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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호 이야기-29화 (29/234)

29화

남궁후와 호에게 진호의 첫 인상은 그냥 멍청이였다. 좀 흥미를 돋우는 멍청이. 아니, 흥미를 돋울 만큼의 멍청이. 그들에게 김진호는 그런 존재였다.

남궁후는 한번 태어난 인생, 누군가가 말한 것처럼 그저 소풍 나온 듯 살다가는 걸 목표로 삼고 있었다. 다행히 그는 부모 제비뽑기에 성공한 케이스라 그 목표를 현실화 시키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의 집안은 대학과 종합병원, 제약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기에 돈은 썩어나도록 많았고, 일가친척 모두 머리가 매우 좋은 편에 속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남궁후의 가족은 발군이었다.

특히 그들의 누나는 일찍이 천재성을 인정받아 특별 케이스로 초중고와 의대를 최단기 수석으로 졸업하고 하버드 의대를 거쳐 현재 경영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었다. 쌍둥이는 모종의 이유로 그녀를 ‘괴물’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뭐든 대충하려는 그들이 누가 봐도 열심히 살아야 할 것 같은 종합병원 의사가 된 데에는 이 누나라는 사람의 영향이 가장 컸다. 쌍둥이가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 처음으로 진행한 가족회의에서 그녀가 단호하게 정리한 덕분이었다.

“엄마 아빠는 아직 별생각 없을 수도 있지만, 얘네들도 이제 고등학생이니까 정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해. 너네, 앞으로 뭐 할 거야.”

“갑자기 무슨 말이야. 뭐를 할 거냐니.”

“너희가 적당히 즐겁게 살려고 하는 건 상관없는데, 이 집안 돈을 사용하려는 생각이면 적어도 뭐 하나는 맡아서 해야지. 성인이 되어서까지 아무것도 안 하는 쓸모없는 것들한테까지 돈을 지원해 줄 거라고 생각했어?”

그 말에 쌍둥이는 조용히 듣고만 있는 부모님을 한 번 바라보고, 다시 괴물한테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하고 묻는 듯한 눈빛에 그들의 누나 남궁선은 드디어 본론을 꺼냈다.

“뭐가 되었든 경영은 내가 맡을 거야. 현장은 나한테 안 맞아. 방해되면 없애 버릴 거니까 나랑 안 겹치게 의사나 해. 현장 경험 쌓아서 병원이랑 대학 내에서 우리 집안 입지만 잘 쌓아주면 나머진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네한테 그럴 열정은 없어 보이긴 하지만 노파심에 말해두는데, 내 자리 넘볼 생각이면 나보다 똑똑하다는 걸 증명해야 할 거야.”

호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버렸고, 후는 천장을 보았다. 그리고 재촉하는 선의 말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둘은 각자의 특성에 맞게 내과, 외과 의사가 되었던 것이다.

남궁후와 동생 호는 유전자 구조가 똑같은 일란성 쌍둥이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알 만한 사람들은 다 구분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정체성에 대한 상실감도 느껴본 적 없고, 부유한 배경 덕분에 서로 원하는 걸 양보해야 하는 일이 없었다 보니 당연히 형제간 다툼이란 것도 해본 적이 없었다.

일란성 쌍둥이임에도 사소한 것까지 취향이 다른 두 사람이 붙어 다니는 이유는 간단했다. 심심해서. 돈을 벌어야 할 필요가 없고, 공부를 열심히 할 필요도 없고, 사람을 사귀는 것에도 별 어려움이 없었던 그들은 언제나 심심했다. 남궁후와 호는 그 심심함을 없애기 위해 이런저런 장난을 치는 것을 좋아했고, 이에 관해서 둘은 서로에게 최고의 파트너가 되어 주었다.

너무 평탄하기만 한 인생이 질릴 때쯤 하나씩 큰 사건을 만들고, 그게 아니어도 소소하게 취미처럼 장난을 쳤다. 당하는 이들에게도 소소할진 잘 모르겠다만 어쨌든.

그런 그들도 건드리지 않는 사람들이 네 명 있었는데, 하나는 그들의 누나인 남궁선이고 나머지는 그들의 사촌인 민선우와 친구 최태혁, 정새빈이었다.

괴물이라고 불리는 선은 그 이름값을 하려는 듯 어렸을 때 쌍둥이의 장난을 몇 배로 되갚아 주어 그들로 하여금 다시는 건드리지 말자는 다짐을 하게 만들었다.

두 명의 친구들은 쌍둥이와 비슷한 배경을 가졌을 뿐 아니라 괴물과 동급으로 정상인의 범주를 벗어나 있다는 것을 알기에 건드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들은 굳이 건드리지 않아도 알아서 재밌는 구경거리를 만들어 주곤 했었기에 별 미련이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인 정새빈은, 몇 번의 장난을 시도한 후 어딘가 단단히 나사가 빠져 있는 놈이기에 더 이상 건드리지 않기로 결정한 상태였다. 그들이 뭔 짓을 해도, 심지어 바리깡으로 머리를 밀어 버려도 그냥 멍하니 있던 미친놈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론 가장 강력한 놈이었다.

사실 괴물을 제외하고 지금 거론된 이들은 쌍둥이와 어릴 적부터 같이 다녔던 또래 친구들이다. 워낙 개인주의가 강한 성격들이라 살갑게 굴진 않았지만 일단 서로 친구라고 인식하는 사이였다. 때문에 서로를 그나마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김진호가 나타나기 전까진 말이다.

쌍둥이가 김진호의 존재를 알아챈 건 짜증이 극치에 다다른 나머지 건드리지 않기로 했던 녀석들을 한번 공략해볼까, 하는 미친 생각을 하게 됐을 때였다.

타의 반, 자의 반으로 의사가 되기로 결정한 후 남들보다 더 긴 학교생활과 잠도 제대로 못 자는 인턴 생활 등을 거쳐야 했던 쌍둥이는 그들과는 다르게 부모님이 깔아놓은 길을 순탄하게 가거나, 자유를 찾은 것 같은 친구들이 곱게 보이지 않았다. 누구보다 자유롭고 싶었던 그들이었기에 그 상황이 도저히 용납되지 않아 심술이 돋아나고 있었다.

그때 때마침 태혁이 실종됐단 소식을 들었다. 그들은 분명 어딘가에 잘 숨어 있을 태혁의 걱정은 하나도 하지 않았음에도 누구보다 열심히 그를 찾았다. 먼저 찾아서 그 정보를 돈 많이 주는 놈한테 팔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태혁이 습격 당한 장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가정집에 은신해 있다는 것을 알아내었다. 쌍둥이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태혁의 세력과 그 세력을 경계하는 세력들에게 운을 띄웠다. 그러나 아쉽게도 태혁네가 제시한 액수가 더 컸기 때문에 뒷세계 전쟁을 일으켜보고자 했던 계획은 시작도 전에 끝나버렸다. 그들은 실망한 마음을 달래며 다음 타깃, 선우에게로 눈을 돌렸다.

태혁과는 달리 평범한 대기업 직장인이라는 안정적인 직업을 가진 선우는 딱히 틈이 없었다. 쌍둥이들은 서두르지 않고 선우를 주시하며 기다렸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드디어 조금의 틈이 생겼다. 선우의 성적 취향을 알아버린 하우스키퍼 하나가 무기한 휴가를 낸 것이다.

사실 그들이 ‘알려준’ 거였지만, 어쨌든 냉큼 녀석에게 고백할 줄은 몰랐기에 우연히 얻은 기회가 맞았다.

“하하, 이게 되네.”

그들은 이게 무슨 떡이냐며 낄낄댔다. 원래 선우의 집에서 고용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단단히 교육받은 경력자들이기 때문에 웬만한 장난엔 꿈쩍도 안 했다. 당연히 그들의 사무적인 반응은 재미가 없었고, 선우에게 장난치려고 무언가 일을 벌여 놓으면 당사자가 오기 전에 고용인 선에서 말끔하게 정리해 버렸다. 그런데 그 철옹성 같은 성에 틈이 생긴 것이다.

주어진 기회를 놓칠 리 없던 쌍둥이는 그 집이 애용하는 회사의 쓸 만한 하우스키퍼들을 전부 고용해서 병원으로 돌렸다. 그리고 그들이 사전 작업을 마쳐놓은 사람들만 비고용 상태로 만들어 뒀다. 이상할 정도로 완고한 그 집의 집사가 다른 회사에서 고용인을 받을 리 없단 계산 하에 실행한 계획이었기 때문에 예상대로 그들은 원하는 사람을 그 집에 밀어 넣을 수 있었다. 그 뒤로 선우는 드레스 룸에 불이 난다든가, 클럽에 있을 때 몰래 찍힌 사진들로 벽이 도배되어 있는 등의 소소한 이벤트를 맞이해야 했다.

쌍둥이는 어이없어 하는 선우의 연락이 재미있었고, 선우로선 황당하지만 그래도 웃어넘길 수 있을 정도의 것들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들이 심어놨던 고용인으로부터 해고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럼 당연히 준비해 놓은 다음 타자가 들어가겠거니 생각했는데, 정작 고용된 것은 전혀 처음 듣는 인물이었다.

“김진호? 누구야 그게. 리스트에 없던 이름인데?”

뒷수습에 지친 영감탱이가 결국 회사 측에 ‘새로운’ 고용인을 의뢰했던 모양이다. 참다못한 선우가 직접 찾아오게 만들 생각이었던 쌍둥이는 계획에서 벗어난 상황이 굉장히 못마땅했다. 그래서 어떤 놈이길래 우리가 고용한 경력자 명단에도 없는데 그 까다로운 영감탱이 맘에 들 수 있었는지 알아 봤다.

이름은 김진호. 나이는 26. 특이점이라고는 신체적 결함으로 군대 면제를 받았다는 것 정도가 전부인 평범한 남자였다. 그나마 흥미로웠던 건 그들 집안이 소유한 대학을 나왔던 건데, 성적도 형편없고 특별한 이력도 없어 보여서 자세히 읽지도 않았다. 하우스키퍼 경력도 학생 때 아르바이트로 잠깐 일했던 경험밖에 없는 것 같은데 그 영감탱이는 도대체 뭘 보고 이놈을 고용한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여기서 멈춰?”

쌍둥이는 잠깐 고민에 빠졌다. 그러나 앞선 태혁 때의 계획이 실패한 상태에서 민선우 찾아오게 만들기 계획까지 엎어 버리고 싶지 않았다.

쌍둥이들은 일단 사촌이라는 이유로 그 집에 비교적 자유롭게 출입이 가능한 점을 이용해 하우스키퍼를 괴롭혀주기로 했다. 그가 자진해서 그만두게 만들 생각이었다.

그런데 새로 온 하우스키퍼는 생각지도 못한 재밌는 반응을 보여주었다. 더불어 선우 역시 그와 함께 전보다 훨씬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쌍둥이들은 어느새 그를 쫓아내야 한다는 생각보다, 다음엔 어떤 반응을 보일지에 더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반응을 실시간으로 보기 위해 그 집에 친히 찾아갔다. 하우스키퍼 대기실에 설치했던 녹화용 카메라를 실시간으로 영상을 볼 수 있는 카메라로 바꾸고, 도청기 몇 개를 더 설치했다. 마지막으로 정말 힘들게 매수한 기존 고용인 하나를 이용해 매일매일 짓궂은 물건을 구비해 뒀다. 그들이 할 일은 출근 시간에 맞춰 어플을 켜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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