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그래. 솔직히 말해 나는 대학 시절 아웃사이더였다. 학교 집, 학교 집만 왔다 갔다 했고, 채예령의 손에 이끌려 동아리 방에 갔을 때도 그냥 구석에서 조용히 졸거나 밀린 과제만 했다.
밤에 알바를 했기 때문에 낮엔 힘이 없었던 것도 이유긴 하지만 사실 나는 집단생활을 병적으로 싫어했다. 특히 채예령과 엮였을 땐 더욱더.
기본적으로 난 남들에게 그다지 호감을 주는 스타일이 아니다. 농담 같은 걸 잘 치지도 못하고, 유행도 모르고, 낯가림도 심한 편이라 섣불리 말도 잘 못 건다. 그래서 무리에 속할 때마다 나 혼자 그 주변을 헛도는 느낌을 받아와서, 정말로 싫어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나와 달리 채예령은 재미있는 농담도 곧잘 하고, 유행에도 꽤 민감하고, 낯가림이 없는 편이라 남들에게 스스럼없이 말도 잘 거는 성격 덕에 집단에 끼거나 무리로 뭉쳐 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거기에 미친 외모까지 받쳐주니 항상 어느 집단에서나 중심이 되어왔다.
그의 무리는 집단 중에서도 가장 화려하게 형성이 되고는 했고. 나는 채예령과는 친했지만 그 주변 사람들과는 친해질 자신이 없어 무리가 형성될만하면 슬쩍 빠져나왔었다. 근데 이 새끼는, 나랑 전생에 무슨 원수지간이기라도 했는지 싫다는 나를 저가 속한 그룹마다 굳이 데리고 들어갔다.
어렸을 때부터 유일하게 쭉 옆에 있어 줬던 친구에게 욕은 해도 모질게 거절하지는 못했던 나는, 늘 그 손에 이끌려 죽기보다 싫어하는 집단생활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교성 없는 내 성격 탓에 처음엔 내게 채예령을 봐서 잘해주던 사람들도 얼마 지나지 않아 점점 멀어졌다. 그 탓에 놈은 호의로 한 건지 몰라도 나는 오히려 더욱 지독한 소외감만 느끼게 될 뿐이었다.
언젠가 한 번은 그 소외감에 너무 힘이 들어 채예령에게 이제 이런 건 안 하고 싶다고, 오지랖 좀 그만 부리라고 화를 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채예령이 그랬다. 나는 널 위해서 그러는 거야. 남 탓하지 말고 네가 좀 더 노력해봐, 진호야. 그 말을 듣고 나는 그냥 설득을 포기해버리기로 했다.
물론 내 나름대로 노력을 안 해본 것도 아니다.
사정상 한가하게 TV를 보거나 인터넷을 할 수 없었던 나는 같이 알바하는 사람들에게 물어봐 유행도 알아보려고 노력했었고, 재미있는 농담 같은 것을 몇 가지 준비해 보기도 했었다.
그런데 도무지 그 낯가리는 성격이 고쳐지질 않아 말을 걸려고 해도 자꾸 버벅대거나 그냥 입속에서만 말이 맴돌아 버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겨우 말을 걸 수 있을 만큼 적응이 된 상대들은 이미 나를 재미없고 건방져서 별로 친해지고 싶지 않은 놈으로 인식해버린 후라 다가가기 어려웠다.
같은 공간에 있어도 누군가가 옆 사람을 보고 말을 했는데 어쩌다 내가 있을 때라거나, 꼭 필요한 걸 물어야 할 때를 제외하곤 제대로 된 대화는 한마디도 못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남들이 웃을 때 웃음소리만 보태주는 리액션 기계 같은, 존재감 없는 사람. 나는 딱 그런 존재였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스키동아리 땐 한 방에 많은 수도 아니고 딸랑 일곱이 있었는데, 설마 말 한마디 안 해 봤겠냐고! 민선우와도 분명히 안면을 트고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저, 처음은 아닌데요. 선배님.”
나는 짜증이 나서 찌푸려지는 것을 가리기 위해 미간을 긁으며 멋쩍은 듯이 말했다. 내 말에 민선우의 눈이 조금 커졌다.
“네? 아! 학교 동문인가? 대학 후배예요?”
와, 진짜 하나도 기억 안 나나 보네, 저 녀석.
“아니, 그, 큼! 같은 과는 아니구요…. 같은 동아리요.”
대학 후배인 것조차 기억 못 하는데 이렇게 말한다고 기억해줄 것 같지는 않았지만 일단 말해봤다. 그러자 역시 기억이 안 나는지 민선우가 얼굴에 곤란함을 내비쳤다.
“동아리? …어….”
백번 양보해서 보자마자 떠올리지는 못하더라도 이 정도 설명했으면 어렴풋이라도 기억해 내야 하는 거 아닌가? 민선우나 최태혁이나, 머리도 좋은 것들이 이렇게까지 기억을 못 한다는 건 일부러 삭제했다고 봐도 되는 거지? 아, 진짜 짜증 나.
나는 머리를 짚으며 그냥 그러려니 해야 하나, 아니면 지금까지 나를 기억 못 하던 사람들에게 나를 기억해 내게 만들었던 필살기를 써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하…. 이걸 듣고 기억난다 그러면 더 짜증 날 거 같긴 한데….
“…예령이 친구요.”
“…아! 오랜만이네요. 잘 지냈나요?”
와, 진짜 나는 채예령 옆에 붙어있던 형체 1, 뭐 그런 거였나 보다. 나는 민선우의 이제야 알겠다는 듯한 표정에 인상을 찌푸릴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아내고 겨우 입꼬리를 올렸다.
“하하-. 저야 뭐 잘 지냈죠.”
“와-. 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
우연이라기엔 나는 이미 알고 들어온 거지만, 솔직히 얘기할 수는 없으니 웃는 얼굴 그대로 머리를 긁적였다.
“예, 저도 방금 깜짝 놀…!”
그러면서 너무 문앞에서 얘기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에 조심스레 문을 닫고 민선우 곁으로 좀 더 다가가려는데, 바보같이 내 발에 내가 걸려 넘어져 버렸다.
“이런, 괜찮습니까?”
“읏…. 아파….”
진짜 바보 같다. 나도 모르게 긴장하고 있었는지 제대로 꼬인 발 때문에 요란하게 넘어져 바닥에 턱을 찧었다. 나는 아픈 게 제일 싫은데…. 다른 건 다 몰라도 아픈 건 진짜 싫은데. 혀도 씹어버린 듯 입안에서 피 맛이 났다.
막을 새도 없이 눈물이 흐르는 게 느껴졌지만 통증이 너무 강해 멈출 수가 없었다. 그래도 자존심은 지켜야겠기에 얼른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더니 턱 밑으로 크고 하얀 손이 쑥 들어 왔다.
살며시 턱을 들어 올리는 힘에 시선을 올리니, 바로 눈앞에 부드러운 갈색 눈이 자리 잡고 있었다.
“많이 다쳤나요? 입 좀 벌려 봐요.”
“괜찮-.”
“이런, 피가 나는군요. 혀 내밀어 보세요.”
“아니, 진짜 괜찮-.”
“어서요.”
최태혁이나 민선우나 내 말은 똥구멍으로 듣는 것이 분명하다. 사람이 괜찮댔음 괜찮은 거지, 쪽팔리게 뭘 그리 보려 드는지 모르겠다.
정말 내주기 싫었지만 표정이 너무 단호해서 천천히 혀를 내밀었다. 내 꼴이 지금 얼마나 추할까? 눈물은 줄줄 흐르지, 쪽팔림에 얼굴은 벌게졌지, 이쁘지도 않은 사내새끼가 혀나 내밀고 있지.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다.
“아! 아하요!”
갑자기 혀를 꾹 누르는 놈 때문에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기껏 혀 내밀어 보여주니까 상처를 공격하다니, 무서운 놈이었다.
“피나는 부분이 여긴가 해서요. 잠시만요, 약 가지고 올게요.”
민선우는 제 손에 묻어 엷어진 피를 슬쩍 보고 미안하다는 사과를 해왔다. 나는 입을 얼른 다물고 조용히 고개를 돌려 그의 시야에서 얼굴을 숨겼다.
으씨, 더 아픈 거 같잖아. 나는 민선우가 약을 가지고 온다며 자리를 뜬 새 혀를 내밀어 직접 살살 쓸어봤다. 생각보다 제법 피가 묻어 나왔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스스로가 한심해 의기소침해져 있는데 등 뒤로 민선우의 기척이 느껴졌다. 구급상자라도 가져온 건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커다란 손이 내 턱을 잡아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눈앞으로 들이 밀어진 하얀색 병. 잠깐, 근데 이거….
“싫어요! 싫어! 저리 치워요, 얼른!”
아니, 이 자식이 어디다 소독약을 갖다 대. 미쳤나 봐! 누가 입안 상처에 소독약을 들이부어!
나는 얼른 뒷걸음질 쳐 민선우와의 거리를 벌렸다. 의아한 표정을 짓는 놈의 왼손엔 하얗고 작은 병이 꼭 쥐어져 있다. 상처의 종류를 막론하고 고통을 배로 늘려주는 약 따위는 바를 생각이 없던 나는 격하게 손가락질하며 내려놓으라고 소리쳤다. 입속 상처엔 그런 거 바르는 거 아니라고 하니 놈은 고개를 끄덕이며 병을 상자에 집어넣었다.
다시 구급상자를 뒤적거리던 놈은 아! 소리와 함께 갈색 병을 집어 들었다.
“이건 입안 상처 전용이라는데요.”
“도, 돌려봐요. 이름, 약 이름이 뭔데요?”
“잠깐만요.”
병을 꼭 쥐고 있던 손을 조금 펴서, 이름이 적힌 쪽으로 빙글 돌리는 녀석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놈은 고개를 들고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알보칠.”
씨발, 저 새낀 사탄인가. 민선우는 일그러지는 내 표정을 보고 지나가듯 가볍게 물었다.
“아픈 거 싫어하나 봐?”
“에…”
“아, 말하기 힘들겠구나. 잠시만.”
질려서 아무 말 못하는 사이 생글생글 웃으며 알보칠을 들고 다가오는 녀석은 악마 그 자체였다.
나는 다급히 놈을 멈춰 세우고, 그 약도 깨물어 생긴 상처에 쓰는 약이 아니라고 설명하며 다시 찾아보라고 필사적으로 몸짓했다. 다행히 다시 가져온 약은 오라메디여서, 나는 민선우 곁으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내가 바른다고 해도 한사코 저가 발라 주겠다며 혀만 내밀라는 녀석에게 결국 불안감을 한가득 안고 혀를 내미니 놈은 피가 멈출 때까지 손수건을 대고 있다가 약을 발랐다. 그 동안에도 쓰라림은 멈추지 않아 내 얼굴은 줄곧 울상이었다.
“아픈 거 싫어해?”
놈은 약을 바르며 웃음기 서린 얼굴로 재차 물었다. 어느새 말이 짧아져 있었지만 어차피 민선우가 나이도 더 많으니 크게 개의치 않았다.
“아흥거 오아하응 오이 어이어요.”
“흐음-. 아픈 거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
말하면서도 과연 전해질까 했는데 신기하게도 놈은 기가 막히게 잘 알아들었다. 문맥을 잘 파악하는 건가. 그나저나 아픈 걸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니.
“그겅 벙태죠.”
“하하하- 그런가.”
이걸 알아듣고 답한다고? 나는 민선우의 대단한 해석 능력에 진심으로 감탄했다.
놈은 그런 내 눈빛에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한번 들썩였다. 미국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리액션이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리는 게, 어디서 외국 물 좀 먹었었나 보다.
나는 그렇게 외계인 언어로 몇 마디 더 대화하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하러 왔는데 농땡이만 부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어디 가?”
대화하다 갑자기 일어서는 내가 이상했는지 놈이 물었다.
이제 옆방에 가 있으려고요. 필요한 거 있으시면 부르세요. 뜻은 이랬지만 말은 또 외계어처럼 나갔다. 다행히 놈은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면서 일어나 아까 앉아 있던 의자에 가 앉았다.
“아! 대기실에 정식 복장이 있어. 그걸로 갈아입어.”
고개를 끄덕이고 대기실로 들어왔더니 정말 옷이 한 벌 옷걸이에 걸려 있었다.
“…….”
여성용 메이드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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