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요즘 고민이 하나 생겼다. 항상 해왔던 돈 문제에 대한 것이 아니라 좀 다른 종류의 고민이다.
최태혁의 명령대로 학원만 다니면서 집에서 호의호식한 지 5일쯤 됐다. 민선우네 가정부 일은 약속했던 대로 최태혁이 해결하기로 했다. 내 취직 활동을 방해한 건 최태혁이니, 책임지고 이 보호 기간이 끝나자마자 바로 날 채용한다는 약속을 민선우에게서 받아 와야 한다고 말했다. 고개를 끄덕였으니 잘 처리하겠지.
물론 최태혁에게만 맡겨 놓기 그래서 나도 민선우에게 전화하여 사정이 생겼음을 알리기도 했다. 상황상 당장 일을 할 수는 없지만 절대 그 정식 고용 건을 거절하는 건 아니라고.
민선우는 사전에 최태혁에게 들은 것이 있었는지 계약은 걱정하지 말고 안전하게 있는 것에만 집중하라고 했다. 그렇게 내 인생에서 가장 여유로운 생활이 시작됐다.
딱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나의 다음 타깃이 예령이랑 어떻게 만났는지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다는 것이다. 누군지는 안다. 대학 내에서도 어떤 의미론 앞의 두 사람보다 훨씬 유명했던 두 명. 남궁호, 남궁후. 일란성 쌍둥이 형제다.
대학 병원 원장인 할아버지와 그 대학 이사장인 아버지, 총장인 어머니. 앞의 두 사람과 비교해도 만만치 않게 빵빵한 집안의 둘은 엄청나게 이름 난 사고뭉치들이었다.
예를 들자면, 그래. 어느 마법사가 나오는 소설 속의 쌍둥이 형제 같은. 그래도 걔네 장난은 재밌기나 하지. 이 쌍둥이들이 치는 장난은 하나 같이 못돼 처먹은 것들뿐이라 구경하는 입장이면 모를까, 당하는 사람은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롭다.
소문 난 것만 해도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으니 다 말하자면 끝이 없고, 제일 기억에 남는 게 하나 있었다.
사실 지금 내 팔자와 엮인 모든 사람, 그러니까 그 다섯 명과 나, 채예령이 나온 대학은 남궁호와 남궁후네 대학이다. 그렇다 보니 그 두 사람은 어딜 가나 특별 취급을 받았는데 그중 유난히 아부를 해 대는 교수가 한 명 있었다.
강의 평도 평이지만 일단 여학생들 사이에서 소문이 굉장히 안 좋은 남자 교수였는데, 쌍둥이한테 얼마나 친한 척을 하는지 보는 사람들 눈살도 찌푸리게 만들었다. 그래. 쌍둥이의 응징이 어느 정도였더라면 아무도 그 둘에게 뭐라고 하지 않았을 거다. 오히려 고소해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대학 사람들은 그들의 행동에 입을 쩍 벌려야 했다. 어떤 간 큰 놈들이 교수를 술로 정신을 잃게 한 뒤에 발가벗겨서 강의실에 갖다 놓은 걸로 모자라 그 사진 및 동영상을 온갖 커뮤니티에 올려 버린 것이다.
마음속으로는 범인이 누군지 모두 예상했지만 물증이 없었던 교수는 차마 고소도 못하고 학교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날 대학 내 쌍둥이의 전설을 또 하나 늘었다.
…그냥 둘은 버릴까? 아니지, 다섯 중에 둘만 있어도 괜찮을 거 같긴 한데. 나머지 세 명 다 버려? 갑자기 심하게 갈등된다.
최태혁은 이제 완전 맘 놔도 될 거 같고, 민선우도 비슷한 단계인 거 같은데 굳이 다른 세 명이 필요… 해. 필요하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만약 구할 때 날 버리느냐 마느냐를 다수결로 정하게 되면 아직 이대 삼으로 불리하다.
거기다 다치면 치료해줄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형인 남궁후는 외과, 동생인 남궁호는 내과 의사였으니까 둘 다 쓸모가 있다.
나는 잠깐 흔들렸던 마음을 다잡고 다시 열심히 기억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뭔가 건져내기 전에 맑고 청아한 초인종 소리가 집중력을 흐트러트렸다.
이 시간에 누구지?
귀찮은 몸을 이끌고 나가 문을 열자 보인 건 민선우와 최태혁,
“알았으니까 놓으라고!”
그리고 그들에게 잡힌 쌍둥이 형제였다.
만화나 영화를 보면 가끔 장난꾸러기 일란성 쌍둥이가 나온다. 거기서 주인공들은 작중 아무도 구분해내지 못하는 그들을 처음부터 용케 구분해서 호감을 얻는 패턴이 많다.
혼내는 건 물론 이해해주는 것도 주인공이고, 남들과 다른 행동으로 산 호기심이 종래엔 호감으로 바뀌어 사랑 받게 되는 것도 주인공의 몫이다.
내가 심리학도는 아니지만 눈치 백단인 사람으로서 한 가지 알려 주자면,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 시키고 싶어 하는 마음 일면에 그것을 남들에게 숨기고 싶어 하는 마음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자신을 확실히 인지하고 마주 봐 오는 사람에겐 무의식적으로 잘 보여야겠다는 생각에 나쁜 행동을 자제하게 된다. 즉, 자신의 정체를 분명히 아는 사람에겐 어쩔 수 없이 장난의 강도를 낮출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얼굴을 가리는 가면을 썼을 때 더욱 과감한 행동을 할 수 있는 것과 비슷한 원리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매체에 등장하는 쌍둥이들은 자기를 알아봐 주는 주인공들에게 끌렸던 거고, 무의식적으로 심한 장난을 하지 않았을 뿐더러 호감을 가지고, 말 잘 듣는 순한 양이 됐던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게 과연 남들 곤란하게 만드는 걸 좋아하고, 남들 괴롭히길 좋아하고, 남들 절망에 빠지는 모습을 좋아하는 놈들에게도 해당이 될까?
“왜 여기서 얼쩡대고 있었던 거냐.”
정말 똑같다. 컨트롤 씨, 컨트롤 브이 한 것처럼 똑같아. 이걸 예령이 그놈은 용케도 구분해냈네.
눈이 빠져라 번갈아 보며 조금의 차이점이라도 찾아보려 했는데 도저히 뭐가 다른 건지 모르겠다.
외모만큼은 예나 지금이나 귀여웠다. 놈들은 동그랗고 큰 눈, 오뚝하니 서 있는 코에 핑크빛 입술, 갸름한 턱 선이 얼굴만 보면 중고등학생으로 보일 만큼 동안이었는데, 대학 때 멀리서 보아도 튀었던 금발이 지금은 평범한 갈색이라는 것 빼고는 달라진 점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변화가 없었다. 트레이드 마크였던 장난스럽고 음흉한 미소도 여전했다.
모성애를 느끼게 하는 외모라느니, 아기 피부라느니 여러모로 유명했지만 사실 난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냥 딱 하나 부러운 게 있었는데, 바로 키였다. 이놈들 동안인 주제에 키는 완전 컸다. 한 188cm 정도? 최태혁보단 작고, 민선우보단 좀 컸으니까 대충 그쯤일 거다.
“입 다물고 있으면 넘어갈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그러나 그 큰 키가 무색하게 그들은 지금 내 옆에 꿇어앉아 있었다.
여긴 우리 집인데 대체 이게 무슨 난린지 모르겠다. 한낮에 아무렇지도 않게 남의 집에 쳐들어온 이 넷은 지들끼리 뭔 일이 있었던 건지 들어오자마자 최태혁, 민선우는 소파에, 남궁후, 남궁호는 바닥에 앉아 추궁과 침묵의 설전을 펼치고 있다.
늘 생글대던 민선우의 살벌한 무표정과 등 뒤의 흑룡이 4D로 겹쳐 보이는 최태혁, 무릎을 꿇고 눈을 이리저리 굴리는 쌍둥이들의 모습이 지금의 사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려주고 있었다.
나는 영광스럽게도 구경꾼의 역할을 맡게 됐다. 세상에서 가장 재밌는 게 불구경, 싸움구경이라고, 처음엔 과자까지 꺼내와 먹으며 귀를 쫑긋댔지만 기대와 달리 전혀 진행될 기미가 보이지 않아 지루해졌다.
혼자 이것저것 생각하고 머릿속으로 별 생쇼를 다 했는데도 치고 박기는커녕 큰소리도 나지 않았다. 중간에 싸울 거면 얼른 싸우라고 레슬링 관전하는 사람들처럼 소리 지르며 과자를 던져 볼까도 생각했지만 내 목숨은 하나니까 그건 참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다 안 먹고 한 주먹 남겨 놨다. 지금 분위기에 던지면 분위기만 싸해지겠지만, 치고받고 싸우게 되면 정신없어서 과자가 날아오는지도 전혀 모르겠지.
그 틈에 나는 평소 얄미웠던 최태혁과 민선우의 입을 향해 과자를 던질 생각이었다. 때마침 사 놓은 과자도 동그란 형태의 칸쵸와 홈런볼이라 던져서 뭘 맞히기 매우 좋았다. 제발 치고받고 싸워라, 주먹질해라 제발!
“아니, 우리가 뭘 했다고 이러는 건데?!”
지루함도 잠시. 드디어 싸움에 불이 붙으려는지 입을 꾹 닫은 채 눈만 굴리던 쌍둥이 중 왼쪽 애가 소리쳤다. 구경꾼의 입장에선 마음이 좀 기울 만큼 억울함이 철철 담긴 외침이었다. 오른쪽 애는 자기 형제의 말에 열렬히 고개를 끄덕이며 눈으로 항의의 레이저를 쏴 대고 있는 중이다.
나는 얼른 고개를 돌려 민선우와 최태혁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나 둘은 쌍둥이들의 항변이 가소로운지 코웃음을 쳤다. 와, 정말 때려주고 싶은 얼굴이다.
나는 어느새 쌍둥이들의 입장에 서 있었다. 무릎 꿇고 있는 모습이 언젠가의 나와 겹쳐 보여서 그런 건 절대 아니었다. 그러나 괜히 같이 억울한 표정이 되어 민선우와 최태혁을 흘겼다. 그래그래. 내가 뭘 했다고 무릎까지 꿇게 만들었던 거야! 왜 너한테 예의범절을 배워야만 했냐!
하지만 뒤이어 나온 이야기들은 상상을 초월했다.
“어제 혹시 몰라 뒤져 보니 대기실에 도청기와 카메라, 그 외 나비가 발견했으면 분명 곤란해 했을 물건들이 여기저기 숨겨져 있더라. 분명 내가 장난은 그만두라고 했음에도 말이지.”
…응?
“말해. 또 뭘 꾸미고 있길래 이틀 연속 똥강아지 집 CCTV에 네놈들이 비친 건지.”
…으응?!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의심될 정도로 어이없는 이야기들이었다.
“저기, 대체 지금 무슨….”
“우린 모르는 일이야.”
“그래. 우린 몰라.”
가까스로 입을 열었는데 순식간에 씹혔다. 마치 분리된 공간처럼, 그들이 형성하는 살벌한 공기에 내 말만 튕겨져 나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저, 저기요….”
나는 다시 그들을 부르며 엉거주춤 일어났지만 얼른 도로 앉았다. 민선우와 최태혁이 동시에 고갤 돌려 넌 좀 가만있어! 하는 눈빛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의아했다. 지금 너희, 나한테 꼭 설명해야만 하는 단어들을 내뱉지 않았니? 내가 끼어서 같이 화내야 하는 내용이 섞여 있지 않았어? 분명 그랬던 것 같은데 태도가 너무 당당하고 자연스러워서 뭐라고 말을 못하겠다.
환청이었나? 아니면 다른 말이었는데 내가 잘못 알아들은 건가? 나 벌써 난청이 생겼나?
“너희가 아니면 누가 저 정신 나간 놈이 있는 집에 그런 황당한 물건들을 갖다 놓는단 거지?”
“너희들이 아니면 누가 저 힘만 넘치는 깡패 새끼들의 경계를 그렇게 쉽게 뚫을 수 있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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