람 못 구한 게. 내가 선우 형이랑 친했었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나한테 선물 들고 대신 한 번만 가 달라고 부탁하시더라고. 어려운 일 아니니까 갔지. 선우 형이 그런 걸로 화낼 사람도 아니니까, 그냥 오랜만에 형 볼 겸.”

내가 자기한테 말하지 않은 건 섭섭하다고 해놓고 지도 나한테 말 안 했네 싶었지만, 따졌다간 쓸데없는 말이 길어질 것 같아서 그냥 조용히 있었다.

“오랜만에 보니까 역시 되게 반갑더라. 이야기만 몇 시간을 했어. 맞다, 형 요리도 잘하시던데? 처음으로 형이 해준 요리도 먹고, 형 직장생활 얘기도 듣고 하니까 어느새 밤이더라. 그때 못 끝낸 얘기가 많아서 조만간 다시 보자고 연락 주고받기 시작한 게, 어쩌다 보니까 지금까지 하고 있어.”

그러면서 채예령은 생각난 김에 답장이나 해야겠다고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요리를 잘 한단 말이지, 민선우가. 와, 나는 그건 또 몰랐네. 아니, 알 수가 없지. 먹어보기는커녕 해 주려는 시늉도 못 봤는데. 그리고 뭐, 매일 연락을 주고받아? 나는 한동안 정말 거짓말처럼 아무 연락이 없던 민선우를 떠올리며 코웃음을 쳤다.

못마땅한 마음에 팔짱을 끼고 어이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으니 채예령이 답장을 마쳤는지 핸드폰을 넣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

그래, 아무것도 아닌 일이다. 아무리 동고동락을 했고, 매일 같이 밥을 먹고, 정도 이상의 스킨십까지 한 사이여도 대학 때 1년을 넘게 친하게 지낸 데다 좋은 감정까지 가진 사람하곤 비교가 안 되는 게 당연한 거다. 나는 잠깐이지만 나도 누군가에게 채예령만큼 비중 있는 사람일 수도 있다고 기대했던 스스로가 한심해졌다. 긍정 회로를 돌리고 싶어도 대우가 너무 다르잖아, 이건.

“호랑 후 형은 아까 말했다시피 요 앞에서 만났다가 게임 정보 공유하느라고 연락하고 있어. 아, 근데 그 형들은 옛날부터 그러더니 오랜만에 만나도 나한테 자기 누군지 맞혀보라고 그러더라? 일란성 쌍둥이라 비슷하긴 해도 둘이 묘하게 다르게 생겨서 헷갈릴 수가 없는데, 맞힐 때마다 매번 놀라는 게 웃긴 거 같아. 안 그래?”

이젠 묻지도 않았는데 남궁 형제와의 일까지 술술 얘기하는 채예령의 이야기를 흘려들으며 그냥 발가락이나 만지작거렸다.

안 그래? 는 뭔 안 그래, 야. 안 그렇다, 이 자식아. 나는 죽어라 노력해도 못 알아보는데, 누구는 어떻게 못 알아볼 수 있냐고 말하는 게 참 불공평하다고 느껴졌다. 나도 한번 해 보고 싶다. 못 알아보는 게 신기하던데, 하는 대사.

어쩐지 채예령과 나 사이의 갭을 다시 한번 깨달은 것 같아서 별로 좋은 기분은 아니다. 누군 작정하고 만나야 만나지는데다, 친해지려고 발악을 해야 겨우 좀 친해지는 것 같은 느낌인데, 쟨 어떻게든 좋은 사람들이랑 친해지게 해 주려고 온 세상이 도와주는 것 같다.

저런 게 바로 주인공의 인생이겠지. 채예령이 이야기 속 주인공이라면, 나는 엑스트라일 거고….

터무니없는 시샘이란 건 나도 알고 있다. 그래도 억울한 건 억울한 거다. 난 뭐 쟤 옆집 아닌가? 나는 뭐 그 길 안 지나다녀? 민선우야 녀석이 직접 찾아갔다지만, 다른 놈들은 어찌 됐든 우리 집 앞에 있는 길목에서 만났다는 거 아닌가!

회귀 전 나하곤 마주치긴커녕 머리카락 한 올 안 보여주더니 말 들어 보니까 채예령하곤 기회만 되면 마주쳤단다.

그리고 뭐냐, 그 자연스러운 대화 흐름은. 나는 작정하고 주제를 정하고 눈치 살살 봐 가며 얘기해야 그나마 대화를 이을 수 있었는데, 저 녀석은 그냥 쉽게 그들과 친해진 것 같다. 순간, 무언가 절대 거스를 수 없는 것으로부터 차별받는 듯한 느낌이 확 들었다.

아아, 짜증나. 될 놈은 되고, 안 될 놈은 안 된다는 거냐? 나는 진지하게 치미는 짜증을 꾹꾹 누르며 어느새 탁자에 엎드려 있는 채예령 옆으로 미끄러지듯 내려앉았다.

이렇게 찾아오기까지 한 거 보면 뭔가 용건이 있겠지. 빨리 들어주고 돌려보내자.

나는 녀석의 정수리 부근의 머리카락을 몇 가닥 세게 잡아당겼다. 그리고 비명도 없이 아픈 부분을 쓱쓱 문지르며 몸을 일으켜 앉는 놈에게 물었다.

“그래서, 여긴 왜 왔는데.”

잠깐 불만 어린 표정을 짓던 채예령은 생각났다는 표정으로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뭔가를 꺼내 활짝 웃으며 내 앞으로 슥 밀어 주었다. 클래식 음악회의 티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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