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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호 이야기-31화 (31/234)

31화

그날을 계기로 쌍둥이는 진호를 충분히 관찰한 후 천천히 다가가려고 했던 계획을 전면 수정했다.

우선 그들은 자신들에 대한 경계를 줄일 필요를 느꼈다. 그래서 태혁에게는 미약을 먹은 밤의 진호와 선우를 찍은 동영상을 보냈고, 선우에게는 태혁이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진호와 동거를 했으며 아직까지도 긴밀하게 교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들의 의도대로 완전히 파탄 난 동맹을 보는 건 정말 재밌었고, 서로를 경계하느라 방해가 줄었다는 사실도 만족스러웠다. 그들은 결국 좁혀지지 않는 논의 끝에 대학 때처럼 불가침 협정을 맺었다. 증인으로서 그 자리에 참여했던 쌍둥이는 당연스럽게 자신들에게도 사인을 요구한 태혁과 선우에게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아, 우리는 필요 없어. 안 해도 안 건드려. 너희가 엮여서 재밌었던 거지, 아니면 그냥 평범한 남자애잖아.”

“솔직히 너희가 이 지랄하는 것도 이해가 안 되는데 여기다 사인까지 하라고? 서로 취향 존중하자, 좀.”

물론 거짓말이었다. 그 본인만으로도 충분히 재밌는데 이 녀석들이 무려 ‘불가침 협정’을 맺을 정도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장난감이다. 쌍둥이는 기간이 정해져 있던 계약서를 떠올리며 서로 마주 보고 씨익 웃었다.

신사인 척 억지로 다른 데 눈을 돌리고 있는 와중에, 노리고 있던 인형이 다른 사람 손에 들어간 것을 알면 얼마나 황당할까. 거기다 새로운 주인 손을 실컷 탄 곰돌이가 눈앞에서 알짱거린다면? 쌍둥이는 태혁과 선우가 얼마나 약 올라 할지 생각만으로도 유쾌해졌다. 그들은 다음날부터 바로 계획에 착수했다. 그 이름도 유명한 ‘곰돌이 뺏으면 애가 둘이나 울어’ 작전이었다.

* * *

쌍둥이가 보기에 진호는 태혁과 선우에게 각각 한쪽 팔을 잡혀 있는 상황이었다. 마치 어린아이 두 명이 하나 있는 곰돌이 인형을 서로 가지겠다며 잡은 모양새처럼 말이다. 그 곰돌이를 뺏어 온다면 잡고 있던 두 명의 아이는 황당해 하다 울거나 혹은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고, 쌍둥이는 선우와 태혁의 그런 모습이 보고 싶었다. 덤으로 조금 탐이 나던 곰돌이 역시 그들의 것이 되는 것이기에 한 번에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계획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진호와 엮였던 태혁과 선우가 그랬듯, 쌍둥이 역시 평소 그들 사이에서 일어나지 않았던 뜻밖의 상황에 직면하고 말았다. 태혁과 선우에게서 뺏어와 눈앞에서 흔들며 놀리려고 했던 건데, 어느새 쌍둥이 역시 그들과 마찬가지로 진호의 양팔을 하나씩 잡고 신경전을 펼치고 있었다.

“형이 포기해.”

“이럴 때만 형이라고 부르지 마.”

후는 호가 가소로워 미칠 것만 같았다. 평소엔 전혀 형이라고 하지 않는 주제에 자기 아쉬운 것이 생기니 냉큼 부르는 모습이 어이없었다. 호도 평소 자기가 후를 대하는 행동을 고려하면 억지인 것은 알았지만 후 역시 자기가 필요할 때마다 형인 것을 들먹였기에 염치가 없지는 않았다.

“너야말로 이럴 때만 형 아닌 척 하지 마.”

“네가 먼저 너라고 했어. 네가 양보해.”

“양보? 하! 야앙보오? 너 지금 나한테 양보라고 그랬냐?!”

양보. 그것은 쌍둥이들과 전혀 연관 없는 단어 중 하나였다. 원하는 것은 언제나 온전히 제 것으로 쥐어 왔던 그들에게 양보와 나눔이란 것은 할 필요도 가치도 없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만약 같은 것이 갖고 싶으면 하나 더 사면 그만이라고 배웠고 또 그렇게 살아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번만은 그런 논리가 적용되지 않았다. 김진호는 둘로 나눌 수도 없고, 돈으로 하나 더 사는 것은 더더욱 할 수 없는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발단은 진호의 맹랑한 한마디였다.

‘저 못해요. 진짜 죄송한데, 모르겠어요. 다른 사람들은 진짜 구분을 해요? 그냥 찍는 거 아니고? 성격으로는 알겠다니까요. 얘기하다보면 누가 누군지 감은 오니까 그냥 그걸로 퉁쳐주시면 안 될까요.’

그 멍청이는 성격으로는 구분할 수 있으니 됐다고 생각하는 듯 했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사람이 하는 행동, 말에 모두 성격이 드러나지도 않을뿐더러 그 성격이란 것도 지극히 추상적인 개념이라 확실히 정의하기 어려운 것이다. 아, 이 사람이 이런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 하는 일이 일상다반사로 생기는 게 이런 이유다.

그러니까 즉 진호의 그 말은, 결국 후와 호를 전혀 구분하지 못하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후와 호는 이대로 같이 가서 들이대는 건 비효율적이라고 판단, 차라리 한 명이 가서 제대로 꼬셔 보잔 생각을 하고 그 한 명을 정하기로 했다. 싸움의 시작이었다.

“넌 굴곡이 확실한 글래머 타입을 좋아하잖아. 괜히 가서 판판한 김진호 보고 실망하지 말고 클럽이나 가지?”

먼저 비아냥대기 시작한 것은 후였다. 이죽거리는 호의 표정에 짜증이 치민 그는 똑같이 이죽거리며 말했다. 그러자 호는 가소롭다는 듯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아-, 그러고 보니 네 애인들은 다 엄청 마른 모델들이었지? 그런데 이거 어쩌냐? 김진호는 네 취향처럼 발목이 한 손에 잡힐 것 같아 보이진 않던데?”

“괜히 억지 부려서 성질 돋우지 마라. 너 전에 얘 맘에 든다 그랬지? 이 형님이 특별히 연결해 줄 테니까 조용히 먹고 떨어져.”

호는 계속 스스로를 형이라고 지칭하는 후가 짜증이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이 새끼가 오늘따라 겁나 끈질기네, 생각하며 열이 오르는 머리를 조금이라도 가라앉히기 위해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이런, 우리 형님이 나보다 몇 분 늙었다고 벌써 치매가 오나 봐? 걔 얼마 전에 섹스 스캔들나 서 영화도 때려치우고 해외도피 했거든? 형님이야 말로 내가 아는 모델 다 넘길 테니까 그거나 받고 꺼져주지 않겠어?”

서로 누구보다 잘 아는 만큼 쉽사리 승자가 나오지 않는 다툼은 끝을 모르고 이어졌다.

오늘로 벌써 이틀째. 결판이 나지 않은 이상 누구도 진호에게 보내줄 수 없으니, 둘 다 진호의 집에 발길을 끊은 지도 이틀이 됐단 소리다.

그 시점에서 동생 호는 큰 결단을 내렸다. 바로 강력 수면제. 서로에게 약만은 사용하지 말자던 금기가 깨지는 순간이었다.

호는 경쾌한 발걸음으로 진호네에 향하면서 문득 한 가지 의문을 떠올렸다. 후와 자신이 언제부터 이렇게 진호에게 집착하기 시작했을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분명 놓칠 수 없는 장난감으로 생각하긴 했으나 이렇게 싸움을 벌일 만큼은 아니었다. 신기한 것은 자신만이 아니라 후도 비슷한 감정을 품고 있다는 점이다.

아니, 그렇게 따지고 보면 민선우와 최태혁도 그렇다. 진호가 마성의 매력이 있어서? 그건 아니다. 몇 번이고 말하지만 곰돌이는 지나가는 고등학생 1처럼 생겼다. 언뜻 보면 노안인 중학생 같기도 했다. 동안이 장점이긴 했으나 잘생긴, 혹은 귀여운 동안이 아니라 그냥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얼굴에 피부가 좋아서 어려 보이는 것뿐이었다.

찢어졌지만 적당한 크기의 쌍커풀 없는 눈, 적당히 콧대 있는 끝이 동그란 코, 특징 없는 입술. 얼굴형은 계란형인 것 같기도 하고, 둥근 것 같기도 하고. 키는 178로 결코 작지 않지만 덩치는 그냥 그렇다.

마르지도 않고 부해 보이지도 않는, 그냥 중간 정도의 체형. 전에 보니 뱃살은 없었…. 아니, 앉아 있으면 살짝 볼록하게 튀어나왔던 것 같다.

이렇게 나열하면 또 나쁘지 않지만 막상 얼굴을 떠올려 보면 그저 평범 그 자체다. 근데 어디서 끌렸을까? 참 의문이었다.

“어-이! 나 왔다!”

오랜만에 들어온 진호의 집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밖에 있던 시커먼 놈들에게 물었을 땐 집에 있다고 했는데 이상하다 싶어 크게 소리쳤지만 늘 귀찮단 표정을 감추고 애써 웃으며 맞이하던 얼굴은 튀어나올 생각을 않았다.

이틀간 안 왔다고 삐졌나? 호는 여전히 자기중심적인 발상을 하며 부엌과 화장실을 기웃거렸지만 여전히 원하는 것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그리고 조금 불안한 마음으로 확 열어젖힌 안쪽 침실 문. 진호는 침대 위에 있었다. 호는 순간 초조해했던 자길 비웃으며 괜히 진호에게 타박을 날렸다.

“아직 자고 있냐, 이 곰탱아?”

애초 들으라고 한 소린 아니기에 말이 끝나자마자 바로 걸음을 옮기는데, 그에게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잘못…, 잘못했어요.”

물기가 잔뜩 배어 있는 목소리는 전혀 뜬금없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어느새 침대 곁으로 다가간 호는 그 소릴 듣고 이상한 마음에 진호를 흔들어 깨우려고 손을 뻗었다.

“어…? 야!”

손에 닿은 진호의 몸은 불덩이였다. 호는 다급히 밖에 서 있는 놈 중 하나를 시켜 약을 사 오게 했다.

“진호야, 이거 약이야. 먹고 빨리 낫자, 응?”

호는 약을 뱉어내며 아기처럼 옹알이를 하는 진호를 다정히 얼렀다. 이마에 올려놓은 수건의 차가움도 싫은지 고개는 계속 젓고, 가끔 피식피식 힘없게 입꼬리를 올리기도 하는 모양새가 퍽이나 웃겼지만, 아까 온도계가 나타낸 수치는 전혀 웃을 만하지 않았다.

39도. 높은 수치였다. 해열제를 몇 번이고 먹여도 아까부터 계속 뱉어 내는 진호가 야속했다.

결국 고개를 좀 들게 해 억지로 숟가락을 욱여넣어 적정량을 먹이고 찬물을 떠왔다. 그새 잠이 든 진호는 무슨 꿈을 꾸는지 이번엔 서럽게 울고 있었다. 눈물보다 콧물을 많이 흘리는 타입인지, 꺽꺽대며 이불을 세게 부여잡고 울어 젖혔다.

몸을 닦고 있던 수건의 다른 면으로 얼굴도 훔쳐 주길 반복하던 호는 안쓰럽기도 하고 이대로 가다간 열이 더 오를 수도 있단 걱정에 진호의 몸을 약하게 흔들어 깨웠다. 다행히 진호는 곧 울음을 그쳤다.

하지만 그 와중에 병원은 죽어도 싫은지 병원의 ‘ㅂ’ 자만 꺼내도 싫다며 울먹거리기도 했다. 그래도 열이 심해서 가야 할 거 같다고 일으켜 세우다가, 엉엉 울어 대는 걸 겨우 달래고 나니 진이 빠져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런 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진호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미안.”

호는 다시 몸을 심하게 떨며 이불속으로 파고드는 진호를 보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프면 병원에 가거나 그게 싫으면 의사인 우리한테라도 연락을 하지, 이 미련한 놈 같으니라고. 호는 방금 전까지 세상 서럽게 울면서 투정을 부렸으면서 막상 달래는 손길이 없어지니 울음을 그치고 미안하다고 중얼거리고 있는 진호의 머리를 쓸어 올렸다.

감정적이고 눈치 없는 어린애처럼 보이다가도 어딘가 애잔하고 너무 커 버려서 메말라 버린 사람처럼 군단 말이야. 이렇게 시선이 가는데, 전에는 어떻게 그렇게까지 존재감이 없을 수 있었지? 참, 알면 알수록 신기하고 예측이 힘든 녀석이었다.

아, 이런 점인가? 이래서 우리가 이 아이에게 이렇게 빠졌나? 뜬금없는 생각이지만 미지근해진 물을 버리고 찬물을 담으면서 호는 진지하게 고찰했다. 하지만 결론이 나기도 전에 물은 가득 찼고, 호는 재빨리 새 수건과 함께 진호의 곁으로 향했다. 일단 열을 식히는 게 먼저였다.

그리고 어느 정도 상황이 진정되었을 즈음, 후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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