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와-. 이게 무슨 냉장고냐, 식량 창고지. 요리로 만드는 것보다 썩어서 버리는 게 더 많겠는데?”
요리사들 데려다 놓으면 황홀해 하겠네. 냉장고 안은 가지각색의 재료들로 꽉꽉 차 있을 뿐 아니라, 한쪽 선반엔 레스토랑에서 나올 법한 요리들이 잘 래핑 되어 놓여 있었다.
민선우가 먹고 싶을 때 간편하게 먹으라고 만들어 둔 건가? 나는 종이에 적힌 요리에 필요한 재료들을 찾으면서도 끊임없이 감탄했다. 나중에 상할 것 같으면 가져가도 되려나? 해산물 칸의 싱싱한 전복들을 보니 짧은 갈등이 일었다.
대충 재료들을 확인하고, 바로 준비할 것들만 추려 꺼낸 뒤 이번엔 싱크대로 향했다. 찬장에 구비되어 있는 양념들도 역시 상상을 초월할 만큼 종류가 다양했고, 식기들도 번쩍번쩍 했다.
문득 민선우와 결혼할 사람이 부러워졌다. 이 경우엔 채예령이려나? 자식, 엄청 부럽네. 나도 매력이 있었으면 한번 어떻게 해 보는 건데, 아쉽게도 난 매우 평범한 사람이었다.
친분 쌓는 일이나 열심히 하자. 나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본격적으로 요리를 시작했다. 지금부터 천천히 준비하면 얼추 시간에 맞춰 완성할 것 같았다.
첫인상을 잘 심어줘야 한다. 민선우, 12첩 반상 부럽지 않게 맛있는 음식을 해 주마! 나는 호기롭게 외쳤다. 물론 속으로.
하지만 이 결심이 무너지는 데에는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오늘은 액운이 낀 날인가 보다. 시큼한 냄새가 바닥에서부터 옷을 타고 올라와 콧속을 찔렀다. 손 안에서 미끄러진 식초병은 내 몸에 그 액체를 뿌리고 발등을 강타한 뒤 바닥에도 자비를 베푸셨다.
엉망이다. 그나마 바닥이야 내가 닦으면 그만인데 문제는 옷이다. 이걸 어떻게 하지? 식초라 물로 헹궈도 냄새 쩔 텐데. 아니, 그 전에 물로 헹굴 부위가 너무 넓어서 그냥 빠는 게 더 빠를 것 같다.
다행히 대기실에 딸려 있는 화장실에 샤워 시설도 구비되어 있으니 몸은 씻을 수 있지만, 갈아입을 옷이 없… 진 않을지도. 순간 옷 한 벌을 떠올렸다가 이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그냥 없는 걸로 치자. 그건 없는 거야. 그걸 옷이라고 정의하지 말자.
…근데 냄새가 진짜 장난 아닌데. 코가 점점 마비되는 것 같다. 젠장. 냄새 풍기는 것보단 변태가 낫겠지. 나는 막장을 향해 한발 나아갔다.
“진호… 씨…?”
민선우는 말했던 대로 내가 퇴근할 시간이 다 되어서야 귀가했다.
“아! 오셨어요?”
“지금… 뭐….”
“저녁 아직 안 드셨죠? 저기, 식탁에 다 차려 놨으니까 얼른 가서 먹어요.”
나는 당황한 듯 눈이 잔뜩 커진 민선우가 입을 열자마자 얼른 뒤로 가서 등을 밀었다. 무슨 말을 할지 뻔했기에 그 말을 하기 전에 다른 데로 신경을 돌리기 위한 발악이었다. 말할 틈을 줄까 보냐. 지금 내 상태가 이상해 보이는 건 내가 제일 잘 알거든? 그러니까 그냥 닥치고 가서 밥이나 좀 먹어라, 응?
나는 스스로를 혐오하게 되는 것이 두려워 옷을 갈아입은 후 몸을 비출 만한 건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 분명 최악이겠지. 다행히 털이 별로 없는 편이라 긴 양말과 치마 사이에 보이는 허벅지가 매끈매끈한 것이 최대의 위안이다.
하- 씨발. 이딴 걸 생각하고 있다는 것부터가 절망적이지만, 어쨌든. 나는 얼이 빠져 있는 민선우의 등을 밀어 식당으로 향했다. 자꾸 돌아보려는 놈의 고개를 친히 앞으로 고정 시켜 주며 겨우 도착한 식탁엔 이를 갈게 만드는 해파리냉채 새끼부터 가정식의 대표 요리 된장국을 비롯해 굴비, 각종 나물 무침 등으로 푸짐한 저녁상이 차려져 있었다. 자꾸 날 보려던 민선우 놈도 그걸 보더니 우와- 하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자식, 형이 솜씨 발휘 좀 했다! 나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 복장도 잊고 거만하게 팔짱을 꼈다. 민선우는 다행히 호화로운 식탁에 눈을 빼앗겨 눈치채지 못했지만 바로 내 상태를 자각한 나는 얼굴이 화끈해져 다시 팔을 다소곳이 내렸다.
“빨리 앉아 먹어 봐요. 맛은 장담 못해요.”
음식은 식어 가는데 멍하니 서 있는 놈을 재촉하면서 예의상 겸손한 말도 좀 해줬다. 그 말에 민선우는 정신을 차린 듯 의자를 빼고 앉아 수저를 들었다.
나는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우고 놈의 입에 들어가는 첫 숟갈과 젓갈을 주목했다. 이 복장을 하게 만든 망할 해파리냉채를 가장 먼저 집어 먹은 놈이 고개를 틀어 날 올려다봤다. 그 얼굴엔 환한 미소가 지어진 채였다.
“정말 맛있네요!”
해… 해냈다!
* * *
“이 시간 되면 생각나지 않아요?”
성스러운 저녁 시간에 밥맛 떨어지는 소리를 잘도 하는 저 입은 누구 입일까나. 한껏 째려보는데도 민선우는 하하하 하고 웃어넘긴다.
저놈이 얘기하는 건 지금으로부터 이 주 전, 이젠 저녁 식탁 단골 반찬이 된 빌어먹을 해파리냉채 때문에 입었던 메이드복 사건이다. 내 인생 최대의 수치로 남은 그 꼴이 어지간히도 인상 깊었는지 놈은 그날 이후 가끔 저런 망발을 한다.
처음 저녁을 차려 주고 며칠 뒤, 나와 민선우는 매일 저녁을 함께 먹는 사이가 되었다. 나의 타고난 음식 솜씨가 민선우의 혀를 사로잡은 덕분이다.
저녁 해 준다는 말에 부드럽게 거절하던 민선우를 떠올리며 나는 문득 매우 뿌듯해졌다. 자연스럽게 이런 사이로 발전하다니, 나에게 이런 사교성이 있는지 스스로도 몰랐었는데 새로운 재능을 발견한 기분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녁을 같이 먹는 이 시간이 매우 중요한 이유가 있었기에 더 뿌듯함을 느꼈다.
같은 집, 그것도 바로 옆방에 있어 마주칠 일이 많을 거란 예상과 달리 민선우와 실제 같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은 별로 없었다. 기본적으로 집에 잘 있지도 않고, 있어도 난 대기실에 있다가 필요할 때만 불려 가는 거라 대화할 일이 별로 없었던 것이다.
가끔 고양이 귀라든가, 방울 달린 목걸이, 양면테이프가 붙여진 꼬리 같은 황당한 물건들이 대기실 책상이나 탁자 위에 놓여 있을 때 득달같이 달려가 이 요상한 물건을 설마 하라는 것이냐는 걸 물어보는 것을 빼면 사적인 대화는 거의 없었다.
그래서 이 저녁 시간은 친밀감을 올리는 데 엄청, 엄청, 엄청-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마주 보고 이것저것 얘기를 주고받을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 거니까.
민선우는 밥 먹는 속도도 적당한 편이라 의외로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처음엔 음식을 먹으며 간이 어떤지, 다음에 먹고 싶은 음식이 있는지 등의 표면적인 대화만 나눴었지만 이 주가 지난 지금은 제법 깊은 이야기도 나눌 수 있게 됐다.
예를 들면,
“그러니까요! 형이 너무 무르게 나간 거라니까요?”
“그런가? 난 별로….”
“절 믿어요, 형. 제가 드라마 같은 데서 봤는데요, 그럴 땐 좀 더 이렇게! 이런 무서운 표정을 지으면서 독설을 해야 하는 거예요.”
이렇게 회사 부하 직원들 뒷담을 까기도 한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민선우는 웃어넘기기만 해서 그렇지.
그래도 이게 어디야! 아직 말도 완벽히 놓지 않은 놈의 벽은 첫날 느낀 대로 꽤 견고했다. 다정한 어투로 부드럽게 대화는 이어 가지만 뭔가 부족한 느낌이 자꾸 날 초조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괜히 더 많이 떠들고 바보 같은 행동을 하며 최대한 놈을 웃기려고 노력한 덕분에 이만큼 친해질 수 있었다.
자고로 재밌는 남자가 인기 있는 법. 아 정말, 나 왜 이렇게 천재니?
“또 흘렸습니다, 진호 씨.”
한참 생각에 빠져 있는데 민선우의 단호한 목소리가 들렸다. 생각하는 도중에 손에 힘이 조금 빠졌는지 젓가락으로 집고 있던 반찬이 떨어졌나 보다.
“…그런 거 일일이 말 안 해줘도 되거든요.”
민망한 마음에 정색하고 있는 민선우의 눈을 피하면서 조금 웅얼거리자 기다란 손가락에 잡힌 젓가락이 흘린 반찬을 집더니 입가로 다가왔다.
“자, 남기면 안 되죠.”
젠틀한 민선우는 의외로 깐깐해서, 예절이나 격식에 굉장히 엄했다. 내가 가끔 실수를 하면 가차 없이 지적하고 고쳐주는 걸 보고 뼈저리게 알 수 있었다.
출근 이튿날 민선우가 얘기했던 정식 복장이란 걸 볼 수 있었는데, 그건 개량 한복 같기도 하고, 마사지사 복 같기도 했다. 반팔의 검은 천 윗도리 옆에는 여밀 수 있는 끈이 달려 있고, 마찬가지로 검은 천 하의는 넉넉한 통의 긴 바지였다. 입어 봤을 때의 착용감은 말할 것도 없이 최고였다. 정말 활동하기 편하게 만든 옷이었다.
문제는 여밈 부분이 끈이라 손재주가 꽝인 난 매듭 또한 엉망으로 맬 수밖에 없단 것이었다. 하지만 쿨한 나는 당연히 신경 안 쓰고 대충 묶고 치웠다. 그리고 울리는 진동에 얼른 옆방으로 건너가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그런 날 보자마자 민선우의 인상이 확 찌푸려졌다.
‘왜 그러세요?’
내가 뭐 잘못했나 싶어 물으니 놈이 나에게 손을 까딱거렸다. 오라는 소린가 싶어 바로 앞까지 걸어가 섰더니 놈은 처음 들어보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매듭은 그렇게 짓는 게 아니야.’
목소리만큼이나 단호한 손길이 내가 대충 묶어둔 매듭을 풀었다. 안쪽에 있는 매듭까지 풀어 맨살이 훤히 들어났지만 워낙 진지한 표정으로 매듭짓는 법을 설명하고 있어 차마 태클을 걸지 못했다.
‘알았습니까?’
다시 존댓말로 돌아와 묻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안타깝게도 여전히 잘 모른다. 그래서 매일 저녁 같이 식사를 하는 것처럼 매일 아침 민선우가 직접 끈을 묶어 주는 게 일과가 됐다.
그 외에도 지금처럼 밥을 먹을 때 흘리면 직접 그 음식을 집어 먹여 주고 젓가락질을 다시 가르쳐 주는가 하면, 머리나 복장이 흐트러지면 불러서 정리해 주고, 가끔 나도 모르게 험한 말이 나갈 때마다 바른 말로 정정해주기도 했다.
“젓가락하고 숟가락 같이 드는 거 아니라고 했어.”
평상시 다정한 그도 그럴 때만은 꽤 엄해서, 반박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매번 잽싸게 지적에 따랐다.
부끄러워서 그런 것도 있지만, 그나마 웃으며 말해주는 처음과 달리 두 번째부턴 얼굴을 확 굳히고 반말로 얘기하기 때문이다. 말했던 실수를 다음에 똑같이 저지를 때도 마찬가지다.
물론 반발심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일주일 전 딱 한 번 대들기도 했었다.
다 큰 성인인데 옷 입을 때 매번 남의 도움을 받는다는 게 좀 그랬던 내가 대충 묶고 가서 이렇게 해도 큰 불편함은 없으니 그냥 이대로 하겠다, 라고 말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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