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새끼, 관심 없는 척하더니 재촉하기는!”
이 아저씨가 진짜, 이게 나한테 얼마나 중요한 얘기인 줄도 모르면서!
“아, 빨리 말해줘요!”
“알았다 이놈아! 정확하진 않은데, 흑룡파라고 그러는 것 같더라고.”
“후계자 어쩌고 한 다음에 칼도 막 휘두르고요?”
총도 본 마당에 칼이라고 안 나오겠냐 싶긴 했지만. 칼이라니, 칼이라니…!
“그래! 한 놈이 칼에 맞고 나니까 나머지 놈들이 형님! 하면서 난리가 나더라니까.”
“그래서요! 그다음엔 어떻게 됐는데요? 아니 근데 잠깐. 아저씨는 칼까지 나온 상황에 도망부터 갔어야지 구경을 하고 있으면 어떡해요!”
“하이고, 별걱정을 다하네, 젊은이. 이 아재도 왕년에 고향에서 좀 굴러먹던 짬이 있어서 칼 한 자루 가지고는 무섭지도 않어요. 오히려 오랜만에 재밌는 구경해서 좋았구만 뭘. 집중하다가 손에 힘이 빠졌는지 담배도 떨어트릴 지경이었다니까? 아, 그거만 아니었어도 그놈들이 어디로 가는지 보고 슬쩍 쫓아가 봤을 텐디. 아쉽게 됐지, 뭐.”
“…예? 놓쳐요…?”
아니, 떨어진 담배를 얼마나 하염없이 바라봤으면 그걸 놓쳐…? 말이 돼? 참으로 기특하게도 아저씨의 안전까지 걱정하며 열심히 경청하던 나는 순간 멍해짐을 느꼈다. 아저씨는 나의 어이없어하는 눈빛을 읽었는지 괜히 헛기침을 하고 뒷목을 벅벅 긁으며 입을 열었다.
“아, 잠깐 한눈판 사이에 저 새끼 잡아 죽여! 하면서 난리 치는 소리가 들리더라고. 고개 들어 보니까 아무도 없었어.”
“…없었…. 아니 그런 상황에서 담배에 얼마나 집중을 했길래…. 하…. 결말이 진짜 아저씨답네요.”
“재밌기야 했지만 내 돈 주고 산 담배가 떨어졌잖아. 그때는 그거 찾는 게 더 중요혔어. 암튼 뭐 그 칼 맞은 놈이 형님이긴 한갑더라고. 그놈 다치니까 나머지 다 난리 친 거 보면.”
“혹시 저 새끼 잡아, 의 저 새끼가 그 칼 맞은 놈일까요?”
나는 신에게 기도하는 심정으로 물었다. 아니어라. 제발 아니어라. 아닌 게 아닌 거 같지만 아니어라!
“그렇지 않겄어? 그 뒤로 흉악하게 생긴 놈들이 그 주변을 살벌하게 뒤지고 다니더라고. 칼까지 맞고 어디 숨었는지 모르겠지만 걸리면 뒤지겠던데? 암튼 오랜만에 꽤 재밌는 구경이었어. 하- 역시 사내라면 말이야-.”
그 말을 끝으로 아저씨는 정말 하나도 궁금하지 않은 본인의 왕년 싸움 실력과 에피소드를 무용담처럼 늘어놓기 시작했으나 당연히 내 귀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씨발. 그 흉악하게 생긴 놈들이 살벌하게 찾아다니던 새끼가 지금 우리 집에 처박혀 있잖아!
“선배님. 아니, 태혁 형.”
“김치.”
“아, 네. 좀 작게 찢어…. 아니, 이게 아니지. 형, 그러고 보니 그날 무슨 일로 그렇게 다치셨어요?”
“크게.”
“이미 찢었는데 여기서 크게는 너무 크지…. 아 형! 말 돌리지 마시고, 왜 칼 맞으셨냐고요!”
“…싸움.”
이 새끼야 너는 당연히 쌈박질하다 칼 맞지, 요리하다 배 째냐? 아오 진짜, 이거 대놓고 욕할 수도 없고.
답답함에 내 속만 탔다. 역시 내가 죽을 때 총이 나왔던 건 최태혁 때문이었다.
나는 미래에 닥쳐올 그 날 살아야겠다는 일념 때문에 제일 위험한 놈을 태연히 집에 들였다는 것을 이제야 실감했다.
그렇게 눈에 불을 켜고 찾는 새끼를 구해다가 치료해줬다는 게 걸리면 더 빨리 죽는 거 아니야? 물론 과거 채예령은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지만…. 아니지, 아니지. 피해가 없지는 않았지. 납치당했잖아. 생각해보면 이 일이 나비효과가 되어 납치를 불러냈을 수도 있는 거잖아!
정리하자면 이런 거지. 칼까지 꺼내 들면서 최태혁을 해치려 한 무리가 있다. 그런데 최태혁이 도망침으로써 그 무리는 목적을 완전히 달성하지 못했고, 그들이 입힌 상처마저도 누군가가 나타나 치료해주고 지극정성으로 간호했다. 그래서 최태혁은 완벽히 부활해버렸다.
당연히 그를 해치려고 했던 무리는 빡이 치겠지? 그럼 최태혁뿐만 아니라 갑자기 끼어들어서 치료해 준답시고 깝친 사람한테도 빡이 치지 않을까? 대낮에 칼부림도 서슴지 않는 놈들인데 빡친 사람 납치해서 두들겨 패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 거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치료해준 사람’의 포지션을 전생에는 채예령이, 지금은 내가 맡고 있다는 거다. 즉, 나는 엮여서 납치되는 걸 피하려다가 도리어 그 납치 대상이 되는 길을 택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인데….
하하…. 김진호.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긍정적으로. 납치는 지금으로부터 약 1년 뒤니까 이 일이랑은 전혀 상관없을 확률도 있고, 또 만약 이 일이 발단이라고 하더라도 이번 생엔 내가 혼을 갈아가면서까지 이놈을 간호해서 부활시켰잖아. 설마 이 은혜를 팽하지는 않겠지.
…에이, 아닐 거야.
“…형, 밥 맛있죠?”
“제가 머리 감겨드리는 것도 기분 좋죠?”
“집에만 계시느라 몸이 찌뿌둥하실 테니까 오늘부턴 마사지도 해드릴게요.”
놈은 내가 모든 말에 그저 로봇처럼 고개만 끄덕였다. 꿀밤을 한 대 날려주고 싶을 만큼 얄미웠지만 참았다. 1년 뒤를 위해 놈에게 은혜를 베풀어야 하기도 하고, 일단 지금 당장 칼 든 놈들이 최태혁을 찾고 있다는 사실이 나의 심장을 쫄깃하게 했기 때문이다. 태풍을 멀리 피해 가면 좋겠지만, 이미 휘말린 이상 눈 속에 있어야지.
“그러니까 형. 제발 우리 집에 오래 있어 주세요.”
저놈이 집에 있는 동안은 안전할 거 같은 느낌이 든다.
나는 놈의 의아해하는 눈빛을 무시하며 열심히 입으로 밥을 날랐다.
아. 살기 더럽게 힘들다, 진짜.
지이이잉-.
에이씨. 열심히 생색내는 중인데 누구야.
“여보세요?”
-진호야!
그냥 바로 끊을 생각으로 액정도 보지 않고 받았는데 이 순간 제일 달갑지 않은 목소리가 들렸다. 전화 냅다 받는 버릇 고치든지 해야지 진짜.
“왜.”
채예령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나를 보는 최태혁의 눈빛이 짙어졌다. 말하지 말라는 경고인지, 아님 채예령의 목소리에 반응을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살살 눈치를 보며 전화를 이어갔다.
당분간 저녁에 부업 뛸 거라고 했으니 놀러 온다는 건 아니겠고, 무슨 용건이 있어서 하필이면 놈이랑 식사하는 시간에 전화를 한 건지. 별거 아니면 그냥 끊어버려야지.
“무슨 일인데?”
-아니, 엄마가 여행 갔다가 너 줄 특산품 사왔대서.
아, 이건 치트키다. 못 끊겠네. 나는 내 쪽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최태혁의 눈을 피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그럼 내가 지금 받으러….”
-그럴 필요 없어!
“응?”
내가 모르는 것도 아니고 어머니 성격에 바로 가져가라고 하셨을 거 뻔히 아는데 무슨 소린가 싶었다. 나는 최태혁에게 입 모양으로 잠깐 나갔다가 올게요, 라고 말하며 뒤를 돌았다. 그 순간 보였다. 내가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돌아가는 우리 집 현관문 자물쇠가.
“내가 가져다 놓으려고 왔…! 어? 너 집에 있었…. 태혁 선배?”
…내가 왜 쟤한테 집 열쇠를 줬을까? 나는 정말 병신인가 보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그래서, 선배가 진호네 집에 계시게 된 거라구요?”
“그래.”
나는 얌전히 쥐 죽은 듯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채예령이 가고 나면 최태혁이 어떻게 나올지 무섭다거나 그동안 친구를 속였다는 죄책감을 느껴서가 아니라, 충분히 친해지기 전에 최대 복병이 나타났다는 절망감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웅얼웅얼 자초지종을 설명했는데도 용케 다 알아먹은 채예령이 경쾌하게 답했지만 최태혁도 나도 기분이 경쾌해지진 않았다. 곁눈질로 힐끔 본 최태혁의 얼굴이 싸늘했다.
“진호가 발견하지 못했으면 큰일 날 뻔했겠어요.”
그렇게 말하는 채예령은 진심으로 안도하는 표정이었다. 누가 보면 무슨 친형제가 죽다 살아난 건 줄 알겠네. 나는 괜히 삐쭉거리고 싶어 중얼거리고는 앉은 채로 무릎을 끌어안으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입을 열었다.
“야, 이거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응? 왜?”
“그런 게 있어. 아무튼 너만 알고 있어.”
몰랐는데, 나만 알고 있었던 걸 다른 사람이 함께 알게 된다는 건 썩 좋은 느낌은 아니구나. 그것도 제일 경계하던 채예령이 알게 되니까 기분이 약간…. 잣 같네. 하하하.
“아…. 알았어. 우리만의 비밀 같은 거야?”
퉁명스러운 내 말에도 녀석은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대며 귀엽게 속삭였다. 우리만의 비밀…. 그런 귀여운 거라면 얼마나 좋겠냐.
하지만 네 입이 얼마나 무겁냐에 내 목숨이 달려있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설명할 때 아저씨에게 들었던 패싸움 어쩌고 하는 일은 쏙 뺐기에 그 얘길 할 수 없는 것이 너무 답답했다. 떠벌리고 다닐 놈은 아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불안감이 가시질 않았다. 거짓말을 못 하는 놈이라 누가 물어보면 덥석 걸릴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고 이제 이놈이 우리 집 드나드는 걸 막을 수도 없는데 나 없을 때 와서 최태혁이랑 노는 건 아니려나 모르겠다.
대학 때도 나보다 더 친했고, 나만 알고 있는 거지만 최태혁은 예령이 놈을 좋아하니 나보다 쟤랑 더 있고 싶어할 텐데…. 젠장, 그럼 난 또 사이에 끼지도 못하고 겉돌다 최태혁을 보내게 되지 않을가?
“너 혼자 선배 돌보기 힘들지 않아? 내가.”
“아니! 괜찮아!”
“괜찮다.”
역시. 예상을 벗어나지 않게 채예령은 착하고 어여쁜 마음으로 내가 힘들까 일을 덜어주려고 했고, 나는 세상에서 제일 걱정하던 말을 듣고서 반사적으로 버럭 소리 질러 버렸다.
그런데 신기한 건, 최태혁이 예령이의 제안을 거부하는 말을 내뱉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나와 동시에.
그렇다는 건 이놈도 급하게 거절했단 건데…. 왜? 이놈은 좋아하는 애가 도와준다는데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하-. 나 말도 다 안 끝났는데.”
그러게. 나는 급해서 그랬다고 치지만 쟤는 왜…. 아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일단 이 녀석의 참견을 물리쳐야 한다. 최태혁도 저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
나는 우리의 격한 반응에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는 채예령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으며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믿음직스러워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미안. 근데 나 별로 안 힘들어.”
“그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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