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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호 이야기-16화 (16/234)

16화

…이걸 입으라고 준 건가? 입으라고 준 거겠지? 그런데 왜 여성용을…. 잠깐, 착시 현상일 수도 있으니까 일단 입어볼까? 사실 그냥 간편한 복장이거나, 적어도 남성용 메이드복 아닐까?

후…. 그게 무슨 병신 같은 생각이냐, 김진호.

나는 고개를 저으며 내가 생각해도 어이없는 현실도피성 가설을 떨쳐냈다. 이 고급 원단과 레이스의 생생한 촉감이 착시 현상일 리가 없었다. 옷 자체는 누군가의 심혈을 기울인 작품인 듯, 심지어 안감도 매우 보드랍고 질이 좋아 보였다.

그러나 그건 디자인이 이 모양인 시점에서 진짜 좆도 상관없는 문제였다. 옷 아래가 뻥 뚫린 마당에 질 좋은 촉감, 편한 착용감 이딴 게 뭐가 중요해. 씨발, 신은 왜 나에게 이런 고난과 시련을 내리시는 거냐고!

“들어와요!”

후, 욕은 안 된다 김진호.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문고리를 잡았다.

“저기, 선배님.”

그리고 들어가자마자 녀석을 부르며 내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내밀었다.

“응? 그게 뭡니까?”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지금 이 옷은 뭐에 쓰라고 걸어 놓은 거니, 하고 묻고 싶어서 왔다고.

내가 들고 온 고난과 시련의 과제가 민선우에게도 의문 거리였는지 놈은 나를 한참동안 뚫어져라 쳐다봤다. 나는 차마 손도 대기 싫어 옷걸이 채 들고 온 옷을 그 눈앞에다 내팽개쳐 버릴까 심히 고민했지만 가까스로 감정을 내리눌렀다.

민선우는 돈, 아니 아니, 생명줄이다. 돈 주는 생명줄이다. 나는 심호흡을 하며 입을 열었다.

“…그걸 물어보려고 왔는데요.”

“풋! 설마-.”

“이거 진짜 입어요?”

“네?! 진호 씨, 그거 입으려고 했어요?”

나를 고난과 시련에 빠트린 사탄이 박장대소 했다. 눈물이 맺힐 정도로 웃겼는지 민선우는 다 웃고 난 다음엔 숨을 몰아쉬며 눈가를 훔쳤다. 나는 당최 이유를 모르겠어서 똥 씹은 표정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웃을 거 다 웃고, 숨 쉴 거 다 쉰 민선우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들었다.

“뭔가 착오가 있었나 보네요.”

민선우는 온화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 하하하하! 그럴 줄 알았어요. 진짜 입으라고 갖다 놨을 린 없겠죠.”

너무 태연한 반응에 오히려 따지려고 마음먹고 온 내가 당황해 버렸다. 나는 어색함에 일부러 더 크게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리고 그런 내 말에 민선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입고 왔으면 오히려 제가 당황했을 겁니다. 앞으로도 간혹 그런 착오가 생길 것 같으니 그럴 땐 저에게 먼저 물어봐 주세요.”

나는 아까 아주 잠깐이지만 이래서 시급이 5만 원인 건가, 눈 딱 감고 입어볼까, 하고 고민했던 것이 떠올랐다. 와, 입었으면 진짜 새 될 뻔했네.

“아, 네. 어? 그러고 보니 왜 다시 말 높이세요? 쭉 편하게 하셔도 되는데….”

그리고 민망한 마음에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냥 주제를 전환해버렸다. 그것마저 조금 어색하게 느껴졌는지 민선우가 눈을 조금 가늘게 뜬 채 가늠하듯 나를 빤히 보다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말이요? 아-, 그건 신경 쓰지 말아요. 제가 원래 기본적으로 존대를 하는 편이긴 한데, 가끔 편한 마음에 말이 짧아지기도 하거든요. 특별히 불편하신 게 아니라면 혼용해서 쓰겠습니다.”

그 말에 고용인에 후배인 내 입장에서 아 싫은데요, 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솔직히 쟤가 존대를 하든 반말을 하든 진짜 상관없기도 해서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거나 그 옷을 입을 순 없으니 오늘은 그냥 그대로 일하셔야 될 것 같은데, 괜찮습니까?”

애초에 유니폼이 있을 거란 말을 못 들었기에 적당히 더러워져도 되는 옷을 입고 와서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는 괜찮다는 말과 함께 다시 인사를 하고 방을 나왔다.

대기실로 돌아와 다시 옷을 걸어 놓는데 문득 이 집 남자만 구한다고 하지 않았나? 왜 이런 착오가 생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에이, 깊게 생각하지 말자. 누누이 말하지만 나는 고민하고 그러는 거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 일이 있은 후 얼마간을 대기실에서 빈둥대고 있는데 집사 할아버지가 말한 대로 벽 한 쪽에 붙어있던 빨간 램프가 진동과 함께 깜박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일이 시작되는구나, 라는 생각에 옆방으로 갔더니 어느새 회색의 세련된 정장을 입고 코트를 걸친 민선우가 있었다. 회사 출근 시간이라고 보기엔 늦은 시간이었던지라 좀 의아했지만 굳이 별말은 하지 않았다. 일이 있으니 나가는 거겠지.

“어떤 일 때문에 부르셨어요?”

민선우는 내 질문에 그제야 날 발견한 듯 준비를 잠시 멈추고 간단히 용건만 공지했다.

“진호 씨. 청소하실 때 제 책상은 절대 건드리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아까 보니까 이 방에서 청소할 데라곤 책상밖에 없는 것 같던데.

어쨌든 난 주인이 원하는 것이니 따로 토 달지 않고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가려는 민선우를 보다 짜 놨던 계획이 퍼뜩 떠올라 막 방 문고리를 잡은 그에게 급히 돌아오는 시간을 물었다.

놈은 왜 그런 걸 궁금해하나 하는 얼굴이었지만 저녁 준비 때문이라는 말에 곧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전 원래 저녁 식사가 불규칙하니 굳이 준비하실 필요 없어요. 진호 씨 퇴근 시간 전에 들어올지도 잘 모르겠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시간 되면 가시면 돼요.”

상대방을 배려하는 듯이 내뱉은 말은 놈과 나 사이의 선을 확실히 나타내 주었다. 내 성격대로 하자면 그냥 그런가 보다 하며 넘어갔겠지만, 난 지금 그 선을 타파하려는 거니까, 당연히 끈질기게 물어댔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대충이라도 알고 싶다, 저녁은 드셔야 되지 않겠냐, 불규칙적인 식사가 얼마나 몸에 안 좋은 줄 아느냐. 별소릴 다해 가며 나가려는 민선우를 붙잡으니 곤란한 표정을 짓던 놈은 결국 아마 진호 씨 퇴근 시간쯤에 올 겁니다, 라는 답을 내놨다.

나는 그제야 활짝 웃으며 놈에게 다녀오라고, 기다리고 있겠다며 인사를 했다. 오묘한 표정의 민선우는 그렇게 방을 나섰다.

짜식, 물어보면 그냥 대답이나 할 것이지 뭐 그리 사족이 긴지. 대학 때 소문으론 친해지기 쉬운 선배라고 하길래 좀 수월하겠다 했는데 의외로 민선우는 타인과 벽을 두는 타입인 거 같았다.

마음대로 굴어도 될까 하는 걱정이 잠시 들었지만 채예령이 했던 말을 믿고 저녁 식사로 집밥 재현해주기 미션을 이행하기로 했다. 학원 시간도 미뤄 놨겠다, 퇴근이 조금 늦어지는 것쯤이야 별거 아니었다.

저녁까진 아직 멀었으니 다른 일부터 해야겠다. 돈을 받는 일인데 제대로 안 하면 그건 착한 어른이 아니지! 나는 놀기만 해서 찌뿌드드한 몸을 좀 풀고 방 한구석에 놓여있는 빨래 바구니를 들어 올렸다. 우선 빨래부터 하고, 청소를 하기로 했다. 이상적인 가정식이란 건 도대체 뭘지 고민하면서.

정말 열심히 청소했다. 사실 건드리지 말라던 책상 빼곤 원체 깨끗했기에 성과가 보이지 않아 보람은 없었지만, 그래도 구석구석 열심히 했다.

쓸고 닦고, 그렇게 한참을 청소하다가 좀 쉬고 있을 때 문득 생각이나서 최태혁에게 메시지를 보내니 바로 답장이 날아왔다.

[혼자?]

메시지도 참 지 같이 보낸다.

[네, 혼잔데요.]

좀 퉁명스레 답장을 하니 곧 진동이 울렸다. 이번엔 전화였다.

“왜요?”

-무슨 일 없었나?

전화하자마자 하는 말이 저거라니. 날 무슨 물가에 내놓은 애라고 생각하는 건지 아침에도 저 질문으로 통화를 시작했다.

싫다는 건 아니다. 그냥 보호자한테도 못 들어본 말을 생판 모르던 사람이 하루 두 번이나 하고 있다는 게 좀 신기하고 어색할 뿐이다.

나는 보고할 만한 일이 있었나, 생각을 해 보다 입을 열었다.

“음-. 있었기는 한데, 별건 아니에요.”

-말해.

“그냥 혀가 좀 얼얼한 거 빼곤 괜찮아요.”

-…혀?

넘어져서 다친 것도 일이긴 하지, 하는 생각에 대충 말했는데, 뭐가 또 거슬렸나 보다. 혀라는 말에 갑자기 살벌해진 최태혁이 이유를 추궁했다.

말은 덤덤하게 했는데 이유를 설명하려니 쪽팔렸던 나는 계속 별거 아니라며 얼버무렸지만 역시나 그냥 넘어가 주질 않아 결국 다 불어 버렸다. 일 첫날이라 너무 긴장한 나머지 자기 발에 자기가 걸려 넘어져 혀를 씹었다고. 웃을 줄 알았던 최태혁은 설명이 다 끝날 때까지 조용했다.

혹시 참는 건가 싶어 웃어도 된다고 말했는데도 웃기는커녕 피가 얼마나 났는지, 살점이 떨어져 나갔는지 같은 것들을 물어댔다. 강한 남자가 모토인 나는 별거 아니다, 상처도 안 크고 피도 별로 안 났다, 하고 잘 대답했지만 놈의 아직도 많이 아프냐는 말엔 나도 모르게 아직도 좀 아프다고 말해버렸다.

조금은 위로 같은 걸 받고 싶었던 걸까? 답지 않은 행동에 얼굴이 달아오르는데 또다시 잔소리 폭탄이 투하됐다. 그러기에 왜 거기서 외간 남자한테 다가가려고 했냐는 짜증부터 덤벙대지 좀 말라는 질책까지. 내가 왜 아프단 소리를 지껄인 것인가 후회를 할 때쯤 최태혁이 한숨과 함께 마지막 마디를 내뱉었다.

-다치지 마라.

귓가를 간지럽히는 그 허스키한 저음에 반사적으로 그게 내 맘대로 되는 거냐는 불평을 하려 했지만 메이는 목을 어쩌지 못하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걱정이 배어 있는 타인의 목소리가 생소해서, 진심 어린 그 한마디가 왜인지 너무 아려 와서 나는 입술만 깨물어 댔다.

어색한 공기가 얼마간 흐르고, 나는 헛기침을 하며 청소를 해야 하니 이만 끊자고 했다. 최태혁은 좀 더 침묵을 지키더니 뒤늦게 알았다는 말과 동시에 전화를 끊었다. 묘하게 끝난 통화가 이상한 여운을 남겼다. 나는 다시 바닥을 닦기 시작했다.

청소와 빨래가 끝나고 다시 쉬는 시간. 오랜만에 컴퓨터도 해 보고, 낮잠도 자서 컨디션 최상의 상태였다. 나는 어제 파일에 있던 것을 옮겨 적은 종이쪽지를 꺼내 들고 3층 주방으로 향했다.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대타란 것이 정말 아쉬워지는 직장이다.

“어디 보자. 해파리냉채, 고사리 무침, 가지 조림….”

채식주의잔가? 왜 이렇게 풀을 좋아해? 고기 킬러인 나로서는 이해가 안 되는 식성이었지만 그래도 다 한 번쯤은 해 본 음식이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냉장고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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