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고민하는 새 물이 찬 대야를 옮기고 깨끗한 수건과 구급상자도 챙겼다. 일단 옷을 다 벗겨서 빨래 바구니에 넣어두고 물수건으로 꼼꼼히 피를 닦아냈다. 너무 아파해서 모로 세우진 못했지만 밑으로 손을 넣어가며 등도 다 닦아줬다.
나 진짜 대단한 거 같아. 잠시 나를 찬양하고, 구급상자를 열어 이날을 위해 유투브에서 배운 대로 정성껏 치료를 했다. 다 닦고 나서 보니까 크고 작은 상처가 여기저기 많았다.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는 최태혁이 안쓰러워서 호- 불어가며 치료를 마치고 거즈가 덕지덕지 붙은 놈의 상체를 업고 낑낑대며 끌어와 침대에 눕혔다.
“와, 침대 밖으로 발이 빠져나오네.”
190이 넘는 장신이라 그런지 나한테 딱 맞는 침대가 최태혁에게는 작았다.
나는 친절하게 등받이 없는 소파를 침대 끝에 이어 붙여줬다. 그리고 거실을 정리한 다음 이번엔 대야에 찬물을 받아왔다. 상처 탓인지 최태혁의 몸이 열이 나는 것처럼 뜨거웠기 때문이다.
두꺼운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주고 차가운 수건으로 얼굴의 열을 식혀줬다. 내가 이렇게 지극정성으로 피 닦아줘, 약 발라줘, 땀 닦아줘 다 해주는데, 만약 나 죽게 내버려 두면 넌 천하의 못된 놈이다 최태혁!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더 정성스레 놈을 간호했다.
“이봐.”
귓가에 듣기 좋은 저음이 들렸다.
“으응….”
듣기 좋은 건 좋은 거고, 나는 내 볼을 찌르는 손길을 피해 돌아누웠다.
“…이봐.”
그러나 그 손길의 주인공은 제법 끈질겼다. 이번엔 손가락으로 돌아누운 내 등을 쿡쿡 찔렀다. 아씨, 누구야. 나 어제 늦게 잤는데…. 에에엑?
“나 잤어?!”
잠들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인지하는 순간 잠이 확 달아났다. 벌떡 일어나며 질문을 던졌지만, 당연히 답은 없었다. 그리고 내 눈앞엔 아파서 미간을 찡그린 게 아닌, 익숙한 무표정을 하고 있는 최태혁의 얼굴이 있었다.
“너…. 누구지?”
정말 처음 본 사람을 대하는 것 같은 녀석의 표정과 말투에 울컥 짜증이 났다.
최태혁의 얼굴엔 ‘어디서 본 것 같은데.’하는 기색이 단 한 톨도 보이지 않았다.
“본인을 설명하는 게 어려운 건가?”
어려운 게 아니고 열 받아서 그러거든요? 기억력도 구린 게 참을성도 드럽게 없네…, 하는 소리를 겉으로 내뱉을 수는 없으니 나는 세상 무해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 누가 나 기억 못 하는 게 어제오늘 일도 아니고. 그냥 부처와 같은 이해심을 가져보자.
“하…, 하하! 선배님 저 기억 안 나세요? 저 대학 같은 동아리였던 김진호잖아요~.”
우와 저 새끼, 이렇게 말해도 모르겠나 봐. 애써 웃으며 말한 게 무색하게 최태혁의 눈썹이 휘었다. 저 얼굴마저 잘생겨서 멋있긴 한데, 마음 같아서는 세게 한 대 때려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에이씨발. 어쩔 수 없지.
“예령이 친구요. 항상 그놈 옆에 있던.”
“…아.”
“하하! 모르실 수도 있죠. 제가 그렇게 존재감 있는 놈도 아니고. 그나저나 몸은 괜찮으세요?”
그냥 웃으며 넘겨준다, 새끼야. 이렇게까지 말했음에도 최태혁은 내가 누군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대충 화제를 돌려 몸 상태를 묻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이라도 위험한 것 같으면 119에 전화할 요량으로 아무것도 못 하고 계속 옆에 붙어 있었던 건데, 이제 정신도 차렸으니 좀 떨어져 있어도 되겠지 싶었다.
나는 팔을 걷어붙이며 아무 말 없이 나를 물끄러미 보는 그에게 아침을 만들어 오겠다고 말하고 방을 나섰다. 솔직히 하는 모양새를 봐선 꿀밤이나 먹여주고 싶었지만 환자라서 참았다.
“체한 것도 아닌데 죽은 좀 아닌가? 아 몰라. 원래 아픈 사람한테는 죽이 진리야.”
나는 혼자 중얼거리면서 재빨리 계란 죽을 만들어 그릇에 담고, 김치와 함께 예쁘게 쟁반에 받쳐 들고 갔다.
혼자 생각이라도 하고 있었던 건지 허공의 한 지점을 뚫어져라 보고 있던 최태혁은 ‘내가 먹을 거 왔어요~.’ 하며 방에 들어가자 무표정하게 고개를 돌렸다.
더럽게 표정 없는 새끼. 살벌해 죽겠네, 정말.
“죽?”
“아, 예. 일단 환자시니까…. 뭐 다른 거 드시고 싶으신 거 있으면 그걸로 다시 해올까요?”
되묻는 목소리에 내가 뭘 잘못했나 싶어 괜히 주눅이 들었다.
까탈스러운 새끼. 그냥 주는 대로 먹을 것이지. 정갈하게 담긴 계란 죽은 아까 슬쩍 맛보니 맛도 죽여줬다. 놈도 한 입 먹으면 먹고 싶어질 거다.
힐끗 눈치를 보며 침대 옆 탁자에 살포시 쟁반을 올려놓고 나도 옆에 앉았다. 이왕 서비스를 하려면 팍팍 해서 점수 왕창 따놔야지. 그런 야무진 마음으로 죽 그릇을 들고 한 숟가락 퍼서 놈의 입에 날랐다.
“자요.”
“…….”
그러자 최태혁은 이게 뭐냐는 듯이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야. 너 사람 민망하게 이럴 거야?
“아! 뜨겁겠구나. 호-호-. 자요.”
“…됐….”
“빨리 아- 해요, 좀! 팔 떨어지겠네!”
특별히 먹여주기까지 하는데 뭐가 불만인 건지 거부하는 놈한테 결국 짜증을 내버렸다. 크게 다친 사람이라 움직이기 불편할까 봐 직접 먹여주는 건데, 감사하다고는 못할망정 어디서 미간을 찌푸려? 이 배은망덕한 놈 같으니라고.
너 새끼, 이게 내가 얼마나 동경하던 대접인 줄 알아? 나는 말이야! 먹여주는 건 고사하고 아플 때 누가 나 죽 끓여주는 게 로망인 사람이야! 이게 얼마나 특별 대접인지 모르나 본데, 해줄 때 감사합니다- 하고 먹어라, 그냥 좀!
금방이라도 억지로 쑤셔 넣을 듯 살벌한 표정으로 숟가락을 입술에 들이미니 최태혁은 그제야 입을 조금 벌렸다. 나는 다시 표정을 풀고 생글생글 웃으면서 맛있죠? 제가 했어요! 따위의 아부성 철철 넘치는 멘트를 쳤다. 그리곤 일일이 입으로 불어 식혀주랴, 심심할까 봐 간간이 김치 찢어 올려주랴. 놈이 식사를 하는 내내 지극정성으로 챙겼다.
귀찮아 죽을 뻔한 식사는 죽 그릇이 다 비고야 끝이 났다. 놈은 남의 손을 빌려 식사를 마쳤음에도 아무런 인사 한마디 없었다. 나는 놈에게 설거지를 하고 오겠다 말하고 방을 나왔다.
징한 놈. 놈은 혼자서 내가 먹을 양까지 퍼온 죽을 다 먹었다.
“하…. 당연히 남길 줄 알고 다 퍼간 내 잘못이지 뭐….”
해둔 밥을 다 써서 끓인 터라, 내가 먹으려면 쌀을 새로 안쳐야 했다. 아픈 사람 계속 혼자 두기도 뭐하고,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을 보면 저녁 시간이 그렇게 멀지 않은 거 같으니 좀 참아야겠다. 나는 얼른 설거지를 마치고 구급상자에서 필요한 약만 챙겨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선배님, 여기 약이요. 상처 덧나지 않게 하는 거래요.”
약을 내밀었는데도 놈은 말이 없었다.
이쯤 되면 과묵한 것도 정도가 지나치다.
어떻게 사람이 고맙단 소릴 한번 안 하지? 아니면 별로 안 고맙나…?
놈은 내가 챙겨준 약까지 고이 드시고 나에게 빈 물컵을 내밀었다.
컵을 받아서 옆 탁자에 놓고 다시 의자에 앉은 나는 어젯밤 생각했던 ‘은근히, 하지만 팍팍 생색내어 빚을 졌다고 생각하게 만들기.’ 작전을 펼치기로 했다.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놈이 조금이라도 부채감을 느끼게 만들어야 한다.
“아니, 어제 새벽에 일하러 가는데 골목에 누가 쓰러져 있더라구요. 가서 봤더니 선배여서 얼마나 놀랐는지! 아무리 흔들어봐도 안 깨셔서 제가 업어서 집까지 모셔왔어요. 제가 힘이 약한 건 아닌데, 선배가 워낙 덩치가 좋으셔서 완전히 업진 못했더니 바지가 좀 끌렸는데…. 괜찮으시죠?”
에이씨, 잘나가다 왜 이게 튀어나왔지. 나는 말이 좀 끌린 거지 사실 다 해져 있던 바지 끝단을 떠올리며 녀석의 눈치를 봤다. 다행히 녀석은 개의치 않아 하는 것 같았다.
“어쨌든 그대로 집에 오자마자 힘이 좀 빠져서…. 아니, 제가 힘들었단 게 아니라 그냥 이 부근 길이 은근 경사져 있어서 조금 숨이 찼던 거예요. 절대 너무 힘들었던 건 아니에요! 흠흠,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선배를 거실에 내려놓고 양복을 벗기는데 피가…. 우욱…. 잠깐만요. 욱….”
순간 그때 봤던 피가 생각나 헛구역질이 나왔다. 나는 황급히 입을 막고 숨을 골랐다. 한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니 조금 괜찮아지는 것 같다. 하, 생색 내기 한번 드럽게 힘드네. 나는 살짝 맺힌 눈물을 훔쳐내고 다시 녀석을 보며 입을 열었다.
“아, 이제 됐어요. 하여간 온통 빨간색 범벅이길래 벗기고 치료를 좀 했어요. 맞게 한 건진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열심히 했으니까 안심하세요. 그리고 찬 바닥에서 주무시면 안 될 거 같아서 다시 선배를 침대로 옮기고 이불 덮어주고, 그러고 나니까 이번엔 열이 좀 오르더라구요. 그래서 옆에서 계속 수건으로 열을 식혀주다가 옆에서 잠이 들게 된 거죠. 밥도 드셨고 약도 드셨으니까 이제 병원 가보셔도 될 거예요. 시간이 이래서 응급실로 가셔야 할 것 같긴 하지만….”
나는 그가 응급실에라도 가겠다 할까 싶어 말을 흐리면서 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침묵이었다.
“지금 좀 괜찮으시면 일단 집에 가셨다가 내일 가보셔도 되고요. 제가 선배 핸드폰을 켜보진 않았는데, 배터리 없으면 충전기 빌려드릴까요? 아니면 제 전화로라도 집에 연락하실래요?”
이야기하는 내내 나를 빤히 보고만 있는 사람한테 주저리주저리 열심히도 떠들어대니 입도 아프고 무안해 죽을 지경이었다. 사람이 말을 하면 맞장구를 치든가, 중간중간 리액션이라도 하든가 해야지. 이건 뭐, 벽에다 대고 말하는 게 나을 수준이었다.
그래도 할 말은 다 했다. 이제 이 자식은 나에게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겠지?
“김… 진호라고 했나?”
“예? 아…. 예!”
뿌듯한 마음에 슬쩍 가슴을 펴는데 본드로 붙인 것 같던 녀석의 입이 드디어 열리더니 말을 뱉었다. 자기 핸드폰을 꺼내 들지 않은 것을 보면 내 거 빌려달라는 얘기겠지 뭐. 나는 녀석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을 주섬주섬 꺼내 내밀었다.
“미안하지만, 당분간 여기서 머물러야겠어.”
“여기 제 핸드…. 예?!”
천인공노할 소리를 뻔뻔스럽게 내뱉은 놈은 다시 입을 봉해버렸다. 그 뒤로는 나도 더 이상 뭐라 할 수 있는 말도 용기도 없어, 일단 출근 준비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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