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하…”
봐주면 안 된다는 걸 알았지만 겁을 먹고 풀이 죽어 있는 나비가 애처로웠다. 속으로 무르다고 자신을 질책하면서도 선우는 결국 부드러운 손길로 나비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눈물범벅인 나비의 얼굴엔 짜증과 억울함 등이 숨김없이 드러나 있었다. 이젠 몸까지 잘게 떨고 있는 것을 보면 분명 겁을 먹은 것 같은데, 고집이 여간 센 게 아니다.
선우는 이 사태가 뭐 때문에 일어난 건지 알려주기나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조금 풀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그가 다시 다정한 모습을 보이자마자 진호는 기다렸다는 듯 터져 나오는 서러운 울음을 어쩌지 못하며 웅얼웅얼 변명을 늘어놓았다.
선우는 그 예쁜 모습에 저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느끼며, 자신의 나비는 정말 길고양이 같다고 다시 한번 생각했다. 길고양이는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깊다. 잘 믿지도 않고, 제멋대로 행동한다. 이번의 예상치 못한 반항은 구석에 몰리면 공격을 해 오는 습성을 고려하지 못한 자신의 패착이었다. 우선 주인을 완전히 믿고 의지할 때까지 애정을 쏟아 주는 것이 먼저였는데.
선우는 체벌은 당분간 절대 쓰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하며 나비의 눈가를 쓸어주었다. 그러자 다정해진 손길에 안심을 한 건지 조금씩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그 귀여운 모습에 선우는 진호를 품에 안고 달래듯 토닥였다. 뭐, 그래도 이번 일을 통해 주인이 화가 나면 무섭다는 건 확실히 알았겠지. 이 정도면 됐어. 그렇게 생각하면서.
진호를 길들이기로 마음먹은 선우에게 굉장히 거슬리는 점이 하나 생겼다. 집중적으로 관찰한 결과, 진호는 틈만 나면 핸드폰으로 무언가를 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게임 중독인건가 싶어 나중에 고치게 해야겠다고 가볍게 생각했지만 얼마 전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약속. 천진한 얼굴로 시간이 날 때마다 메시지나 전화로 있었던 일을 보고하기로 약속한 사람이 있다고 말하는 진호를 향해, 선우는 차마 웃어줄 수가 없었다. 그럼 지금까지 게임을 하는 줄 알았던 행동들이 누군가와 연락을 하는 중이었던 건가. 심지어 그는 출퇴근길에도 항상 그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듯했다.
선우는 완전히 마음을 놓고 기대 올 때까진 되도록 참으려 했던 분노가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꼈다. 계획을 좀 바꿔서 일단 굴복시켜 놓을까? 아픔을 이용하면 쉽게 넘어 올 텐데. 옷고름을 묶어주면서 일부러 피부를 스칠 때마다 보이는 반응을 봐선 분명 쾌감에도 약할 테고.
선우는 얼마 전에 했던 대화를 떠올리며 진지하게 고민했다. 처음엔 반항하겠지만 나비는 날 좋아하는 것 같으니 최악의 결말은 생기지 않을 거야. 그렇게 속삭이는 소리가 그럴싸하게 느껴졌다.
선우는 진호가 자기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직접적으로 말한 적은 없으나 진호가 그에게 하는 행동들은 호감이 아닌 상대에겐 절대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근무 시간이 아닌데도 남아서 저녁을 차려놓고 기다린다든가, 어떻게든 대화를 길게 이어가려 하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거나 상냥하게 웃어주면 몸을 배배 꼬며 좋아하는 것 등이 나비가 저를 좋아한다는 걸 확신하게 했다.
물론 선우는 진호를 애인이 아니라 펫으로 보고 있지만 성향자에겐 어떻게 보면 후자가 더 사랑스러운 존재였다. 선우는 진호를 펫으로서 누구보다 아껴줄 자신이 있었고, 원래 애완동물은 그 주인을 사랑하게 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이제는 좀 거칠게 나가도 괜찮지 않을까. 슬슬 스팽킹이라든가 체벌을 하고 싶기도 하고. 다른 데보다 살이 오른 엉덩이도 만져보고 싶고….
“형,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이거 오늘 처음 했단 말이에요!”
빨리 먹어보세요. 고민하는 시간이 길었는지 어지간히도 애가 닳은 목소리가 식사를 재촉한다. 생각을 잠시 멈춘 선우가 싱긋 웃으며 젓가락을 들자 진호가 그 모습을 빤히 보며 꼴깍 침을 삼켰다.
그의 입에서 맛있다는 말이 나갈 때까지 진호는 저 비장해 보이기까지 하는 표정을 풀지 않을 것이다. 귀여워라. 선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잠깐 새 완성 단계까지 다다랐던 계획을 모두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그 계획대로 한다면 저렇게 무방비한 모습은 더 이상 볼 수 없을 테니까. 그래, 연락할 틈을 주지 않으면 돼. 아아-. 정말이지, 물러졌다니까-.
“어때요? 네? 아, 혀엉!”
“정말 맛있네요.”
“진짜요? 와아! 나 이거 오늘 처음 했어요. 대박이죠? 난 역시 천재라니까?!”
“그러네. 진호 씨를 이길 사람은 없을 거예요.”
“그죠? 나 요리 진짜 잘하죠? 요리사나 할걸 그랬나 봐!”
선우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전혀 모르는 진호는 그에게 해맑게 웃었다. 그리고 선우는 그런 진호를 보며 혀로 입술을 쓸었다. 전혀 취향이 아닌 외형으로도 저를 이렇게까지 동하게 하는 데엔 나비를 이길 사람이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 * *
“흥흥흐흐흥~.”
요즘 출근길이 즐겁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오늘 출근길이 즐겁다. 왜냐하면 오늘이 바로 기다리고 기다리던 월급날이기 때문이다!
오늘 열심히 일하고 돌아가 보면 통장에 이체 돼있겠지? 어차피 내일이면 대출 이자다 뭐다 해서 팍팍 깎여 나가겠지만, 그 전까지를 즐기겠다. 오늘 저녁 하루만이라도 부자가 돼 보는 거야!
자린고비는 생선을 보는 걸로 반찬 했다면 난 오늘 한정인 통장 잔고를 보며 마음껏 배불러 하겠어. 비록 쓴 에스프레소는 못 마셔도 난 쿨한 도시 남자니까!
「신원 확인 완료.」
“어서 오십시오. 오늘도 좋은 아침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참 맑고 밝은 아침입니다!”
“예, 그렇군요. 해는 뜨지 않았지만….”
뒤에서 집사 할아버지가 나한테 뭐라고 말하는 것 같았는데 못 듣고 인사를 하자마자 얼른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오늘은 특별히 더 열심히 일해야지. 기분도 좋으니까 민선우한테도 좀 더 잘해줘야겠다.
나는 어제 저녁 새로 세운 계획을 떠올렸다. 아무래도 민선우랑 친분만 쌓는 걸 바라는 건 너무 소심한 만족 같아서 조금 스케일을 넓히기로 했다.
새로운 계획의 요지는 이 꿈의 직장에 정식으로 고용되기였다. 그러므로 오늘부터 민선우가 해달라는 건 가리지 않고 다 해주고, 해달라고 안 해도 알아서 잘 해줄 생각이다. 덧붙여 오늘 저녁의 테마는 ‘김진호가 만들었어요, 먹고 나면 일자리를 주고 싶어지는 디너 파티’로 정했다.
나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기 무섭게 대기실로 뛰어 들어가서 오늘 할 일을 정리했다
청소야 내가 열심히 한다고 티가 나는 것도 아니니 그냥 그대로 하기로 했고, 빨래는 평소보다 좀 더 탁탁 털어 널기로 했다. 저녁 메뉴는 일단 내가 짜 온 것이 있긴 하지만 이따 물어는 봐야겠다. 아무리 화려해도 자기가 먹고 싶은 게 없으면 별로 감동스럽지 않을 테니까. 또 뭐가 있으려나? 이대로면 다른 때랑 다른 구석이 하나도 없는데….
나 혼자 더 열심히 했다 느낄 게 아니라, 민선우가 확실히 느낄 만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왜 난 티 나는 재주가 없는 걸까 자책 하고 있는데, 진동이 울리며 램프가 깜빡였다.
나는 아차 싶어 재빨리 옷을 갈아입었다. 내가 출근할 시간쯤에 울리는 진동은 이제 준비 다 됐으니 들어와서 옷고름 매달라고 해도 된다, 라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생각에 빠져 있느라 미리 옷을 안 입어서 두 번이나 울리게 했다. 잘하기로 마음먹은 날인데 아침부터 혼나게 생겼다. 이게 바로 머피의 법칙인가? 난 세 번 울리기 전에 급하게 옆방 문을 두드렸다.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천천히 문을 여니, 방 안은 조용했다. 머리부터 먼저 집어넣고 안을 살피니 캐주얼한 옷차림도 모델 포스로 소화하고 있는 민선우가 책상 의자를 문 쪽으로 돌려놓고 다리를 꼰 채로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긴 다리를 따라 시선을 들어 올리는데…. 눈이 웃고 있질 않았다.
“들어와.”
Emergency! Emergency!
나는 어디선가 울리는 삐용삐용 소리를 들으며 손을 까딱이고 있는 민선우에게로 다가갔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 때문에 매우 천천히 걸어가는데도 놈은 참 참을성 있게도 기다린다.
나는 쭈뼛쭈뼛 걸으며 최대한 가는 시간을 늦췄지만 결국 놈이 팔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까지 도착하고 말았다. 민선우가 까딱이던 손을 멈추고 꼰 다리를 풀었다.
배운 대로 한 발짝 더 움직여 다리 사이에 선 나는 저번처럼 손등을 맞는 건가 엄청 긴장했지만 다행히 그만큼 화난 건 아니었나 보다. 곧 기다란 손가락이 내 옷의 매듭을 묶어 주었다. 휴-, 괜히 쫄았네.
“늦었습니다. 시간 약속 지키지 않는 것도 안 좋은 습관이라고 말 했었죠?”
“네에….”
“앞으로 한 번이에요.”
“네!”
“왜 늦었어요? 출근은 빨랐잖아요.”
나는 생각보다 유한 반응에 안도하며 질문에 답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얼른 입술을 깨물었다. 간지러운 느낌에 뭔가 이상한 소리가 나올 것 같아서였다. 내가 간지럼 잘 탄다는 거 뻔히 알면서!
일부러 그러는 건지 내가 보기엔 충분히 잘 펴져 있는데도 민선우는 자꾸 옷 속까지 손을 집어넣어 옷을 잡아당겼고, 그 바람에 손이 내 피부를 스쳐 자꾸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나는 속으로 민선우를 열심히 씹으며 놈의 팔을 잡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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