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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호 이야기-30화 (30/234)

30화

선우의 제재도 없었기 때문에 매번 다이내믹한 표정과 리액션을 보여주는 진호는 금세 그들이 근래 들어 가장 애용하는 장난감이 됐다. 외관은 평범의 극치인 주제에 얼굴 근육이 부드러운 건지 표정이 수천가지였다. 멍청하지는 않은지 짜증이 나거나 질리는 행동도 하지 않았다. 제일 걸작인 건 쉴 새 없이 뭐라 투덜대면서 자기는 자각하지 못하는 점이었다.

쌍둥이는 일상의 지루함이 잦아드는 것을 느끼며 만족스러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평화롭게 흘러갈 것 같던 나날은 의외의 인물로 인해 금방 깨졌다.

집에 들어간 쌍둥이는 오랜만에 괴물과 마주쳤다. 그녀는 진호라는 장난감을 만나기 전의 쌍둥이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스트레스에 미쳐 버린 사람의 눈이었다. 쌍둥이는 그대로 다시 집을 나가려고 했으나 피곤하게 하지 말라는 그녀의 한마디에 조용히 방으로 들어갔다.

쌍둥이는 다음 날까지 괴물에게서 별의별 잔소리를 다 들어야 했다. 쌍둥이는 그녀가 자신들을 이용해 본인의 스트레스를 풀고 있음을 알면서도 막상 틀린 것이 하나 없는 말들에 차마 반박하지 못하고 듣기만 했다. 가까스로 해소돼 가던 스트레스는 배의 배가 되어 쌓였다.

“야. 계속 선 지키면서 할 거야?”

“아니. 우리가 언제 그런 거 끝까지 지켰다고.”

쌍둥이는 서로의 눈을 마주 보고 음흉하게 웃었다. 짜증이 극에 다다른 쌍둥이는 그동안 적당히 선을 지키며 쳤던 장난 정도로는 만족이 안 될 것 같았다. 우리만 이런 치욕스런 기억을 지니고 있을 순 없어. 그들에게는 마침 분풀이하기 딱 좋은 장난감이 하나 있었다.

“그거 쓰자. 저번에 얻은 그 미약.”

아이디어는 호가 냈다. 남자로서 가장 치욕스러운 일은 역시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남 앞에서 잔뜩 흥분하는 거 아니겠냐, 라는 게 근거였다. 선우의 미적지근한 반응도 슬슬 짜증나던 시점에 나온 기막힌 생각이었다.

전혀 취향이 아닌 사내 앞에서 흥분하면 그 사이코도 곤란해지겠지. 행동파인 쌍둥이는 각자 초소형 카메라와 도청기, 강력한 최음제를 들고 오랜만에 선우네에 방문했다. 진호는 말에 대충 멜로디만 갖다 붙인 거 같은 노래를 흥얼거리며 열심히 욕실 청소를 하고 있을 때였다.

영감은 그들을 보고 또 무슨 짓을 하러 왔냐는 질책의 눈빛을 보냈지만 항상 그렇듯 쌍둥이는 전혀 개의치 않고 계획을 속행했다. 가지고 온 카메라를 부엌과 식탁을 비추도록 설치하고 도청기는 식탁 아래에 붙였다. 비타민제라고 써 놓은 최음제 병은 부엌에 들어오자마자 볼 수 있는 위치에 세워 놨다. 설마 어떤 멍청이가 속겠어 싶을 만큼 뻔한 트릭이었지만 그들의 장난감, 곰탱이라면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물론 그 믿음은 확실히 보상 받았다.

그날 밤의 일은 쌍둥이들을 경악하게 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그들의 예상에 들어맞은 게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게 그들을 짜증나게 하지는 않았다. 쌍둥이는 오히려 재밌는 구경을 했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봐도 평범한 얼굴과 몸인데 말이야.”

진호가 찍힌 사진을 보면서 호가 중얼거리자 그 이야기를 듣던 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긴 한데, 그날의 곰돌이였으면 나도 가능.”

후가 그렇게 말할 정도로 그날의 진호는 이상하게 색기가 넘쳤다. 흥분해서 눈꼬리에 눈물을 머금고 인상을 찌푸린 진호가 홀린 듯 선우의 물건을 입에 머금었을 땐 둘 다 오른손을 바지춤으로 가져갔을 정도였다.

그 순간 쌍둥이는 선우가 미친 듯이 부러웠다. 그는 좀 전에 욕설을 퍼부었던 사람이라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더불어 진호가 그놈의 사타구니에 얼굴을 묻는 바람에 뒤통수밖에 보이지 않게 됐을 땐 둘 다 선우에게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

한참 뒤 선우의 품에 안겨 나가는 곰돌이를 보면서 세상엔 정말 재밌는 일이 차고 넘치는 것 같다고, 쌍둥이는 히죽대며 생각했다.

“얘는 팔수록 재밌네.”

쌍둥이는 절로 지어지는 미소를 감출 수가 없었다. 도청기와 카메라 설치를 위해 진호를 조사하면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태혁이 은신해 있던 집에 진호가 살고 있었다. 최근 이사한 기록이 없는 걸 봐선 진호가 태혁을 숨겨 주었을 확률이 매우 높았다.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남자애가 들락날락 한다길래 그냥 심부름꾼을 하나 구했구나 싶었는데 그게 진호였던 모양이다.

쌍둥이는 과거에 받았던 서류와 가지고 있던 진호의 프로필을 나란히 놓았다. 집 명의가 다른 사람으로 되어 있었고, 프로필에는 주민등록상 거주지로 입력한 건지 다른 주소가 적혀 있었다. 이러니까 몰랐지. 쌍둥이는 어깨를 으쓱이며 서로 마주 봤다.

“생각보다 더 재밌는 애네.”

“그러게.”

그들로서는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재미였다.

쌍둥이는 그 덕분에 꽤 스릴 넘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태혁이 제자리로 돌아갔기 때문에 진호의 집에 침입하는 데에 별다른 어려움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이 보기 좋게 빗겨나간 것이다. 진호의 집 앞은 한눈에 보기에도 꽤 많은 수의 보안 요원들이 지키고 서 있었다.

쌍둥이는 태혁답지 않은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보통 태혁은 자기 목숨을 구해줬다고 저렇게까지 하는 놈이 아니었다. 목숨이란 것 자체를 그렇게 소중히 여기지 않는 놈이라, 누군가의 목숨이 관련되어 있어도 웬만하면 돈으로 대충 무마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심지어 사례금도 은혜를 갚는다는 생각이 아니라 나중에 혹여 이상한 방향으로 생색내면 귀찮단 이유에서 주는 것이었다. 쌍둥이가 아는 태혁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서 진호에게도 사례금이나 주고 말았겠거니 생각했는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태혁은 진호를 지키고 있었다. 저건 아무리 봐도 태혁이 진호를 굉장히 중요시하고 있다고밖엔 보이지 않았다.

진호의 안전을 생각한다면, 누군가 지켜주는 것이 좋긴 했다. 액수를 좀 올려 받기 위해 미끼를 던진다고 태혁에 반하는 조직에 흘렸던 정보 중엔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남자’와 함께 지낸다는 것도 있었으니까. 성별이 특정 지어진 상태에서 은신한 집이라도 찾는다면 그 집에 살고 있는 진호는 매우 위험해질 것이다. 그들이 없애려던 태혁을 살려주고 숨겨주기까지 하면서 계획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버린 원망스러운 인물이 되는 거니까.

그렇다고 저렇게까지 많은 인원의 경비가 필요하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태혁이 철저히 부수고 있는 상대 조직에선 지금 진호를 건드릴 여력이 없었다. 관리하고 있던 구역의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일들을 수습하고, 차례대로 살해, 납치, 실종되는 사람들을 신경 쓰는 것만 해도 머리가 터질 텐데 언제 저놈을 건드리고 있겠는가. 한마디로 태혁이 취하고 있는 저 방어적 태세는 태혁 관점에서도 오버, 전체적인 상황으로 봐도 오버였다.

“읏-차!”

그래도 쌍둥이는 어떻게든 틈을 만들어 담을 넘었다. 그리고 창문을 열었다. 항상 열어두는 것 같다는 정보가 맞았는지 스르륵, 쉽게도 열렸다. 호는 고개를 저으며 우리의 곰돌이는 밖에 보안요원까지 세워 놓고 참 위기감이 없다고 생각했다.

호는 뒤이어 들어온 후를 보고 눈짓했다. 후는 고개를 끄덕이고 맡은 구역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최근 이렇게 직접적인 일은 전혀 안 해서 몸이 굳진 않았을까 싶었는데 괜한 걱정이었다.

단순히 재밌자고 타인의 집에 침입하다니, 쌍둥이 스스로도 누가 보면 또라이들이라 칭할 만한 행동임을 알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은 오랜만에 찾은 재밌는 놀잇감을 놓칠 생각이 없었다. 특히 태혁과 선우가 엮여 있다는 것에서 이미 그들에게 김진호는 꼭 손에 넣어야만 하는 상대가 되었다.

“바쁠 때마다 곰돌이 데리고 놀면 재밌을 거 같지?”

“응. 거기다 곰돌이한테 관심 있어 보이는 두 녀석은 닭 쫓던 개가 되겠지.”

“걔네 때문에 힘들기야 하겠지만 불가능한 건 아니니까.”

게임은 원래 어려울수록 재밌는 법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무색하게 그들은 현장에서 딱 걸려 버렸다.

“우리 동아리였다고?!”

“…그래. 일단은.”

쌍둥이는 진호에 대한 서류를 꼼꼼히, 아주 꼼꼼히 읽어 봐야겠다고 다시 한번 생각했다. 그에 대한 그렇게 많은 서류가 있는데 왜 항상 새로운 정보를 접하게 되는 건지 모를 노릇이다. 그들의 신조가 적당히 살자, 이기는 해도 손에 넣자고 마음먹은 타깃에 대해 사전 조사가 이렇게 미흡한 적은 처음이었다.

쌍둥이는 패배감마저 느껴지는 상황에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죽을죄를 졌다는 듯이 몰아붙이던 녀석들이 또 얼마나 잔소리를 할까 싶어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예상과 달리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뭐야, 혹시 너네도?”

쌍둥이가 눈치껏 둘만 알 수 있도록 입모양으로 묻는 말에 태혁과 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아리라고 해봤자 곰돌이가 있었다 치고, 쌍둥이를 포함한 다섯 명과 예령까지 일곱 명이 전부였을 텐데, 이렇게까지 기억이 없는 건 기적과 맞먹는 일이었다. 심지어 쌍둥이는 물론이고 태혁과 선우 역시 좋은 기억력을 지닌 편이었다. 그런데 그들 모두 기억하지 못한다니. 그나마 기억나는 것은 예령의 옆에 누군가 있었단 것인데, 네 사람은 그 누군가가 김진호였겠구나- 추측했다.

쌍둥이는 이 신기한 상황에 웃어야 할지, 아니면 진호를 측은하게 여겨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조금 억울한 점이 있다면 동아리에 대해서만 몰랐지 사실 그 외에 같은 대학을 나왔던 것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쌍둥이는 또다시 서류를 더 꼼꼼히 읽었어야 했다고, 그래서 기억나는 척을 했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그랬다면 삐져서 자기 방에 들어가 버린 진호에게 태혁과 선우보다 좋은 인상을 줄 수 있었을 텐데.

둘은 이미 닫혀 버린 문을 보며 아쉬움에 괜히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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