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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호 이야기-28화 (28/234)

28화

“혼자라는 실감이 좀 덜 드는 것 같아.”

괜히 한 마디 툭 던져보고 눈을 꼭 감았다.

제일 먼저 떠오른 건 의도치 않게 최근 가장 많이 함께 있었던 그들이었다. 멀쩡할 때는 옆에서 잘만 괴롭히더니 정작 사람이 아프니 곁에 없다.

…진짜 멍청한 새끼. 매번 그렇게 당해놓고도 또 기대를 하고 앉아있다니. 아직도, 아직도 기다리고 앉아 있다니.

다른 생각을 하자. 뭔가, 정신없었던 일. 뭐가 있을까…. 뭘 생각하면 좋을까….

화장실 청소할 때 됐는데 조만간 해야겠다. 그러고 보니까 안방 청소도 할 때 됐구나. 돈 부칠 날짜도 거의 다 됐네. 이번에는 안부 인사도 드려야겠다. 전화… 해 볼까. 핸드폰이 어디 있더라…. 하하, 며칠 전만 해도 핸드폰을 달고 살았는데, 지금은 어딨는지도 모르겠네.

내 집에서 살 땐 매일 봤고, 집을 나가고 나서도 항상 전화다 메시지다 해서 24시간 붙어 있던 것 같은 최태혁과 아르바이트 할 땐 매일 얼굴 맞대고 밥을 먹었던 민선우는 우리 집에 같이 방문한 그 날부터 연락이 없었다. 내가 간간이 쌍둥이들 좀 집에서 쫓아 달라 전화했을 때도 생각해 보면 지나치게 단답으로 대답을 했었다.

쌍둥이는 몰라도 그 둘과는 좀 친해진 것 같았는데…. 사실 친하다는 범위를 살짝 벗어날 정도였다고 생각했다. 보통 아무한테나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으니까.

조금 스토커 같긴 했지만 최태혁의 그런 관심이 싫지 않았고, 위험한 냄새를 풍기긴 했지만 민선우의 보살핌이 나쁘지 않았다. …그래봤자 그것도 다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던 것 같지만.

나는 핸드폰을 찾기 위해 팔만 뻗어 침대 위를 여기저기 더듬었다. 근처에 없으면 안 찾고 그냥 잠이나 잘 생각이었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침대 구석 쪽에서 핸드폰이 만져졌다. 나는 그대로 핸드폰을 잡고 눈앞에 갖다 댔다. 불이 들어오는 화면엔 역시 시간과 날짜만 뜰 뿐이었다.

알림 하나 없이 깨끗한 상단에는 와이파이 표시와 90%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이거 충전한 지 꽤 됐는데 왜 아직도 90퍼센트야? 충전기에 연결되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이렇게 배터리가 꽉 차 있다는 건, 그만큼 쓸 일이 없었다는 얘기다. 나는 괜히 더 추워지는 느낌에 애써 찾았던 핸드폰을 다시 구석으로 집어 던지고 몸을 웅크렸다. 너무 조용해.

“와, 너무 조용해서 전자파도 들리네, 이제.”

정적을 깨기 위해 애써 혼잣말을 해 보았지만 오히려 더 쓸쓸해질 뿐이었다. 자고 싶다. 차라리 잠들었으면 좋겠다. 눈을 꼭 감고 주문을 외웠다. 나는 잘 수 있다. 잠들 수 있다. 행복한 꿈을 꿀 거다.

한참을 그러고 나서야 잠에 빠져들었다.

“…으응…. 놔둬, 좀….”

춥고 배고파서 정신없어 죽겠는데 어떤 새끼가 자꾸 이불을 걷어낸다.

씨발. 입 벌릴 힘도 없는데 자꾸 쓴 물도 욱여 넣네, 이 우라질 놈이? 밥도 한 끼 못 먹은 마당에 내가 이딴 걸 삼켜줄 거 같아? 퉤다, 이 새끼야.

나는 눈을 감은 채 입에 들어온 역한 액체를 얼른 뱉어냈다. 내 원래 의도는 공중에 뿌려질 정도로 힘차게 뿜는 거였는데 뭐가 잘못된 건지 힘없이 입가로 주르륵 흘렀다.

뭐 하나 되는 게 없냐. 아픈 것도 잊고 낄낄대니 뒷덜미에 뭔가 단단한 것이 파고 들어온다.

아 싫어, 누워 있을 거야. 힘없어. 하지만 저항이 무색하게 머리가 들리고 이마에 서늘한 뭔가가 올려졌다.

아 진짜! 춥다니까!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그 서늘한 걸 간신히 떨어트려 놨더니 이번엔 축축한 게 척 하니 올라왔다. 그리고 방심한 틈에 차가운 무언가가 입안으로 들어오려고 했다. 그게 싫고 귀찮았던 나는 입을 앙 다물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지… 호…… 이…… 약…… 리… 낫…….”

뭐라는 거야. 나는 렉 걸린 동영상처럼 뚝뚝 끊겨 들리는 소리에 피식 웃었다. 약 어쩌고 한 거 같은데. 자고 있는 사람한테 갑자기 뭔 약…. 아. 맞다, 나 아프지. 너무 추운 나머지 잊고 있었던 사실이 떠올랐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갑자기 몸 여기저기서 고통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머리가 깨질 듯 아프고, 속이 울렁거렸다. 토하고 싶었으나 몸을 움직이기엔 힘이 없었고, 너무 추워서 이불 밖으로 나갈 엄두가 나질 않았다. 갑작스레 눈물이 나며 서러웠다. 그때가, 잊은 줄 알았던 과거의 기억이 오버랩되기 시작했다. 나는 눈을 뜬 기억이 없는데, 익숙한 등이 보였다. 꿈인가? 그러나 꿈이면 어떤가. 아니, 오히려 꿈이면 더 좋다. 나는 작아진 내 손을 내밀며 그 등을 향해 걸어갔다.

엄마, 엄마, 나 아파. 엄마, 이번엔 거짓말 아니야. 엄마, 사실 나 한 번도 거짓말 안 했어. 다 아팠었어, 엄마. 그냥 엄마가 조금 늦게 와서 다 나아 버린 거였어. 진짜야. 양호 선생님이 나 조퇴하랬어. 엄마. 엄마, 엄마. 미안해. 내가 와서 미안해. 근데 왜 아빠는 안 와? 아빠는 왜 나 한 번도 안 봐? 엄마, 엄마. 친구들이 안 놀아줘. 내가 잘못한 거 아니야. 나는 아무것도 안 했어. 엄마, 엄마 사랑해. 엄마 사랑해. 내가 진호가 돼서 미안해.

“진… 호… 정신… 진… 호야…!”

얼마나 걸었을까, 갑자기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다. 아까 들렸던 것과 같은 목소리가. 누구야? 그렇게 묻는 순간 몸이 흔들리면서 두통이 더 심해졌다. 머리 울리니까 그만 흔들어, 멍청이 똥꼬야. 너 때문에 더 아파. 아니…. 아니야. 사실, 그냥 아파. 미안해. 너 때문이라고 해서 미안해. 근데 너 누구야?

정신의 흐름대로 아무 말이나 중얼거리고 있는데, 아까처럼 입을 가르고 차가운 무언가가 들어오더니 곧이어 입안에 액체가 흘렀다. 이게 뭐지? 너무 써. 토할 거 같아. 물 줘. 나 목말라. 배고파. 아냐, 토할 거 같아. 모르겠어. 이젠 뭐가 뭔지 모르겠어. 아파. 추워. 아파.

“이… 거… 뭐… 잠…… 야!”

“…먹 …으… 괜찮아.”

“넌 이게 괜찮은 걸로 보여?!”

어느새 잠이 들었었나 보다. 엄청 잔 것 같은 느낌. 근데 아직도 많이 어지러워 그런가 환청이 들리는 것 같다. 왜 환청까지 그 쌍둥이들인 거냐. 그것도 이렇게 리얼하게. 이건, 마치 아픈 날 간호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의 대화인데….

“깼어? 진호야, 깬 거야?”

응…? 목소리로 봐선 쌍둥이 같은데. 말투가 내가 알던 것과 달리 너무 다정했다. 나는 당황스러움에 힘겹게 눈을 떴다.

…오 마이 갓. 쌍둥이다. 삼일 전 마지막으로 봤던 모습 그대로인 쌍둥이 중 한 명이다. 나는 나와 눈이 마주친 쌍둥이에게 아주 걸걸한 목소리로 겨우 물어봤다.

“언제 왔어요?”

말을 끝내자마자 변한 쌍둥이의 표정이 가관이다. 저 반응을 보니 아무래도 호 쪽인 것 같았다. 형인 후는 꾸밀 때 빼곤 저렇게까지 안 웃는다. 지 기분 좋은 거 표현하느라 정작 내가 물어본 거엔 대답할 생각이 없는 놈에게 대충 찍은 이름을 불러 채근했다.

“호 형.”

오, 아무 말 없는 것 보니 맞았나 보네. 근데 목적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새끼가 더 좋아하느라 답을 안 한다. 다행히 나만 답답한 게 아니었는지 침대에 걸터앉아 날 내려다보던 후가 대답해줬다.

“아침에 왔어. 열이 너무 높길래 중간에 깨워서 약 먹였는데, 기억 안 나?”

“어-, 전혀요.”

어느 정도 예상했던 대답이었는지 둘 다 고개만 끄덕였다.

그냥 푹 잔 거 같았는데. 힘이 들어 대충 대화를 마친 시점에서 눈을 감았다. 바닥에 무릎 꿇고 나와 눈높이를 맞추고 있던 호와 날 내려다보며 머리를 쓸어주는 후. 지금이 몇 신지는 모르겠지만 방이 어둑어둑한 걸 보니 적어도 저녁 6시는 넘었을 텐데…. 그때부터 이 시간까지 이렇게 있어준 걸까?

“진호야, 좀 괜찮아진 거 같으면 죽 먹자.”

“그래. 아깐 어쩔 수 없었지만 속이 빈 채로 약 먹으면 안 좋아.”

확실히 아침보다 훨씬 몸이 가볍다. 어지러움도 점점 가시고, 일어났을 때부터 추운 건 아예 느껴지지도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건강 체질이었던 터라 병이 빨리 낫는 거엔 익숙했는데 이건 또 신기록이다. 반나절 만에 이렇게 싹 낫다니. 나는 감사 인사를 위해 생각을 멈추고 눈을 떴다.

하지만 고맙다고 말할 새도 없이 뒷목이 받쳐졌다. 응? 뭐야? 당황한 나머지 반항할 새도 없이 뒤를 받친 손의 힘에 이끌려 일어나 앉아 눈앞의 숟가락을 입에 머금었다.

입천장에 뜨뜻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일단 이거부터 어떻게 하고 보자 하는 생각에 먹고 보니 미음이다. 전문점에서 샀다기엔 아무것도 들어가 있지 않은, 심지어 간도 된 건지 안 된 건지 모르겠는, 그런 미음. 나는 생글거리며 다음 숟가락을 푸고 있는 호를 향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너무 싱거운 거 같은데….”

간호해주겠다고 요리까지 해준 사람한테 음식 투정 부리고 싶지 않았지만, 평소 맵거나 신 맛의 자극적인 음식을 선호하는 내게 저 미음은 마치 독과 같았다. 김치라도 있으면 먹겠는데 호가 가진 건 무릎에 놓인 죽 그릇과 들고 있는 수저밖에 없다.

후는 또 언제 자리를 잡은 건지 침대 등받이에 기대 내 등을 자기 가슴에 기대게 한 폼으로 앉아 나를 꼭 안고 있다. 다시 디밀어진 수저를 피하며 싱겁다고 또박또박 말하니 뒤에서 후가 아플 땐 자극적인 거 먹으면 안 돼, 라며 키득거린다.

아니, 그건 나도 아는데 이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김치 정도는 적당히 먹어도 될 거 같은데. 나는 두 사람이 사실은 김치가 어디 있는지 몰라서 안 갖고 온 것 같다는 합리적인 의심을 키우며 다시 들이밀어진 숟가락을 손으로 막았다. 왜냐하면 얼떨결에 밥 얘기부터 먼저 했지만 사실 그 전에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하는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사실 지금 미음이 싱겁고 말고가 뭐가 중요하겠어.

“도대체 제가 왜 알몸인 거예요?!”

내가 알몸이라는 사실이 더 중요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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