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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호 이야기-9화 (9/234)

9화

학원이라. 태혁은 예령의 도움을 반기지 않는 듯하던 진호의 모습을 떠올리며 턱을 쓸었다. 그럴싸한 변명을 갖다 붙이긴 했으나, 며칠 새 180도 바뀐 태도를 완전히 이해시킬 수는 없었다.

태혁은 예령에게 모자란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 마음도 마음이지만, 안 그래도 집에 붙어 있는 시간이 적은 진호가 더더욱 밖으로 나돌 것이라는 생각을 하자마자 짜증을 느꼈다. 평소라면 이 정도 시점에서 알아서 굽혀 들어오던 진호도 이번만큼은 질 수 없다는 듯이 고집스레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태혁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 상황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이번만큼은 져주기로 했다. 예령과 시간을 보내는 게 마냥 싫지만은 않은 데다, 확실히 진호도 취직 같은 걸 고민해야 할 때이긴 했으니까. 그래도 진호가 하루 종일 밖에만 있는 꼴은 싫어서 기어코 독서실을 포기시켰다. 그러자 금방 고개를 끄덕이기에, 최태혁은 진호가 더 이상 고집부리지 않고 제 말을 듣는 게 귀엽다고 생각했다.

진호가 잠든 새벽. 침대에 기대앉은 태혁은 자신의 다리를 꼭 끌어안고 누워 있는 진호를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겨있었다.

현재 그는 진호가 없는 시간을 틈타 의사에게 꾸준히 치료를 받은 덕에 상처는 거의 다 아물었고, 마비도 거의 다 풀린 상태였다. 거기다 배신한 원로들의 약점을 손에 쥐고 그를 해치려고 했던 놈들까지 잡아 놓았다. 즉, 그는 이제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다는 말이었다.

원래 같았으면 그 사실에 개운한 마음이 들어야 할 텐데, 태혁은 오히려 깊은 고민에 빠졌다. 예령과 관련된 것 이외에 어떤 것에도 미련을 가진 적이 없던 그가 지금 이 생활이 끝나는 것에 대해 아쉬움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스스로도 이해가 가지 않는 감정을 분석하려고 노력하는데, 색색거리며 자고 있던 진호가 그의 다리 위로 허벅지를 턱 올리며 더욱 밀착해왔다.

“태평하군.”

태혁은 자신과 달리 잘만 자는 진호가 순간 얄미웠다. 그래서 오랜만에 진호의 몸을 다리에서 떼어 멀리 떨어트려 놓았다. 그랬더니 가만있던 녀석이 조금씩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아냐, 아니야…. 살려주… 세요…. 나도….”

가늘게 흐느끼며 멀어진 온기를 찾아 허우적대는 팔이 필사적이다. 잠꼬대인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어눌하고 뭉개진 발음은 언제나와 같이 버리지 말라, 살려 달라 말하고 있었다. 태혁은 심술을 부린 것임에도 그 모습이 안쓰러웠다. 잠시 지켜보던 그는 손을 들어 진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몸을 눕혔다.

“쉬이…. 울지마라, 똥강아지.”

동그란 머리를 들어 아래에 팔을 받쳐주고, 온기를 찾는 녀석을 끌어당겨 마주 안아 주었다. 진호는 어엿한 성인 남자였지만, 체격이 평균치를 훌쩍 웃도는 태혁에겐 무리 없이 쏙 안겨 들어갔다. 안정감 있게 안긴 진호는 거짓말처럼 눈물을 그치고 훌쩍대기 시작했다. 태혁은 그런 그의 허리께를 쓸어내리며 조용히 웃었다. 귀여운 녀석.

그렇게 중얼거리며 눈을 감는데, 그대로 잠들 것 같던 진호의 입에서 그의 이름이 나왔다.

“태혁….”

태혁은 눈을 뜨고 진호를 내려다봤다.

그의 팔을 베고 있던 진호와 이마가 맞닿았다. 가까워. 태혁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고개를 물릴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까진 진호를 상대로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충동을 느꼈다.

이상했다. 태혁 자신이 바이이긴 해도, 평소 진호 같은 건장한 남성보다는, 예령 같은 느낌의 여리여리한 쪽에게 끌리던 편이었다.

똥강아지라 그런가? 이제껏 태혁에게 애완동물처럼 옆에 두고 키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사람은 진호가 유일했다. 그것은 취향을 초월할 정도의 매력이긴 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태혁은 선뜻 진호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정의 내릴 수 없었다. 호감인 것은 분명하나, 애정이라기엔 애매한 감정이었다.

태혁이 혼란에 빠지려고 할 즈음, 진호가 다시 한번 그를 불렀다.

“혀엉…. 나도….”

중얼거리며 매달리듯 붙어오는 부드러운 몸에 태혁은 그 순간 뇌가 정지되는 것을 느끼며 홀리듯 진호의 입술을 머금었다. 웅얼거리던 진호의 입술은 벌려져 있었기에 태혁은 조금 거친 입술과 함께 부드러운 속살까지 한 번에 느낄 수 있었다.

“으응…. 읏….”

태혁은 무방비하게 벌어진 입안으로 혀를 집어넣었다. 조심스레 입천장을 쓸고 잇몸을 간질이던 그는 얌전히 있던 진호의 혀와 닿자마자 밑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조금 더 밀착한 후 부드러운 혀를 빨아들였다. 그만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진호의 입안은 부드럽고, 뜨거웠다. 잠결에도 간간이 신음을 흘리면서 몰아붙이는 태혁의 입술에 숨이 막히는지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으로 애써 가슴팍을 밀어내는 행동은 그를 더욱 자극했다.

한참 방 안을 가득 메운 질척거리는 소리는 계속되는 자극에 참지 못한 진호가 고개를 돌려버리고 나서야 끝이 났다. 그리고 태혁은 그런 진호를 다시 한번 품 안에 가두고 칭얼거리는 진호의 엉덩이께를 토닥이며 씨익 웃었다. 앞으로의 저녁이 기대됐기 때문이었다.

태혁이 예령과 저녁을 함께 한 지 벌써 삼 일째. 그는 이상하게 진호와 있을 때처럼 편히 있을 수 없었다. 거기다 오랜만에 찾아온 조용한 식사 시간은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 몇 주가 뭐라고, 태혁은 유난히 크게 느껴지는 식기 소리가 거슬려 결국 젓가락을 내려놓고 앞에 앉은 예령에게 눈을 돌렸다.

쉴새 없이 떠드는 진호와는 다르게 예령은 그를 배려하듯 가끔 몇 마디 할 뿐 대부분 조용히 식사를 하는 편이었다. 그리고 식사를 마친 후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이런저런 주제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렇게 대화를 하다 보면 어느새 예령이 갈 시간이 다가왔다.

이 패턴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러나 좋지도 않았다. 오히려….

생각을 이어가던 태혁은 시선을 느꼈는지 자신과 눈을 마주치고 살포시 웃는 예령에게 마주 웃어주며 잠시 떠오른 말도 안 되는 생각을 떨쳐냈다.

진호와의 시끌벅적한 저녁 쪽이 더 좋았다니. 그냥 이 정적이 어색하고 긴장되는 나머지 든 생각일 것이다. 진짜 그럴 리가 없었다. 최태혁은 고개를 저으며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 예령이 식사를 멈춘 그에게 입맛에 맞지 않는 거냐며 걱정 어린 말투로 물어왔기 때문이었다.

예령이 돌아가고 난 뒤 태혁은 진호를 기다리며 운동을 했다. 하지만 몸만 움직이고 있을 뿐, 그의 머릿속은 온통 진호와의 키스로 가득 차 있었다. 진호에게 키스한 밤 이후 늘 그랬다. 태혁 스스로도 마치 키스를 처음 해본 사춘기 소년처럼 이러고 있는 자신이 어이가 없었지만, 떨쳐버리려고 할수록 더 집요하게 생각났다.

입천장이 약한 것 같던데, 오늘은 좀 더 괴롭혀봐야겠다. 잠결에 그 정도니까 깨어 있을 때의 반응은 더 귀엽겠지. 조직으로 돌아갈 때 데려가는 것도 나쁘진 않겠어. 일은 시키지 말고 옆에 붙여놔야겠다. 그리고 그만해달라고 할 때까지 키스를 하다가…. 태혁은 속으로 그런 생각들을 이어가면서 몇 개째인지 모를 팔굽혀 펴기를 했다.

* * *

이상하다. 요즘 아침에 일어나면 입술이 얼얼하고 빨갛다. 자면서 짓이기는 습관이 생겼나. 혹시나 해서 최태혁에게 밤에 내가 잠꼬대를 심하게 하냐고 물어봤더니 고개를 저었다.

뭐지? 고개를 저은 뒤에 미묘하게 올라간 것 같은 입꼬리가 기분을 찜찜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것저것 신경 쓰는 걸 별로 선호하지 않는 나는 아니라고 고개까지 젓는데 별일이야 있었겠어, 하고 넘겼다. 그것이 문제였다.

“어… 어떡하지?”

큰일 났다. 이 나이에 야한 꿈을 꾼 것도 쪽팔려 미치겠는데 일어나 보니… 서 있다. 매일 아침 있는 일이 아니라, 이건 진짜 선 거다.

혼자였으면 욕하면서 화장실에 갔겠지만 지금 내 옆엔 최태혁 놈이 곤히 자고 있었다. 화장실을 가려면 이놈을 넘어가야 하는데, 평소라면 몰라도 지금 내 몸은 너무 예민해져 있는 상태였다.

넘어가다가 스쳐서 신음이라도 내면…. 이상한 소리 낸다고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 일어났는데 멀쩡한 사내새끼가 팬티를 적신 채 내 몸에 다리 하나를 걸쳐두고 이상한 소리를 내고 있다면 나라도 죽도록 패고 싶을 거다.

일단 침착하자 김진호.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최태혁이 자고 있을 때 건너가서 재빨리 화장실에 가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 그러니까 얘 깨기 전에 얼른….

“깼나?”

…잣 됐다. 최태혁에게 등을 돌린 채 최대한 웅크리고 있던 상태 그대로 굳어버렸다. 최근 들어 이상하게 말이 많아진 놈이 그 감미로운 목소리로 나에게 아는 체를 해왔다. 으악! 귓가에 속삭이지 마! 간질간질거려서 느낌 이상하다고!

“아…, 네. 근데 더 자려고요!”

“음?”

“으으음, 졸리다. 음냐음냐….”

내 딴에는 나름 상황을 타파해보겠다고 이리저리 머리 굴려서 한 말이었는데, 스스로 생각해도 실소가 나올 만큼 어설픈 연기가 튀어나왔다. 수능에 처세술이 없어서 다행이었네. 그랬으면 나 대학도 못 갔을…. 아니, 지금 현실도피 할 때가 아니지.

나는 창피해 미칠 것 같은 나머지 탈출하려는 멘탈을 가까스로 부여잡았다. 어설프든 말든 일단 내가 졸려서 잔다는데 지가 뭐 어쩔 거야. 이렇게 좀 있다 보면 거기도 가라앉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최대한 빨리 가라앉히기 위해 속으로 애국가나 부르려는데 웅크린 내 등 뒤로 녀석의 온기가 느껴졌다.

순간 내 머릿속에서 비상벨이 울렸다. 나는 당황해서 눈을 뜰 뻔한 것을 가까스로 참아내며 그 온기에서 멀어지기 위해 더욱 몸을 말았다. 나 잔다. 나 잔다고. 이건 잠꼬대니까 신경 쓰지 말고 가라고, 좀!

“어디 안 좋은가?”

“예?”

자는 척을 하던 것이 무색하게 녀석이 말을 걸자마자 나도 모르게 답해버렸다. 나는 멍청이야. 아주 구제할 수 없는 멍청이야, 나는.

“아니, 폼이….”

“아…. 아, 예! 지금 배가 좀 아파서. 괜찮으니까 형 볼일 보세요!”

자는 척은 물 건너간 것 같아서 노선을 변경했다. 나는 또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이대로 쟤가 신경을 꺼주면 땡큐 베리 감사고, 만약에 계속 걱정해준다 싶으면 가서 약 좀 가져달라고 해서 내보낸 다음에, 그 사이에 화장실로 도망쳐야겠다. 좋아, 완벽해!

“배라…. 똑바로 누워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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