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다음날부터 놈은 정말 말했던 것처럼 우리 집에서 머물렀다. 그러다 이틀째 되던 날인가. 사람인지 사물인지 의심될 정도로 말이 없던 놈은 새벽에 내가 나갈 때 같이 깨더니 갑작스레 입을 열었다.
자신이 있는 동안 드는 비용은 지불할 것이며, 절대 아무 데서도 자기 이야기는 하지 말라고.
채예령을 생각하며 친구한테도 말하면 안 되냐고 물어봤다가 괜히 살벌한 눈빛을 받기도 했다.
그래서 전화로 요즘 무슨 일 있냐고 묻는 채예령에게는 별일 아니라고, 진짜 미안하지만 당분간 바빠서 못 볼 것 같다 말했다.
미안하다 친구야. 나는 절대 그놈이 쥐여 준 돈에 혹한 것이 아니야. 절대.
“다녀왔습니다!”
분명 현관에 놓인 번쩍번쩍한 구두가 보이는데도 컴컴한 집안에선 대답이 없었다.
나 혼자 살 때랑 다를 것이 없구만. 그냥 습관이 돼버린 혼잣말이었지만, 사람이 있단 걸 아니까 좀 더 공허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자고 있네….”
최태혁은 내 침대에서 곤히 자고 있었다.
요즘 계속 소파에서 새우잠을 잤더니 허리가 아픈 것 같은데, 나도 침대에서 자고 싶다….
깨 있을 때보다 훨씬 부드러운 표정으로 자고 있는 그를 보고 있다가 씻어야 한다는 생각에 돌아섰다.
침대는 부모님이 쓰던 걸 그대로 두고 간 터라 더블 침대였다. 자리도 남는데 오늘부턴 옆에 꼽사리 껴서 자도 되지 않을까?
씻고 돌아온 나는 내 집에서까지 찬밥 신세로 지내긴 싫어서 상대가 최태혁임에도 불구하고 당당히 옆을 파고들었다. 매일 새우잠을 자는 것도 모자라 새벽같이 일어나 몸을 쓰는 일을 하려니 허리가 아파 더는 소파에서 자고 싶지 않았다.
잠꼬대하다 발로 차지만 않게 해달라고 하나님에게 기도를 하면서 최태혁과 좀 거리를 두고 잠을 청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날 발견하고 발로 차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감도 있었지만, 다음날 나는 다행히 침대에 누운 채로 눈을 떴다. 눈 뜨자마자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최태혁을 보고 식겁했지만…. 소리 지를 뻔한 걸 겨우 삼키고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허리가 아파서 침대에서 잤다고 말하니 누가 과묵계의 일인자 아니랄까 봐 녀석은 또 고개만 끄덕였다.
“저, 그럼 앞으로 저도 침대에서 자도 괜찮… 아요?”
우리 집에 있는 침대에서 자는 걸 허락받아야 하는 상황이 참 아이러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최태혁 옆에 있으면 왠지 눈치를 보게 되는 걸 어떡해.
나는 설마 안 된다고 하겠냐고 생각하면서도 조금 초조한 마음으로 녀석의 답을 기다렸다. 그리고 아주 당연하게도 최과묵 씨는 또 고개만 끄덕였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다. 그동안 최태혁은 우리 집 상전으로 완전히 자리매김했다.
이왕 시작한 거 제대로 끝장을 보자는 심산으로 해주었던 첫날의 서비스를 하루아침에 바꾸긴 뭐해서 그냥 좀 해주자- 했던 것이 일주일 동안 계속된 것이다.
이틀째까지 죽 쒀다가 직접 먹여주고, 이젠 밥을 먹어도 되겠지 싶어 삼 일째부터는 밥을 내갔는데도 이 자식이 숟가락을 들 기미가 없어서 결국 내가 또 먹여줬다. 나 혼자 먹을 땐 절대 하지 않을 고기반찬도 해주고, 찝찝할까 봐 세수도 시켜주고, 머리도 감겨줬다.
그뿐이면 말을 안 하지. 하루 두 번 상처를 살펴 치료해주고, 약 사다 주고, 집에서 편히 입을 옷도 사와 손수 입혀주기까지. 차라리 알바 두 개 뛸 때가 더 한가했다고 느껴질 만큼 손이 많이 가는 놈이었다.
나 혼자 자진해서 한 거 아니냐고 물어본다면, 그래. 분명 그놈은 나에게 직접 시키진 않았다. 요 일주일 동안 최태혁은 거의 말을 안 했으니까.
하지만 놈은 내가 하는 그 모든 시중을 거부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어쩔 수 없이 하게 만들었다.
예를 들자면 내가 먹여주지 않으면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나를 빤히 보고 있는다든가, 씻고 싶을 땐 화장실 문 앞에서 나를 빤히 쳐다본다든가. 그런 행동들 때문에 나는 일주일 동안 이 짓을 계속하고 있었다.
“오늘은 부대찌개예요. 저기, 이건 혼자 드시… 기엔 몸이 불편하시죠? 하하하! 제가 잘 불어서 먹여 드릴게요!”
“…….”
“이거 먹고 상처 한번 봐요. 이제 겉으로 보기엔 거의 다 아문 것 같긴 하던데, 정말 병원 안 가보셔도 돼요?”
“…….”
“뭐, 괜찮으시다면 괜찮으신 거겠죠. 머리는 어제저녁에 감았으니까 저 나가면 한숨 더 주무세요. 어제 퇴근하고 들어오다가 엄청 놀랐으니까, 저녁에 어두워지면 불 좀 켜고 계시구요.”
“…….”
“선배님은 예령이 앞에서 빼곤 정말 과묵하시네요. 망부석인 줄 알겠어요! 하하하하!”
오물오물 잘도 처먹으면서 말은 한마디도 안 하는 개놈의 시키. 아무리 입 아프게 말해도 제대로 대답이 돌아온 적이 없다. 게다가 오늘부터는 반찬 투정도 할 심산인지, 파가 섞인 걸 보더니 고개를 돌려버리기까지 했다.
어제는 뜨거운 거 먹일 때 안 불어주면 안 먹더니 이젠 반찬 투정까지 하시게? 진짜 가관이다.
나는 속으로 욕이란 욕은 다 해대면서도 겉으론 주저리주저리 떠들어대며 파를 골라내고, 호호 불어서 놈의 입에 고이 상납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굳게 닫혀있던 입이 이번에는 얌전히 벌어졌다.
다 때려치우고 얼른 일이나 하러 가고 싶다.
우여곡절 끝에 식사가 끝났다. 나는 며칠간 그래왔듯 상을 치우고 최태혁의 상처를 살폈다.
“으, 여전히 아파 보이네요. 그래도 전보단 많이 나아졌어요.”
매번 보는 것만으로 토가 쏠렸지만, 그래도 꾹 참으며 약을 바르고 거즈를 갈았다.
나는 피도 싫고 상처도 싫지만, 그래도 처음과 비교하면 상태가 많이 호전된 것을 보니 조금은 뿌듯했다. 누워있는 최태혁의 시선이 느껴져서 차마 겉으로 티를 내진 못했지만 속으론 열심히 낄낄댔다.
그동안 시중만 들었을 뿐 친해지진 못했지만 그래도 이 은혜를 잊지는 않겠지. 적어도 다시 납치를 당했을 때 그 자리에 나도 잡혀갔단 것 정돈 기억해 줄 것이다.
조금 나아진 미래를 상상하니 기분이 좋아진 난 더욱더 정성스럽게 상처를 호호 불어가며 치료했다.
“다 됐다! 저 이제 진짜 잘하지 않아요? 붕대 감기의 천재가 됐나 봐요.”
“…….”
나는 허리에 손을 얹고 가슴을 내밀며 칭찬을 하라고 눈치를 줬지만, 진짜 나 없을 때 입에 본드를 갖다 처바른 게 확실한 최태혁 씨는 입을 꾹 다물고 또 빤히 보기만 했다. 그래, 내가 뭘 바라겠냐, 너한테.
민망할 땐 뭐다? 런이다. 마침 일 갈 시간도 다 됐겠다, 나는 떠들던 것을 멈추고 서둘러 거즈 등을 정리했다.
“아무튼 오늘도 아침 루틴 다 마쳤으니 저는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선배님!”
그리고 여러 번 왔다 갔다 하지 않으려고 손에 쟁반이며 물통, 구급상자 등을 한 아름 안고 방을 나서면서 대충 인사를 던졌다. 어차피 대꾸도 안 하는 사람 얼굴 보고 얘기해서 뭐해, 하는 생각에서였는데….
“…형.”
“네?”
놈이 입을 열었다. 놀란 마음에 방을 나가다 말고 뒤를 돌자 놈이 다시 한번 또렷이 말했다.
“태혁 형이면 된다.”
전에 가끔 예령이와 함께 있다 마주칠 때도 똑같이 선배님이라고 불렀었는데, 그땐 아무 말 없었으면서 지금은 형이라고 부르라고?
“아…. 네. 저, 그럼 태… 혁 형? 저 일하러 가볼게요.”
“…다녀와라.”
갑작스러운 상황에 그냥 얼떨떨하게 답하고 말았는데, 방을 나오고 나니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됐다.
나… 최태혁이랑 좀 친해졌나 봐!
* * *
“얀마, 넌 나이도 어린놈이 왜 벌써부터 이런 일을 해?”
“일당이 세잖아요.”
“에잉, 젊은 놈이 얼른 번듯한 일자리 구할 생각은 안 하고 말이야!”
“아 아저씨 진짜 말 많네! 저도 다 사정이 있어서 그래요, 사정이!”
또 실랑이가 시작됐다. 몇 번 같은 현장에서 일하며 친분을 쌓은 아저씨는 요즘 만날 때마다 저 얘기였다.
본인도 젊을 때부터 이 일을 했다고 했으면서 나만 보면 잔소리를 하지 못해 안달이다. 누군 뭐 꼭 하고 싶어서 하나. 지금 당장 고수익 알바를 해야 하는데 기술은 없고, 언제든 내 마음대로 쉴 수 있는 일은 이것뿐이라 어쩔 수 없이 하는 거라고.
전에 살았던 1년 동안은 그래도 이 일을 하고 남는 시간에는 공부도 하고, 면접도 보러 다니려고 했다. 어차피 안 될 거란 걸 알기에 이번에는 취직은 잠시 미뤄두고 나 살길부터 찾고 있지만.
“근데 너 그거 들었냐?”
“아저씨, 저기 실장님이 부르는데요. 안 가세요?”
“몰라, 새끼야. 이 새끼는 재밌는 걸 말해주려는데도 지랄이야!”
“뭔데요. 빨리 말하고 들어가요.”
“궁금하냐?”
잔소리쟁이라 가끔 진심으로 짜증 나긴 해도 날 많이 챙겨주는 아저씨니까 참고 대답했다.
“졸라 궁금하니까 빨리 말해줘요.”
“크큭, 궁금할 줄 알았다 인마. 얼마 전에 우리 숙소 근처에 있는 폐건물에서 패싸움을 봤는데 말이야.”
패싸움? 갑자기 왠 패싸움?
“아니, 딱 보니까 애들 싸움은 아닌 것 같더라고. 그래서 담배 피우는 척 안 보이는 데 가서 슬쩍 엿들었거든. 근데 진짜 조폭 새끼들인 거 같더라고? 아니, 나 때야 뒷골목에 그런 놈들이 보이긴 했지만 요즘에 뭐 그런 놈들이 대놓고 다니냐? 아무튼 슬쩍 들리는 게 무슨 흑룡파 후계자 어쩌고 하더라고. 그러다 한 놈이 칼까지 꺼내 들어서 휘두르는데, 어쭙잖은 영화 보는 것보다 짜릿하더라니까!”
“네네, 그러셨겠… 네?”
흑룡파라면…. 최태혁네 조직 이름이라고 소문난 곳 아니야?
그 나이 먹고 무슨 패싸움 구경 썰인가 싶어서 심드렁했던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흑룡파요? 그 사람들이 진짜 흑룡파라고 하는 걸 들었어요?”
그렇게 되묻자마자 아저씨는 씨익 웃더니 거들먹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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