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괜찮다고 몇 번을 말해야 하는 거야. 갑자기 이러다 지금까지의 나의 수고가 허사로 돌아갈 것만 같은 초조함이 몰려왔다. 하…. 짜증 나. 좀 더 강하게 말해야 겠….
“한 명만으로 충분하다.”
…내가 말한 줄? 내가 하려던 말을 그대로 한 최태혁을 놀라 바라봤다. 저놈이 이렇게 길게 말하는 건 회귀하고 처음 봤다.
처음에 내 입단속 할 때 빼곤 단어로만 말했는데…. 지금은 채예령을 안심시키려는 듯 표정까지 풀려 있었다.
역시 좋아하는 사람 앞에선 이 새끼도 별수 없구나. 뭔가 맘속에서 기분 나쁜 게 꿈틀대긴 했지만 무시했다. 절대 서운해하는 거 아니야. 난 쿨한 남자니까.
“그래, 알았어! 전해 줄 것도 전해줬겠다, 그럼 난 이만 가볼게.”
채예령은 좋은 마음에 했던 제안이 몇 번에 걸쳐 거절당한 게 민망했는지 볼을 긁적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을 보니 너무 불청객 취급을 했나 싶어 약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 오랜만에 배웅이나 해줄까? 어머님한테 인사라도 드릴 겸.”
전에도 종종 집까지 배웅한 적이 있어서 그런지 채예령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연스럽게 앞장섰다. 나는 놈의 어깨에 손을 얹으면 현관문 쪽으로 인도했다. 그리고 채예령이 신발을 신는 사이에 금방 다녀오겠다고 말하기 위해 뒤로 고개를 돌렸다.
“…가나?”
깜짝이야.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네. 나는 소리 지를 뻔한 내 입을 막으면서 바로 뒤에 서 있는 최태혁을 올려다봤다. 미동 없이 소파에 앉아 있을 것 같던 녀석은 친히 현관까지 나와 신발을 신는 채예령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와…. 이 새끼 봐. 나 나갈 땐 마중은커녕 말 한마디 안 하더니 채예령이 나간다니까 아주 버선발로 현관까지 배웅을 나왔다. 하긴 이래야 정상이긴 하지. 오히려 아까 나 혼자 돌봐도 된다고 했던 게 이상한 거였다.
…그래도 그렇지, 지가 필요 없다면서 민망하게 해놓고서 막상 간다니까 아쉽냐?!
서운해서 그러는 거 아니다. 그냥 억울해서 그런 거다.
나는 나오려고 하는 입술을 집어넣으며 신발을 다 신은 채예령을 슬쩍 옆으로 밀고 신발에 발을 집어넣었다.
“네. 너무 늦으면 집에서 연락이 와서요!”
“…아니, 너 말이다.”
하지만 최태혁이 잡은 것은 내 팔이었다.
나?! 나한테 물어본 거였어?
최태혁은 구겨진 운동화를 펴느라고 어정쩡하게 몸을 굽히고 있던 나를 일으키더니 자기를 마주 보게 세웠다.
“네? 아, 그냥 오랜만에 배웅이나 해주고 올까 싶어서요…?”
추궁하는 것만 같은 눈빛을 직통으로 받은 탓에 나도 모르게 눈치를 보며 말을 이상하게 끝맺었다. 아니, 이 분위기 뭔데.
“…그렇군.”
그게 끝? 이 숨 막히는 정적을 만들어놓고, 고개 끄덕이면서 한마디 하면 끝?
“뭐야, 이 분위기는? 하하-. 야, 형이 너 나가는 거 싫은가 보다. 인사는 다음에 하고 오늘은 그냥 있어.”
역시 나만 이상한 분위기를 느낀 것이 아닌지 뒤에 있던 채예령이 혼자 가겠다며 현관문을 열었다. 나는 그 말에 나에게서 눈을 떼는 최태혁을 확인하고 얼른 뒤를 돌았다.
“그… 그럴까?”
“그래! 어차피 요 앞인데 뭘. 그럼 나 갈게. 선배도 다음에 또 봐요!”
떨떠름하게 되물은 나와 달리 상황 적응을 끝냈는지 채예령의 목소리는 산뜻했다. 그리고 나를 향해 코를 한 번 찡긋하며 어깨를 으쓱해 보인 녀석은 내 뒤를 향해 장난스럽게 경례 포즈를 했다.
“그래.”
그게 웃겼는지 뒤에서 들려오는 최태혁의 목소리엔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오늘 신기한 경험 많이 하네. 웃음기 섞인 목소리라니, 쟤 저런 것도 낼 수 있었구나.
이 짧은 순간에 채예령과 나를 대하는 게 이렇게 다르구나- 느끼게 해주는 것도 진짜 능력이다, 능력. 나는 고개를 살래살래 젓고는 뒷걸음질 치며 손을 흔들고 있는 채예령에게 소리쳤다.
“다음엔 초인종 누르고, 새꺄!”
알겠다며 멀어져가는 놈의 말이 못 미더웠지만, 한번 준 열쇠를 뺏기는 좀 그랬다.
최태혁이 갑자기 무슨 변덕을 부리는 건지는 몰라도 오늘은 좀 일찍 누워서 더 친해질 방법이나 궁리해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잠잘 준비를 서두르는데, 자꾸 가는 곳마다 시선이 쫓아왔다. 이 집에 나 말고는 최태혁밖에 없으니 귀신이 아니라면 그놈의 것이란 소린데, 왜 자꾸 신경 쓰이게 이러는지 모르겠다.
“형. 자세 좀 불편해도 좀만 더 앉아 있어요. 침대 시트 빨아놓은 게 다 말라서 좀 갈고 부축해줄게요.”
혹시 불편해서 저러나 싶어 한 말이었는데 최태혁은 여전히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저음의 섹시한 목소리는 뒀다 어디에다 쓸 건지.
말했으니 됐겠지 싶어 부지런히 시트를 정리했다. 그러나 아직도 뒤가 근질거렸다.
“…형, 뭐 할 말 있으세요?”
“……?”
할 말 있는 사람처럼 뚫어져라 쳐다보길래 물어본건데 최태혁은 오히려 왜 갑자기 그런 걸 묻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적반하장 장난 아니네, 이 녀석?
“아니…. 자꾸 보시는 것 같길래….”
자동으로 쫀 듯한 말투가 나오는 것은 내가 겁쟁이라서가 아니라 녀석의 기가 매우 세기 때문이다. 아니, 190이 넘는 키에 어깨는 태평양만 하고 온몸에 근육이 불끈불끈한 사람이 지척에서 눈을 부리부리 뜨고 있는데 누가 안 쫄고 배길 수 있겠냐고. 근데 저 자식은 왜 아까부터 사람 잡아먹을 것처럼 쳐다보고 난리야!
“없다.”
말도 더럽게 단답으로 해요 정말. 나는 머릿속에 참을 인 자를 새기며 하던 일을 마저 마무리하고 옷장으로 걸어갔다.
어색하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어두었던 잠옷을 천천히 꺼내 들고, 괜히 실밥이라도 묻었나 이리저리 돌려 보고, 냄새가 나는지 킁킁 대보기까지 했는데 눈치를 옆집 멍멍이한테 준 건지 최태혁은 아직도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야! 내가 무슨 네 앞에서 스트립쇼를 할 것도 아니고, 옷 갈아입을 때만큼은 좀 눈을 돌려야 하는 게 예의 아니냐?!
“저…, 형. 저 옷 좀 갈아입게 다른 데 좀…. 아닙니다, 뭐, 남자끼린데요. 그냥 입죠, 뭐. 하하하하!”
나는 눈빛에 밀려 결국 놈이 보는 앞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최태혁이 어딘지 좀 이상해진 것 같았다.
* * *
“우와-. 형, 몸 진짜 죽이네요.”
이게 어쩌다 나온 말이냐 하면, 최태혁의 몸을 마사지하는 도중 내뱉게 된 감탄사였다.
나는 며칠 전부터 매일 자기 전에 놈의 상처를 피해서 목, 어깨, 팔, 다리를 마사지해 주고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이런 말을 꼭 하게 됐다. 놈의 몸은 진짜 예술이었다.
만지는 데마다 다 단단하고, 비율도 장난 아니고, 부드럽지는 않지만 그 흔한 점 하나 없는 피부라니. 이거 잘빠져도 너무 잘빠진 거 아니야? 인간으로서 드는 패배감에 속으로 열심히 욕을 해보는데 더 지는 것 같아서 그냥 맘 편히 감탄하기로 했다. 그래. 이 새끼가 비정상인 거고, 내가 정상인 거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형 진짜 인기 많았겠어요. 그죠?”
“…….”
“사실 제가 하는 일이 일이다 보니 근육질 몸은 질리도록 봤다고 생각했는데 형은 진짜 차원이 다르네요.”
“…….”
“아니, 도대체 무슨 운동을 얼마나 한 거예요? 부럽다. 나도 지금 하는 일 더 열심히 하면 형처럼 될 수 있을까요?”
항상 똑같은 패턴이다. 나 혼자 이것저것 떠들어대면 놈은 대답이 꼭 필요한 데선 고개를 끄덕이고, 아니면 그마저도 없다. 부정일 땐 당연히 말없이 강력한 눈빛 한 방을 날리고 끝. 이 새끼가 단어라도 내뱉을 때는 밥 먹을 때뿐이다.
하지만 나는 불굴의 사나이라서 서로가 지루하지 않게 주제도 바꿔가며 떠드는 세심한 배려를 발휘해주고 있었다.
“후아-. 이제 됐다. 오늘 마사지 끝!”
몸이 큰 만큼 한 번 마사지를 할 때마다 온 힘이 다 들어가서 끝나고 나면 나는 녹초가 된다. 항상 다리를 제일 마지막에 주무르기 때문에 엎드려 있는 놈 옆에 쓰러지듯 누워 옆구리 근육을 구경하는 것도 하나의 순서로 굳어졌을 만큼, 이 짓도 익숙해졌다.
“형. 어떻게 하면 이런 몸을 만들 수 있어요?”
“운동.”
“얼마나 해야 하는데요?”
“29년.”
아~ 그렇구나~. 너 새끼는 갓난쟁이일 때부터 운동을 했구나~. 장난하나.
자세한 대답을 바라고 한 질문은 아니었지만 계속 이런 식이면 좀 열 받는다. 놈과 있다 보면 차라리 외로움에 미쳐 벽과 대화했던 내 학창시절이 그리워질 정도였다.
나는 울컥 짜증이 치솟아 눈을 가늘게 뜨고 놈을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형! 지금 웃은 거예요?”
놈이 웃고 있었다! 만년설 최태혁이 날 보며 웃다니.
함박웃음도 아니요, 빙그레 웃음도 아니요, 미소도 아닌 그저 실소였지만 그래도 웃은 건 웃은 거니까!
맨날 무표정하던 애가 웃어주니까 마치 세상을 얻은 것처럼 기뻤다. 그 미소가 내 모든 노력의 결실 같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아무리 차가운 반응이 돌아와도 포기하지 않고 친근하게 굴었던 나의 노력에 대한 작은 결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녀석이 무뚝뚝하게 굴 때마다 내심 얼마나 초조하고 막막했는지 모른다.
이제 나, 얘 웃게 만들게까지 했으니까 조금은 친해졌다고 생각해도 되는 거겠지?!
* * *
“이놈 새끼가! 이 새끼 정신 안 차려! 그러다 허리 나가, 이놈아!”
“아 진짜, 소리 질러서 더 놀랐잖아요! 나 잘못 삐끗하면 아저씨가 책임 질 거예요?”
“우라질 놈이 못하는 소리가 없어!”
생각 좀 하느라 멍 때리고 있었더니 금방 호통이 따랐다. 무거운 걸 이고 있을 때 방심하면 안 되는 건 알지만, 놀라서 진짜 발을 헛디딜 뻔했다.
나는 투덜거리면서 다시 자세를 바로잡고 걸었다. 정신 차리자 김진호. 최태혁 웃는 모습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자꾸 떠올리냐.
실소든 뭐든 어쨌든 놈이 웃는 걸 본 날로부터 벌써 삼 일이 지났다. 나는 그동안 그놈이 웃는 걸 무려 세 번이나 봤다. 전부 실소였지만, 실소도 웃음이다.
여전히 단어 수준이기는 하지만 말도 좀 많아지고 행동도 더 협조적으로 변했다. 게다가 가끔 내가 반말을 섞어 말하거나 친하게 스킨십을 시도해도 강력한 눈빛이 박혀오지 않았다.
전반적으로 눈빛이 부드러워졌달까? 이건 착각이 아니라 진짜 그놈이랑 어느 정도 친밀감이 생긴 게 분명했다. 사실 변화가 없으면 그게 더 이상한 상황이긴 하지만.
근데 문제는 이게 얼마나 친해진 건지 감이 안 잡힌다는 거다. 나는 원래 사교성이 젬병이라 이날 이때까지 채예령을 제외한 친구라곤 없었다. 생각해보면 몇몇 놈 더 떠오를지도 모르지만 친구! 했을 때 팍! 떠오르는 것이 채예령밖에 없으니 진정한 친구는 그놈뿐인 거겠지. 기분이 좀 엿 같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어쨌든, 요점은 나는 사람이랑 친해지고 있다는 느낌을 잘 모른다는 거다. 상황 덕을 봐서 전보다는 나아진 것 같은데 내가 최태혁이랑 정말 친한 사이가 된 건지, 아님 계속 같이 있다 보니 그냥 표면적으로 덜 어색한 사이가 된 건지 확신이 없었다.
“야 인마. 너 자꾸 멍 때릴래?”
생각을 하느라 자세가 좀 흐트러졌는지 뒤에서 불호령이 들렸다. 나는 얼른 들고 있던 것을 추스르며 뒤에까지 들리라고 배에 힘을 주고 소리쳤다.
“제대로 들고 가고 있었어요!”
“얼씨구? 이 새끼 봐라? 어디서 형님한테 까불어, 까불기는?”
뒤에 아저씨가 조용해지니 이번엔 앞에 있던 아저씨가 뒤에 있는 나를 힐끔대면서 한마디를 보탰다.
“아 무슨 형이에요, 형은! 얼른 앞이나 똑바로 보고 가세요!”
자꾸 뒤돌아 나를 체크하는 자기가 더 위태위태해 보이는구만, 누가 누구한테 잔소리를 하는 건지. 하여간 이 오지랖 넓은 아저씨들 때문에 생각도 마음대로 못하겠다. 그래도 아저씨들 말이 틀린 것은 아니라서 생각은 나중에 하고 들고 있는 짐을 옮기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리고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한 순간, 앞에서 걷던 아저씨가 먼저 짐을 내려놓으며 나한테 말을 걸었다.
“동생, 고민 있냐?”
“예?”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하는 사이, 뒤에서 따라오던 아저씨도 짐을 내려놓고는 내게 어깨동무를 해 왔다.
“아니, 안 그러던 놈이 자꾸 멍을 때리는 게 이상하잖냐.”
하…. 아저씨들의 오지랖 콤보가 또 시작됐구나. 일이나 마저 하자고 말하려던 나는 타이밍 좋게 밥 시간이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으며 이마를 짚었다.
그래, 도망칠 수 없으면 즐기라 그랬잖아. 나 혼자 생각하는 것보단 그래도 머리 두 개가 더 있는 게 나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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