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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호 이야기-34화 (34/234)

34화

“…하하하, 하, 하….”

씨발. 누가 고소장 좀 가져와. 이게 말이 돼? 문고리가 뜯어졌어도 신기했을 텐데, 쟤네는 아예 문을 넘어트렸다. 그러니까 지금, 문을 고정하고 있던 경첩이 사람의 힘으로 떨어졌다는 거지? 헐크나 되어야 문을 뜯어내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나는 안쪽으로 넘어진 문을 피해 뒤로 물러서서 등을 벽에 찰싹 붙였다. 그리고 문 위로 드리워진 그림자를 따라 시선을 올렸다.

내가 비위생적인 걸 좀 싫어해서 좀비 영화를 한 번도 안 봤는데, 주인공이 어떤 기분인지 알 것 같은 느낌이다. 1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서 굉장히 사악한 표정으로 슬금슬금 다가오는 게 장난 아니게 소름 끼쳤다.

씨… 씨발!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길래 이러는지 당최 이해가 안 간다. 나는 엉덩이 걸음으로 최대한 벽 쪽에 붙어 조금이라도 놈들에게서 떨어져 봤지만 좁아터진 화장실에서 도망쳐 봤자 거기서 거기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수건이라도 걸칠걸, 아직 알몸인 채로 있다니. 난 아무래도 천하의 멍청인가 보다. 겁을 주려는 심산인지 더럽게도 느리게 걷던 녀석들이 드디어 발끝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섰다.

최대한 몸을 웅크려서 몸을 가려도 장신인 놈들이 위에서 내려다보는 위압감은 역시 장난 아니다.

최태혁! 늦잖아, 이 빌어먹을 새끼야!

나는 순식간에 쌍둥이에게 양팔이 잡혔다.

“겁도 없이 날 때렸다 이거지…?”

“아, 아니. 그게….”

“하하하-. 후 너는 그래도 혹은 안 났잖아. 하하하하하!”

“잠… 잠깐! 형!”

혹은 나도 났거든!

“잠깐 놔 봐요! 놓고 얘기해요!”

아무리 소리 질러도 들은 척도 않는 녀석들은 내 양팔을 잡고 밖으로 질질 끌었다. 나름 건장한 사내라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이렇게 쉽게 끌려가다니, 내가 의외로 가벼운 건지 아님 놈들 힘이 장난 아닌 건지 모르겠다.

쌍둥이는 누워 있는 문을 피해 날 붕 들어 옮기기까지 하는 괴력을 보여주며 기어코 날 화장실 밖으로 끌어냈다. 나는 온 힘을 다해 발버둥 쳤다. 끌고 가는 와중에도 어색하게 하하하 웃어대면서 귀가 썩어 버릴 것 같은 이야기를 줄줄 해대는 놈들이 공포스러워서라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쌍둥이들은 내 젖꼭지를 자기 이마에 난 혹만큼 튀어나오게 해줄 거라느니, 내가 발로 자기 배를 후벼 판 대가로 자기 걸로 내 후장을 후벼 파주겠다느니 하는 병신 같은 소리만 했다.

저놈들도 내가 패닉 상태인 만큼 정신이 나간 것이 분명하다. 아니, 정신이 나간 거여야만 한다. 멀쩡한 정신에 저런 소릴 하는 사람은 내가 알기론 정신병자들밖에 없다.

나는 팔목을 부서져라 잡고 있는 이 둘이 제발 정상인이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빌며 결국 방 앞에 도착했다. 활짝 열려 있는 문 안으로 흐트러진 침대가 보이자마자 아까의 치욕적인 순간이 생생히 재생되었다. 그 바람에 나는 지랄 발광을 떨기 시작했다. 얼마나 추잡스럽게 반항을 했냐면, 날 도우러 온 최태혁이 내가 아니라 쌍둥이를 구해냈을 정도였다.

“에이 씨, 바지가 침 범벅이야.”

“나는 소매가. 으으- 축축해! 짜증나!”

흥, 그거 참 고소한 소식이네 그려. 그렇게 만든 장본인으로서 정말 보람찬 평가로구만. 나는 씩씩대며 놈들을 노려봤다.

쌍둥이들은 최태혁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상태였다. 왠지 분위기상 나도 무릎 꿇고 앉아야 할 것 같았지만 꿋꿋이 소파에 앉았다. 어쨌든 난 잘못한 거 하나도 없으니까.

쌍둥이들 종아리나 팔에 난 이빨 자국하고 발등에 났을 멍은 다 정당방위다. 그러길래 누가 알몸인 날 침대로 끌고 가면서 그런 험한 말 지껄이랬나? 나도 알고 보면 한 성깔 하는 놈이다. 누구누구처럼 세상을 아름답게만 보지도 않고,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의무감도 없다. 그저 조용히 튀는 일 없이 살고 싶으니까 지금껏 성질 죽이고 살았던 거다.

나는 무릎을 꿇고도 힐끔힐끔 나를 노려보는 후와 호에게 혀를 내밀며 최태혁 가까이 붙어 앉았다. 옷은 최태혁이 나에게서 쌍둥이를 구해내자마자 입었다. …음. 그냥 날 구해낸 거라고 하자. 내가 못된 짓 한 거 같잖아. 그래.

침묵이 길게 이어졌다. 난 최태혁이 둘을 아주 호되게 혼내주길 바라며 아까 쌍둥이들이 둘러 준 이불을 옹골차게 쥐었다. 간혹 쌍둥이들이 불만 어린 목소리로 뭔가 얘기했지만 나와 최태혁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솔직히 나로선 최태혁이 그들에게 따끔한 소릴 해주길 바랐기에 좀 실망스러운 시간이었지만, 막상 녀석이 눈을 마주쳐오며 하는 말에는 고개를 저었다.

“왜. 아직 분이 안 풀려? 저 녀석들 손목 한 번씩 부러트려 줘?”

그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에이 설마, 농담이겠지? 나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원하면 언제든 말하라는 최태혁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서 민선우가 입만 웃고 있는 기괴한 표정으로 등장했다.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하는 사실은, 우리 집은 아직도 열쇠를 쓰는 집이고, 나는 여기 있는 그 누구에게도 우리 집 열쇠를 준 적이 없다. 애초에 그만큼의 스페어 키가 있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정상적이라면 초인종을 누르고 내가 문을 열어 줘야 들어올 수 있다는 말인데, 초인종은 개뿔 나는 문을 열어준 기억이 없다.

나는 점점 안 좋아지는 몸 상태를 느끼며 왜 왔는지 모를 민선우를 쳐다봤다. 거실로 들어서자마자 무릎 꿇고 있는 쌍둥이를 발견한 녀석은 표정을 굳히며 아주 또박또박 말했다.

“쓰레기들.”

사실 민선우가 나한테 한 짓을 생각하면 겨 묻은 개가 똥 묻은 개 나무라는 것 같았지만 그 발언이 조금은 통쾌했기에 토를 달지는 않았다. 그러나 쌍둥이들은 아니었나 보다.

“하,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너한테만은 그런 소리 듣기 싫은데.”

그 말에 민선우의 반응이 궁금해서 고개를 휙 돌리는데 순간 머리가 띵- 하고 울렸다. 어라, 갑자기 왜 이러지.

“세 명 다 똑같은 놈들이 입만 살아서.”

“그렇게 혼자 결백한 척 굴지 말지? 네가 이 집에 사는 동안 아무 짓도 안 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나는 어지러운 머리에 손을 얹고 이번엔 옆에 앉은 최태혁을 올려다봤다. 그래, 쟤네는 모르겠지만 너도 썩 그렇게 당당한 입장은 아니지.

하지만 최태혁이 내 거기를 만졌다는 얘기를 내 입으로 할 생각은 없으므로 녀석이 코웃음을 치는 모습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어우, 얄미워.

나는 최태혁을 보느라 들었던 머리가 점점 힘없이 뒤로 젖혀지는 것에 놀라 목에 힘을 줬다. 그리고 얼른 고개를 숙이고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아, 점점 머리가 더 아프다. 나는 무거운 머리를 기울여 옆에 있는 최태혁의 어깨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내 생각보다 몸에 힘이 없었는지 그대로 고꾸라져 의도치 않게 녀석의 무릎 위로 쓰러졌다. 의식이 좀 더 흐려질 즘 최태혁이 기절 직전인 나를 급하게 방으로 옮겼다.

“진호 씨, 괜찮습니까?”

아, 정말 귀찮아 죽겠다. 아파서 그런지 멍해 죽겠는데 한 놈은 옆에 앉아 계속 괜찮냐고 물어보고 두 놈은 자꾸 뭘 하는지 부산을 떨고, 나머지 놈은 손을 조물거리고 있다.

떨쳐낼 힘은커녕 말하기도 힘에 부쳐서 그냥 놔두고는 있지만 진짜 맘 같아선 확 뿌리치고 싶다. 얼마나 짜증이 나면 눈물이 나오려고 하냐. 열도 다시 오르는 건지 얼굴이 후끈거린다. 특히 눈이 쓸데없이 아련해져서 잘 안 보여. 눈을 감으니 조금 나아졌지만 여전히 밝은 빛이 느껴져 눈이 아팠다.

“불, 좀 꺼주세요.”

마지막 힘을 쥐어짜서 말하고 나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주변에서 소란스럽던 녀석들도 빛이 없어짐과 동시에 조용해졌다. 잡고 있던 내 손을 이불속으로 집어넣어 주더니, 곧 이불 위로 토닥이는 무게와 머리를 쓸어 올리는 손가락이 느껴졌다. 나는 그 뒤로 몇 번을 잠들었다 깨어나기를 반복했다.

신기했던 건 내가 잠들면 그대로 가 버릴 줄 알았던 네 명이 꽤나 착실하게 나를 간호해줬다는 것이다.

이마의 수건이 미지근해지기 전에 착착 갈아주고, 말하기도 전에 필요해 보이는 건 바로바로 대령하고, 살짝 졸면서 달갑지 않은 꿈이라도 꾸는 듯싶으면 다들 합심해서 날 귀찮게 했다.

아플 때 옆에 누가 있는 건 처음이라 그런지 엄청 귀찮고 어색했지만 평소처럼 통제할 수 없이 구느니 이쪽이 훨씬 낫다 싶기도 하고.

나중엔 서로 교대하기로 한 건지 잠깐씩 졸다 깰 때마다 다른 놈이 있었다. 정신을 하도 놨다 잡았다 해서 꿈인지 현실인지 잘 분간이 안 갔지만, 다행인 건 깰 때 병원인 적은 없었다는 것이다.

최태혁은 괜찮다고, 금방 나을 거라면서 내 볼을 쓸어 줬고, 남궁후는 내가 못 알아볼까 봐 자기가 후라고 얘기하며 맛없는 미음을 후후 불어 먹여 줬다. 그 다음 깼을 땐 민선우가 약을 먹이더니 잘 먹었다고 엄청 다정하게 가슴을 토닥여 줬고, 남궁호는 남궁후와 마찬가지로 일단 자기가 호라는 소리부터 하더니 조곤조곤 말을 걸어주며 머리를 쓸어 넘겨줬다.

후에 나는 이 귀찮은 상황이 아파서 꾸는 꿈일까 봐 조금 울었던 것도 같다. 다행히 놈들은 내가 정말 다 나을 때까지 쭉 옆에 있으면서 기어코 우리 집 쌀독을 거덜 내고 갔고, 나는 네 명을 보내자마자 열쇠공을 불렀다.

그러나 열쇠공보다 먼저 찾아온 사람은 정말 오랜만에 보는, 내 친구 채예령이었다.

“오랜만!”

화장실에서 나오는데 거실에 정말 오랜만에 보는 채예령이 앉아 있었다. 그것도 마치 제 집인 양 익숙하게 커피까지 타 마시고 있었다. 사정이 어떻든 이놈한텐 내가 직접 열쇠를 줬기 때문에 별 불만 없이 부르는 대로 가 앉았다.

소파에 앉은 나와 마주 보려고 옆으로 돌아앉는 채예령은 여전히 반짝거렸다. 찰랑거리는 진한 밤색의 머리칼, 또렷한 갈색 눈동자, 오뚝 서 있는 코와 짙은 색의 입술 그리고 갸름한 얼굴형.

조금 위에서 내려다보는 덕분인지 다른 때보다 유독 이목구비가 더 부각되어 보였다. 내가 항상 부러워하던 얼굴…. 나는 괜히 딴청을 부리기 시작했다. 더 보면 발로 꾹 눌러보고 싶은 못된 심보가 튀어나올 것 같아서였다.

“왜 왔냐?”

“그냥. 오랫동안 못 본 거 같아서.”

확실히 그렇다. 회귀 전을 통틀어 이렇게 오랜 기간 보지 못한 적은 없었으니까. 그 점에 대해선 나보다 저 녀석이 더 그렇다고 느낄 것이다. 보통 내가 연락하는 것보다 채예령 쪽에서 먼저 연락해 오거나 찾아오는 경우가 월등히 많았기 때문이다.

그 네 명의 무단 침입 사실을 늦게 알아차린 것도 채예령이 지금처럼 불쑥불쑥 찾아오는 일이 많아서였다. 나는 별로 볼 것도 없는 집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싱글거리는 놈을 향해 실없다고 투덜댔다. 친구로서 반갑지 않은 건 아닌데 이상하게 기쁘지만도 않은 묘한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뭔가 편하긴 편한데 확 편하진 않은…. 그런 이상한 느낌.

놈에겐 미안하지만 이런 미묘한 감정은 아마 평생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아, 나 어제 집에 가다 후 선배 만났어. 너희 집에 가는 중이라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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