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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호 이야기-24화 (24/234)

24화

고함을 지른 최태혁이 소파에 핸드폰을 집어 던졌다. 곧이어 들리는 큰 탄식에 몸을 움츠렸지만 여전히 입은 열 수 없었다. 고개를 숙이며 무릎 위에 고이 올린 손을 꾹 쥐었다. 미안하고, 무섭고, 면목이 없어서 눈물이 날 것만 같다. 이 바보 새끼. 어떻게 그걸 잊어 먹냐. 생명에 직결되는 문젠데 정신 못 차리고 남 걱정이나 시켜 대고. 속으로지만 깐죽대기나 하고. 이 모자란 놈. 멍청한 새끼. 넌 멍텅구리야.

계속 날 자책해도 마음이 편해지질 않는다. 뒤통수에 박혀 드는 시선이 아프다.

“죄송해요….”

이 말을 한다고 달라질 건 없겠지만 그래도 힘없이 속삭였다. 동시에 최태혁이 움직이는 기색이 느껴져 질끈 눈을 감았다. 때릴 거면 조금만 때렸으면 좋겠는데.

그러나 내 생각과는 달리 그의 손은 내 뒤통수를 어르듯 쓰다듬어 왔다. 뒤통수에 닿은 최태혁의 손이 너무 차가워서 나는 울지 않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그 시간까지 민선우네 집에 있었던 이유부터 설명해.”

“…네?”

“핸드폰이 마지막으로 꺼진 곳을 위치추적 해 보니 민선우네가 나오던데, 퇴근할 시간이 훨씬 지난 시간에 거기서 뭘 하고 있었던 거냐.”

불편한 침묵이 어느 정도 흐르고 난 뒤에 최태혁은 다시 몸을 뒤로 젖히고 앉았다. 조금 전의 약간 풀린 분위기는 어디로 갔는지 갑자기 취조 당하는 느낌이 들었다.

근데 나 민선우네서 일하는 거 얘기 했었… 나…? 위치 추적은 또 뭐고…? 그렇게 생각하며 최태혁의 얼굴을 힐끔대는데 뭔가 굉장히 불만스러운 표정이다. 왜? 나는 최태혁의 태도가 의아했지만 잘못한 게 있기 때문에 그냥 묻는 말에나 대답했다.

“아니, 일하다가 좀 늦게 끝났는데 집에 오기엔 좀 늦은 시간이라 거기서 자고 가래서…. 거기 대기실이 되게 잘 되어 있어서 자기에도 나쁘지 않거든요! 그래서 그냥 거기서 자고 왔어요.”

횡설수설 내뱉은 설명에 최태혁은 이것저것 캐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그렇게 많기에 집에 오지도 못할 늦은 시간까지 일을 했는지, 민선우는 그걸 알고 있었는지 등등. 별 쓸데없는 것까지 알려고 들던 최태혁은 마지막에 허를 찌르는 질문을 날렸다.

“일하는 동안, 그 대기실이라는 데에서 혹시 이상한 물건 같은 건 못 봤나?”

“어?! 어떻게 아셨어요? 엄청 많았죠!”

나는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역시. 설마 사용하진 않았겠지?”

…뜨끔. 좀 찔리지만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대기실에 있던 이상한 물건 중에 메이드복을 입어보긴 했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무효. 그리고 약… 은, 그건 대기실에 없었어. 그러니까 대기실에 있었던 물건을 사용한 게 아니고, 쓰고 싶어서 쓴 것도 아니니까 마찬가지로 무효다.

“약?”

분명 생각만 했는데 최태혁이 허를 찌르는 단어를 툭 던졌다. 나는 경악한 얼굴로 최태혁을 쳐다봤다.

“너 지금 방금 약이라고…. 아니, 됐다. 일종의 독심술 같은 거야. 신경 쓰지 말고 대답이나 해. 약은 무슨 약?”

뭔가 얘기하려던 놈은 귀찮다는 듯이 고개를 내젓고 황당한 소리를 했다. 독심술이라니. 독심술? 그 궁예가 했다는 관심법이랑 같은 맥락인 그거? 그걸 최태혁이 할 수 있다고?!

“김진호! 정신 팔지 말고 빨리 말해.”

“형, 진짜 독심술 할 줄 알아요? 막 사람 생각 읽고 그래요?”

“후-. 말 돌릴 거리를 준 내 잘못이다. 꾀부리지 말고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에이 씨, 진짜 독심술 쓰는 것도 아닐 텐데 왜 이렇게 사람 맘을 잘 알아? 나는 속으로 깐죽댄 걸 후회한 지 몇 분이나 지났다고 또 속으로 열나게 깐죽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계속 어떻게 하면 이 위기를 잘 넘겼다고 소문이 나려나 빡세게 머리를 굴려 댔다.

쪽팔리게 어제 얘길 할 순 없어. 굳게 다짐한 순간 최태혁이 다시 엄청나게 무서운 목소리로 단호하게 충고했다. 이번에도 거짓이 섞여 있으면 어떻게 될지 봐.

…그래, 사람은 자고로 솔직해야 하는 법이다.

“제가 무슨 거짓말을 한다고 그래요. 아까는 그냥 너무 화나신 거 같길래 충동적으로 그런 거지, 작정한 건 아니었다고요.”

최태혁의 화가 조금이라도 풀리길 바라며 최대한 시무룩한 얼굴을 하고 말했지만 영 효과가 없었다. 하, 그 일을 내 입으로 남에게 말하게 될 줄이야. 머리가 아파 오는 것 같은 느낌에 이마를 짚고 싶었지만 나는 그냥 주먹만 한 번 꾹 쥐고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었다.

“사실 제가 요즘 선우 형이랑 저녁 같이 먹고 퇴근하거든요? 어제도 제가 밥하려고 부엌엘 갔는데, 싱크대에 유리병 하나가 있었어요.”

말하며 힐끔 최태혁의 눈치를 살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이라도 그만 말하고 싶은데, 놈의 살벌한 표정을 보니 정말 다 말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한 이만한 병인데, 뭐라더라. 그…. 아! 비타민제니까 물에 타서 먹으라고 그렇게 쓰여 있더라고요. 그래서 전 아무 의심 없이 선우 형이랑 제 물컵에 각각 삼분의 이, 삼분의 일을 섞어서 마셨죠.”

최태혁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민선우가 그렇게 놔뒀을 리가 없을 텐데.”

“선우 형은 몰랐어요. 제가 부엌에서 그거 섞고 있을 때 형은 식당에 있었거든요. 근데 나중에 밥 다 먹고 좀 지나서인가? 그때부터 몸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거예요! 나중에 알았는데 그게 비타민제가 아니라 미… 약이었대요. 그리고 그 미약이 정액을 먹어야 가라앉는 좀 이상한 약이어서 선우 형이 저한테 자기 정액을 먹….”

나는 차마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최태혁이 팔을 걸쳐 놓았던 소파 손잡이를 잡아 뜯을 듯이 꽉 그러쥐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손이 하얘질 정도로 힘을 준 것을 보고 있자니 본능적으로 여기서 더 이야기하면 안 된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하하, 웃으면서 신기하죠- 하고 대충 이야기를 마무리 지으려고 했으나 최태혁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뭘 먹었다고?”

“네…? 아니, 형. 그게요.”

나는 이를 악문 채 묻는 녀석에게 손까지 흔들어 보이며 그런 게 아니라고 했으나, 아닌 게 아닌 걸 나도 알고 최태혁도 알았기에 전혀 소용이 없었다. 내 반응을 보고 먹었다는 사실에 대해선 확신했는지 녀석은 다른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먹었는지 말해.”

“형 잠깐만요. 그걸 굳이 꼭 아셔야 겠….”

나는 그 일만은 정말 내 입으로 다시 말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어떻게든 말하지 않으려고 버텼지만 최태혁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협박처럼 말을 뱉었다.

“말, 해.”

그리고 그 살벌한 표정과 분위기에 진 나는 아주 조그맣게 속삭였다.

“펠라로요.”

최태혁의 손이 기어코 우리 집 소파를 찢어발길 것처럼 움켜쥐었다.

뭐야. 무슨 대목에서 저렇게 열이 받은 거지? 뭐에 저렇게 분노하는 거냐고!

나는 당황스러운 나머지 뭘 물어볼 생각도 못한 채 광분한 최태혁의 손을 꼭 잡고 말리기부터 했다. 그러다 급기야 민선우의 이름을 외치며 일어선 놈의 옆구리를 안으며 다리를 감았다. 나무에 매달린 코알라 같은 모양새가 됐지만 놈이 워낙 화가 나 있어 뭘 할지 모르기 때문에 놔줄 수가 없었다. 최태혁은 지 옆구리에 찰싹 붙어 있는 날 내려다 봤다.

“너! 도대체 순진한 거냐 멍청한 거냐! 세상에 그런 약이 어디 있어!”

“형, 스탑! 쉿! 그냥 그렇게 믿고 넘어가요. 진지하게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우리 그냥 아무 일 아닌 걸로 치고 잊어버리자구요. 검지를 입에 대가며 말하자, 내 심정을 이해했는지 최태혁이 얌전해졌다.

나는 조금 더 매달려 있다가 그가 진정된 것 같아 몸을 떼고 똑바로 서서 놈을 올려다봤다. 묘한 표정으로 날 보고 있는 최태혁에게 활짝 웃으며 설명을 좀 덧붙였다.

“이미 일어난 일이니까, 빨리 인정하고 치워 버리는 게 좋아요.”

어떻게든 짜 맞춰서 합리화 시켜놓긴 했으니까 이제 더 이상 생각하기 싫어요. 일부러 발랄한 어조로 말했건만 최태혁의 표정은 더욱 더 묘하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온 최태혁은 천인공노할 소리를 지껄였다.

“그만둬.”

“네?”

“못 들었나? 일 그만 두라고 했다. 그리고 어디 나갈 땐 내가 붙여준 놈들과 같이 다녀.”

일을 그만두라니. 그 꿈의 직장을 그만두라니! 정식 채용된 게 불과 몇 시간 전인데, 이 새끼 도대체 뭐라고 씨불이는 거야?! 다른 건 몰라도 도저히 이 부분에선 깨갱해줄 수가 없다.

어제 연락을 못한 건 내 잘못이지만 그렇다고 돈줄을 끊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처사이다. 나는 이 부분에 대해서만은 납득할 수 없어 단호하게 거절하려고 했다. 하지만 놈은 내가 뭐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대안을 내놓았다.

“대신 네가 받던 월급만큼 내가 주겠다. 무작정 불안해하는 것보다 그게 낫겠지.”

…어…. 그건 또 좀 당기는데? 아, 아니지. 나는 파격적인 제안에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일 뻔한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저 제안이 단기간으로 볼 땐 좋을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민선우네에 정규직으로 들어가는 것이 훨씬 이득이다. 최태혁이 나를 평생 돌봐줄 것은 아닐 테니까.

놀고먹으면서 돈 받는 거야 모든 사람의 꿈이라지만, 지금 당장 그러자고 어쩌면 평생 나를 먹여 살릴 수도 있는 직장을 걷어차 버리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나는 조금 아쉬운 마음을 한숨으로 날려 버리고 최태혁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저야 편하겠지만, 평생 그렇게 살 것도 아니고, 거절할게요. 선우 형이 오늘 저한테 정규직 자리 제안했거든요. 기회 왔을 때 취직하는 게 아무래도 맞는 거 같아요. 앞으로 이런 일 없게 조심할 거고, 또 밖에 돌아다닐 때도 더 조심할게요.”

말이 끝나자마자 최태혁이 커다란 손을 내 정수리에 턱 얹더니 머리가 엉망이 될 정도로 세게 문질러 댔다. 얼마나 힘을 주는지 녀석의 손이 움직이는 대로 내 고개가 이리저리 흔들려 정신이 없었다.

“정말 화가 날 정도로 위기감이 없구나, 우리 똥강아지는. 그래, 기어코 그 집을 다시 기어 들어가겠다 이거지. 민선우한테는 내가 잘 알아듣게 이야기해 놓을 테니, 말대꾸 그만하고 하라는 대로 해.”

“…넵.”

그렇게 나는 타의로 인해, 모두가 꿈꾸는 돈 버는 백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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