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그러자 민선우는 웃는 낯으로,
‘그럼 진호 씨 해고입니다.’
하고 받아 쳤다.
나는 황당해서 그게 왜 그렇게 이어지냐고 물어봤고, 놈은 복장도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하는 고용인은 이쪽에서 사양이라는 대답을 했다.
나는 울컥한 나머지 까짓 매듭 제대로 매면 될 거 아니냐고 호기롭게 소리쳤다. 그 말에 그때까지도 앉아있던 민선우가 의자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내 바로 앞까지 걸어왔다.
커다란 사람이 바로 앞에서 내려다 보니 위압감이 느껴졌다. 민선우는 바로 위에서 거칠게 끈을 푸는 내 손을 무표정하게 내려다 봤다. 난 오기로 어떻게든 놈처럼 단정하게 끈을 묶어 보려고 했지만 없던 손재주가 갑자기 생길 일은 없었다.
결국 전과 같이 엉망인 모양새가 됐고, 조용히 지켜보던 민선우는 그걸 보고 냉정하게 말했다.
‘다시 하세요.’
그 소리에 입술을 깨물며 끈을 푼 뒤 다시 묶는데, 찰싹- 민선우의 손이 내 손등을 때렸다.
‘다시.’
그 뒤에 이어진 찰싹 소리와 다시의 반복.
시간이 지날수록 더 긴장돼서 손이 덜덜 떨려왔다. 이미 오른쪽 손등은 발갛게 부어올라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단단히 화가 났는지 민선우는 봐주는 법이 없었다.
결국 얼얼함을 넘어 감각이 없어진 손등에 한 번 더 아린 통증이 느껴졌을 때 눈물을 터트렸다. 억울하고 짜증나고 겁도 좀 났다.
나는 스스로가 한심하고 창피해서 입술을 꾹 깨문 채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다. 그대로 몇 분간 아무 말도 않던 민선우는 한숨을 쉬며 끈을 꼭 잡고 있던 내 손을 풀어 밑으로 내렸다.
민선우의 큰 손이 구겨진 끈을 잡고 예쁜 매듭을 지었다. 그리고 바닥을 노려보고 있던 내 턱을 들어 올려 얼굴이 자신을 향하도록 했다.
나는 놈이랑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아 시선을 내리 깔았다. 민선우는 아무 말 없이 엄지로 내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며, 여전히 단호하지만 조금은 온기가 돌아온 목소리로 말했다.
‘나 봐.’
나는 고집을 부릴까 했지만 상황을 더 악화시키기 싫어 천천히 놈을 올려다봤다.
‘다른 건 몰라도, 난 어긋나 있는 건 못 봐줘. 그러니까 적어도 나랑 있을 땐 고쳐.’
설움이 솟아올랐다.
‘욱…. 하지만, 나, 난 그런 거, 흐윽…. 잘, 몰라서….’
‘알아. 완벽한 걸 바라는 건 아니야. 모르는 건 가르쳐 줄 테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민선우가 표정을 풀곤 오른손을 들어 올려 손등을 쓸었다.
‘아팠죠?’
반말도 다시 존댓말이 됐다. 어루만지던 손을 떼고 약을 발라준 민선우는 내 울음이 그칠 때까지 꼭 안아 토닥이더니 그친 걸 확인하고 쉬라는 말과 함께 대기실로 보내줬다.
그 뒤론 지적을 당하면 바로 고친다. 내가 못하는 건 그냥 민선우에게 해달라고 하고.
“설거지는 내가 할 테니 놔둬요.”
“아니에요-. 제 일인데요, 뭘.”
“이미 퇴근시간 지났잖아요. 이리 줘요.”
말만 잘 들으면 저렇게 설거지도 해주니 나야 손해 볼 건 없다. 식탁 의자에 앉아 보는 놈의 뒷모습이 이제 꽤 익숙했다.
난 그가 설거지하는 모습을 좀 보다 주머니의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역시 전원이 들어오자마자 진동이 연속해서 울린다. 다 최태혁의 연락일 게 분명했다.
역시. 부재중, 메시지 할 거 없이 최태혁의 이름이 찍혀 있다. 이것도 이제 익숙했다. 나는 얼른 메시지에 답변했다.
내용은 매일 비슷하다. 일하면서 있었던 일이나 오늘도 또 늦게 끝난 이유 같은 사소한 얘기. 지겨울 법도 하건만 이게 또 꽤 재밌다. 그 덩치의 최태혁이 조그만 핸드폰으로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모습과 무표정으로 온갖 잔소리를 해 대는 모습이 상상돼 웃겨 죽겠다.
“엄청 친한 친구인가 봐요?”
“네?”
“아니, 되게 즐거운 표정이어서요.”
어느새 설거지를 끝낸 민선우가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정말 못하는 게 없는지 설거지도 뚝딱 해치웠다.
그나저나 최태혁을 엄청 친한 친구라고 해야 하나? 나야 그러고 싶지만 최태혁 쪽이 그렇게 생각할지는 미지수인데…. 나는 그냥 메시지 내용이 재밌어서요, 하는 대답으로 어물쩍 넘겼다.
핸드폰을 끄고 민선우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짙어진 갈색 눈이 보였다. 뭔가를 지적할 때 보이는 눈빛이었다. 왜 그러지? 나 지금 아무것도 안 했는데….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왜요?”
“…아닙니다.”
눈을 한 번 깜빡이고 다시 보니 민선우는 평상시와 같은 얼굴이었다.
내가 잘못 봤나? 조금 미심쩍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나저나 친구라. 그러고 보니 민선우랑은 채예령에 대한 얘기를 한 번도 안 했다.
다들 그놈을 꽤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 최태혁한테만 도움을 주는 것도 불공평하고. 이쪽한테도 기회를 줘 보는 게 채예령 입장에서도 나을 수도 있으니까.
문제는 저 쪽에서 티를 좀 내줘야 정보를 주든 기회를 만들어주든 할 텐데 아직 연애 쪽으론 단 한 번도 이야기를 해 본 적이 없었다. 이제 어느 정도 친분을 쌓은 거 같으니 한번 찔러 볼까? 나는 침을 한 번 삼키고 뒤돌아 식탁 쪽으로 향하는 민선우를 불렀다.
“저…. 형.”
“예?”
“혹시,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목이 말랐는지 부르는 말에 힐끔대면서도 물을 따르는 것을 멈추지 않던 민선우가 동작을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물병을 내려놓으면서 내 쪽으로 고개를 기울이고 입을 열었다.
“좋아하는 사람?”
그게 무슨 엉뚱한 소리냐는 듯이 묻는 녀석의 반응에 아, 자연스럽게 말하기는 망했구나, 싶었지만 나는 이왕 시작한 거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네. 괜찮으니까 말해 봐요. 제가 상담해줄게요.”
“갑자기 그건 왜요?”
그래, 나 같아도 저렇게 물을 것 같다. 너무 갑작스러웠지. 맞아. 하지만 어쩌겠어, 급한 마음에 그냥 말하고 본 건데. 나는 스멀스멀 몰려오는 민망함을 가라앉히고 다시 한번 뻔뻔함을 장착했다.
“그냥 궁금해서요. 있어요, 없어요?”
“음-. 글쎄”
좋아하는 애가 남자라 그런가? 정말 끈질기게 묻는데 애매한 대답만 한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물었는데 여기서 뭘 더 말해야 내가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 있는 거야? 혀가 잡힌 상태로 웅얼거리며 말하는 것도 앞뒤 문맥 파악해서 찰떡같이 알아들어 줬던 놈이 이렇게 또박또박 한 말을 못 알아들었을 리는 없고.
바로 말해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막상 이렇게 되니 마음이 급해진다. 아 진짜, 다 아는데 그냥 불지 좀! 내가 도와주겠다잖아! 그러다 나중에 최태혁이나 다른 놈들이 먼저 꿀꺽해도 모른다?
하지만 아는 걸 모른 척 하기도 힘들다. 얄미운 대답한 하는 민선우에게 채예령 좋아하는 것 다 안다고 버럭 소리를 지르고 싶어 몸이 배배 꼬였다. 한편으로는 아직 그 정도로 친해지지는 못한 건가 하는 생각에 좀 섭섭하기도 했다.
“됐어요. 저 갈래요.”
“벌써 가요?”
“네. 오늘 학원 가는 날이거든요. 이제 가야 해요.”
“데려다 줄게요.”
민선우는 곧바로 차 키를 꺼내들었다. 먼 거리도 아닌데 굳이 데려다 줄 필요 없는데. 나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바른 시민이다.
“괜찮아요! 혼자 갈 수 있어요.”
“…또 그 사람이랑 통화하면서 갈건가요?”
엉뚱한 물음이 돌아왔다. 통화? 아, 최태혁을 말하는 건가. 나는 최태혁과 약속한 대로 어딘가로 이동하는 길엔 항상 놈과 통화를 한다. 용건이 있는 통화가 아니라서 하나같이 쓸데없는 얘기들뿐이지만 밤길이 전혀 무섭지 않아진 건 분명 그 덕이다.
나는 현관까지 쫓아와 배웅하는 민선우를 뒤에 두고 신발을 신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럴 거예요. 약속 했거든요.”
다 신었다! 나는 어깨를 추슬러 가방을 고쳐 메고 자리에서 일어나 민선우를 향해 몸을 돌렸다. 고개를 꾸벅 숙이며 그럼 내일 봐요, 인사를 하는데 진동이 울린다. 최태혁의 전화였다. 급해진 마음에 힐끔 위쪽을 쳐다보니 은은한 미소를 띤 입가가 보였다.
“갈게요!”
같이 웃어 주고 재빨리 열린 문틈으로 나가며 이어폰을 귀에 꼈다. 아직 문이 닫히지 않았단 것을 느끼고 다시 한번 목례나 하려고 고개를 돌리는데 타이밍이 안 좋았는지 금세 문이 닫혔다.
“어…. 잘못 봤나?”
-뭐?
“아! 아니에요.”
틈으로 보인 민선우, 무표정이었던 것 같은데…. 잘못 본 거겠지.
* * *
새로 온 하우스키퍼 진호는 솔직히 전혀 선우의 취향이 아니었다.
선우는 항상 최고여야 했다. 그 어떤 분야건 그에게 주어진 선택권은 단 하나. 최고, 최선, 최대. 선우가 자란 환경은 그에게 완벽을 요구했다. 그렇다고 그가 그걸 싫어한다거나 부담으로 느끼지는 않았다. 남들이 강요하지 않아도, 그 스스로가 완벽하지 않은 것들을 혐오했으니까.
다른 이들에게 그 조건을 적용할 필요성을 느끼진 못했지만 선우 자신은 그 누구보다도 완벽에 가까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그에게 주변 환경은 득이면 득이었지 결코 실이 되진 않았다. 한 나라, 아니 전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재벌인 아버지와 아이비리그의 경영학 종신 교수이신 어머니. 회사를 물려받을 예정인, 선우 못지않은 완벽주의자 형과 어머니의 뒤를 잇고 싶어 하는 공부에 미친 동생 둘. 덕분에 그에겐 누구의 뒤를 이어야 한다는 속박도 없이 완벽한 자유가 주어졌다.
말하자면, 선우는 결벽증은 아니다. 자신의 완벽주의를 남들에게 강요하는 피곤한 스타일도 아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에 대해선 꽤 너그러운 편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어떻게 하든 상관하지 않았다. 그들이 못하면 그만큼 그가 하면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선우는 상대에게 맞춰 행동해 주는 것을 즐겼다. 웃는 얼굴을 좋아하니 웃어 주고, 다정한 말투를 좋아하니 어르듯 얘기해 주고, 배려를 원하니 배려를 해 준다.
그렇게 해주면 금세 반했다는 듯이 구는 이들이 귀여웠다. 일부러 하는 행동이 아니라 좋아서, 선우 스스로가 그 반응이 보고 싶어서 하는 행동들이었다.
그래서 그는 보통의 타인이 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진실 된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단지, 그 외의 모습도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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