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진호는 시끄럽다.
3주가 다 되어가는 시간 동안 태혁이 가장 많이 한 생각이다. 그는 진호처럼 제 앞에서 끊임없이 떠들고 중얼대는 놈은 처음 보았다.
태혁은 조금 특이한 가정 환경에서 자랐다. 양보보단 쟁탈을 먼저, 예절을 차리기보단 지시하는 법을 먼저 배웠다. 그래서 그는 남들이 얘기하는 어린이다운 어린 시절은 보내본 적이 없었다. 물론 그 스스로도 그것을 갈망하거나 하지도 않았다. 운이 좋게도 그런 양육 방식이 체질에 맞았던 것이다.
그렇게 태혁은 한 조직의 장자로서 부족함 없이 성장했다. 그런데 너무 부족함이 없었던 것이 탈이었을까. 고개를 숙이는 척 밑에 들어와 욕심을 숨기고 있던 몇몇 원로들의 심기를 건드린 탓에 귀찮은 일이 발생했다.
본래라면 절대 걸릴 리 없던 함정이었는데 태혁의 유일한 약점을 알아낸 원로들이 그걸 이용해 그를 공격했다. 그가 처음으로 마음에 담았지만 차마 다가가지 못하고 있던 이에게 해코지를 가하기 위해 사람을 보냈던 것이다.
다행히 태혁은 그들을 도중에 저지할 수 있었지만 급한 마음에 조직원을 몇 명 데리고 가지 못했고, 결국 수에 밀려 칼까지 맞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오랜만에 상처다운 상처를 입은 태혁은 필사적으로 그들을 따돌린 후 어느 골목에서 밀려오는 어지럼증을 이기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 그로서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끼는 온전한 무기력감이었다.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건 하얀 벽지였다. 그는 순간 병원인가 생각했지만, 특유의 냄새가 나지 않아 재빨리 몸에 힘을 줬다. 이상하게 가눠지지 않고 제대로 컨트롤이 되지 않는 몸 때문에 일어나 앉는 데만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등은 땀으로 축축하게 젖었다.
태혁은 칼에 맞는다고 이렇게 되진 않는다는 걸 이미 경험으로 알았다. 거기다 대충 봐도 그저 표면을 긁혔을 뿐인 상처였다. 무언가 약을 썼다는 확신이 들자마자 나지막이 욕을 내뱉은 그는 일단 주위를 둘러봤다. 다행히 그의 손과 발은 묶여있지 않았고, 눈에 보이는 곳 어디에도 고문 기구나 무기 또한 보이지 않았다. 자세히 뜯어볼수록 그저 평범한 가정집 방 안 같았다.
태혁은 순간 웃는 게 예뻤던 사람, 예령을 떠올렸다. 마지막 기억 속 장소가 아마도 그의 집 근처였던 것 같으니, 우연히 태혁을 발견한 예령이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준 건 아닐까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태혁의 기대는 곧 무너졌다. 지척에서 들리는 숨소리에 상체를 기울인 태혁의 눈에 보인 것은 침대 바로 옆 바닥에 누워 잠든,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평범한 남자의 얼굴이었다.
“후배 김진호잖아요!”
요란하게 일어난 놈은 민망한 듯 웃으며 자기소개를 했다. 김진호. 그 말에 태혁은 기억을 더듬었지만, 영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그 동아리라면, 우리가 모르는 사람을 뽑았을 리가 없는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잠긴 목이 껄끄러워 말은 하지 않고 쳐다보기만 하니 곧 수긍할만한 대답을 해왔다.
예령. 방심이라곤 해본 적 없는 그를 항상 방심하게 만드는 그의 친구. 태혁은 그제야 예령이 동아리에 친구를 한 명 데리고 들어왔던 것이 기억이 났다.
그게 이놈이었군.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처음 본 것 같을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빤히 쳐다보자 진호는 잠깐 울 것 같은 표정을 짓다 다시 웃었다. 그리고 방에서 나가 쟁반에 뭘 받치고 들어오더니, 본인이 직접 만든 죽이라며 숟가락으로 떠서 그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태혁은 순간 드는 거부감에 힘을 들여 말을 꺼냈지만, 목이 메고 혀가 잘 움직이지 않아 말이 느리게 나갔다.
진호는 속도가 느린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에게 먹기를 종용했다. 주제에 웃기지도 않은 화난 표정까지 지어가며. 태혁은 힘껏 찌푸린 인상이 투정으로밖에 보이지 않아서 어쩐지 귀엽게 느껴진다는 이상한 생각을 하며 조용히 입을 벌렸다.
음식은 맛있었고, 양도 그럭저럭 찼다. 주절거리는 것이 좀 시끄럽긴 했지만 참을 만했다. 그는 약간의 고민 끝에 몸에 힘이 돌아올 때까지 여기서 지내기로 결정했다.
태혁이 진호의 집에서 지내게 된 지 2주가 좀 지났다. 그는 굳어진 생활 패턴 대로 새벽에 일찍 일어나 몸을 풀고, 진호가 깨어날 시간 즈음해서 다시 누웠다. 그럼 진호는 곧 일어나 눈을 감고 있는 태혁을 깨워 씻는 것을 도와주고, 밥을 했다.
귀찮을 법도 한데 그는 매일 새로운 반찬이나 국을 내왔다. 까다로운 태혁의 입맛에도 요리는 하나 같이 다 맛있었다. 식사를 마치면 진호는 일을 하러 나가고, 태혁은 다시 운동을 하며 조직원들과 연락을 취했다. 위치가 발각될 위험을 줄이기 위해 의사에게만 그가 있는 곳을 알려 방문하도록 하며, 모든 일을 전화로 처리했다. 그리고 그렇게 일을 처리하다 진호가 들어올 시간 즈음엔 정리하고 다시 누워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진호는 자기가 없는 동안 혹여나 아파서 거동이 불편한 그가 힘들었을까 봐 걱정하며, 얼른 씻고 옆으로 와 마사지를 빙자한 주물거리기를 시작했다. 솔직히 태혁은 몸이 풀리기보단 단지 조물거리는 손길과 조잘거리는 목소리가 나쁘지 않아서 놔두는 것이었으나, 진호는 하루가 다르게 나아지는 태혁의 상태가 마치 자신의 마사지 덕분인 것처럼 매번 뿌듯해하며 귀엽게 웃었다.
특별날 것 없는 남자가 귀여워 보이다니. 태혁은 투여된 약에 정신을 흐트러트리는 성분도 있는 것인지 의사에게 확인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으응…. 따뜻해…. 헤헤….”
태혁이 불편할까 봐 걱정된다며 항상 조금 떨어져 눕는 진호는 늘 잠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있는 쪽으로 슬금슬금 굴러왔다. 그리곤 딱 붙어서 팔을 끌어안기도 하고, 그의 허벅지 위에 제 다리를 올려놓기도 했다.
그런 진호를 태혁은 가만히 놔두었다. 처음 몇 번은 불쾌해서 떨어트렸는데, 그럴 때마다 악몽이라도 꾸는지 울면서 버리지 말아달라, 살려달라 웅얼거리는 것을 봤기 때문이었다.
어찌 됐건 녀석 덕분에 편한 생활을 하는 데다, 밥이니 마사지니 여러모로 신경 써주는 것을 알고 있으니 이 정도 불편함은 감수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함께 생활하면서 태혁은 진호의 특이한 점을 하나 발견했다. 바로 끊임없이 무어라 말하거나 중얼거리는 습관이었다. 본인은 속으로 생각한다고 생각하는 거 같던데, 확실히 드문드문 입 밖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생글생글 웃으며 얘기하다가도 입술을 삐쭉대며 말 진짜 없다느니, 입이 아프다느니 불평을 하는 모습이 재밌어, 태혁은 굳이 그 점을 지적하지 않았다. 하여간 보고 있으면 정신 사나운 놈이었다.
그렇게 같이 지내다 보니 처음엔 평범하기만 했던 녀석이 정말로 조금씩 귀여워 보이기 시작했다. 팔이 아프다고 투덜거리면서도 끝까지 밥시중을 드는 거라던가, 말을 할 땐 그의 눈치를 살살 봐오는 거라든가. 태혁은 진호의 모습이 옆에 붙어 있고 싶어 낑낑거리며 주변을 맴도는, 사랑받고 싶어 하는 동물 같다고 생각했다. 그가 보기에 진호는 동물로 치면 갯과, 그것도 길거리에서 커서 버릇이 없지만 애정에 굶주린 똥개가 분명했다.
너무 과묵한 거 아니냐고 툴툴대면서 토라진 체하다가도 짧게 한마디 해주면 활짝 웃으며 언제 토라졌다는 듯이 조잘거리고, 어쩌다 한 번 웃어주면 큰 선물이라도 받은 것처럼 기뻐하는 녀석의 모습 뒤로 정신없이 흔들리는 꼬리가 보일 지경이었다. 최태혁은 자신이 어느 순간 김진호라는 똥강아지의 주인이 된 것 같다 생각했다.
* * *
“그래서, 선배가 진호네 집에 계시게 된 거라구요?”
그러던 어느 날 예령이 찾아왔다. 잠시 당황하던 태혁은 두 사람이 바로 옆집에 살아 굉장히 친하다던 똥강아지의 말을 떠올렸다.
정기적으로 의사가 방문하여 진료를 했음에도, 칼에 묻어있던 마비약의 효과가 아직 남아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태혁은 손가락 같은 말단의 신경은 아직 컨트롤이 서툴렀다. 예령에게 이런 한심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도 밝게 웃으며 말을 걸어오는 그를 무시하기 싫었기에 잠긴 목을 풀고 답했다.
그런데 그러자마자 진호가 시무룩한 얼굴을 하더니 태혁이 길게 말한 것에 대한 불만을 꿍얼꿍얼 늘어놓았다. 눈가에 눈물까지 달고선 심통 맞은 표정으로 입을 삐쭉대는 녀석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태혁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렸다. 귀엽기는. 머리라도 쓰다듬어줄까 했지만, 그 모습이 귀여웠던 태혁은 부러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잔뜩 풀이 죽어 분명치 못한 발음으로 천천히 설명을 시작한 진호 덕에 예령이 사건의 전말을 이해하기까지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말을 마친 후 상황을 이해한 예령은 태혁과 진호를 돕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자신의 온전하지 못한 모습을 보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 자체가 달갑지 않은데, 심지어 그게 예령인 것은 더욱이 싫었던 태혁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거절의 의사를 비쳤다. 그리고 왜인지는 몰라도 진호 또한 길길이 날뛰며 호의을 거절한 덕에 몇 번이고 권하던 예령은 머쓱한 마음으로 제안을 물렀다.
“그래, 알았어! 전해 줄 것도 전해줬겠다, 그럼 난 이만 가볼게.”
예령은 금방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태혁은 오랜만에 보는 예령과 더 같이 있고 싶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잡지 못했다. 아쉬운 마음에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어 답을 하는 그의 시야에 옆에 얌전히 앉아 있던 진호가 같이 일어서는 것이 걸렸다.
태혁은 순간 확 치솟는 이유 모를 불쾌감을 누르지 못하고 같이 따라나서며 행선지를 물었다. 그러나 대답은 엉뚱한 곳에서 들렸다.
태혁은 예령을 무안하게 하긴 싫었지만, 저한테 하는 소린 줄도 모르고 자리를 뜨는 진호를 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다급히 진호의 팔부터 낚아챘다. 다행히 진호는 이 밤에 어딜 나가냐고 다그치지 않아도 알아서 눈치 있게 행동했기에 태혁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예령을 배웅할 수 있었다.
그리고 며칠 뒤, 태혁은 진호의 별것 아닌 변덕에 또 한 번 이유 모를 불쾌감을 느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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