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몇 번의 수화음 뒤 상대방이 금세 낭랑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와씨, 이거 아닌데. 진짜 뭔가 잘못되었다. 나는 더욱 초조해지는 기분에 머리를 쥐어뜯으며 생각해놨던 질문 중에 그나마 가장 덜 이상한 질문을 던졌다.
“야 오늘 며칠이냐?”
-어? 뭐라고?
“오늘 며칠이냐고.”
-진짜 뜬금없다 너. 잠깐만! 어…. 2월 26일이야. 근데 이거 물어보려고 전화까지 한 거야?
“…우리 어제 뭐 했지?”
-아니 아까부터 무슨…. 이거 뭐, 퀴즈 같은 거야? 우리 어제 졸업식 했지!
잘 살아있냐는 질문도, 몸은 좀 어떻냐는 걱정도 없었다. 채예령은 정말 담백하게 내가 물은 것에만 답을 했다. 뜬금없는 내용에 당황은 했을지언정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씨발.”
채예령에게 뭐라 말하는 것도 잊은 채 통화를 끊고 핸드폰을 소파에 집어 던졌다. 나는 양손으로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바닥에 엎드렸다. 이로써 회귀했다는 게 확실해졌다. 그것도 대학 졸업 직후로.
원래 총 맞으면 과거로 돌아가나? 아니지. 만약 그러면 미국 놈들 중엔 과거로 돌아간 사람이 엄청 많다는…. 잠깐. 그래서 미국이 잘사는 건가?
혼란스러우니까 별 병신 같은 생각이 다 들었다.
“뭘 어쩌라는 거냐….”
다시 살고 싶을 만한 인생은 아닌데, 내 인생. 돌아온 만큼을 더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막막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
“욱…. 씨발….”
아 진짜 짜증 난다. 울컥 짜증이 치솟았지만 머리는 빠르게 굴러갔다.
전이랑 똑같이 살면 또 그 개 같은 상황이 닥치겠지? 아니면 비슷한 상황이 오든가.
아무리 내가 강철 같은 마음과 모든 것에 초탈한 초인적인 정신력을 가지고 있다 해도 역시 그 상황은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달라질까? 아니 애초에 달라질 순 있을까?
“후…. 미치겠네, 진짜.”
머리가 터질 것 같은 상황에 아까처럼 다 내팽개치고 잠이나 자고 싶었지만 언제까지 현실도피를 할 수는 없었다. 최대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생각했다.
사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지금 이 순간부터 채예령과 연을 끊고 지내는 거다. 근데 그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단 어렸을 때부터 가족끼리 아는 사이인 데다가, 현재도 옆집에 살면서 가깝게 지내고 있다. 게다가…. 아니, 아무튼. 그럼 그건 기각이구나.
다음 방법은 그 다섯 명과 멀어지는 건데, 나는 채예령에게 그들이랑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하거나, 그들에게 채예령한테서 관심 끄라고 할 주제가 못 된다.
회귀하면 보통 미래에 대해 아는 정보를 사용해서 성공하고 그러지 않나…? 그러고 보니 나, 미래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지? 주식 안 해, 로또 번호는 기억 안 나. 내가 알고 있는 건 앞으로 채예령이 그 다섯하고 다시 마주친다는 것밖에 없는데 그런 쓸모없는 정보로 대체 뭘….
“어…? 잠깐!”
이거다! 예령이 대신 내가 그 다섯 명을 만나서 최대한 친해져 놓으면 목숨만은 구해주지 않을까? 나한테 푹 빠지게 한다든가 그런 건 기대도 안 하지만, 적어도 전보다 친해질 수는 있겠지. 많이도 아니고 딱 내 얼굴을 기억하고 도와줄 정도면 된다.
다행히 예령이 놈은 무슨 일이 생기면 나한테 말로 일기 쓰는 놈이었기에 다섯이랑 어떻게 재회했는지 다 알고 있다. 정확한 날짜까진 기억나지 않지만, 대충 무슨 일이 일어난 날인지만 기억해도 때가 되면 알 수 있을 거다.
그 다섯이랑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져서 덜 비참해지자. 나는 다시 돌아온 삶의 목표를 정했다.
일단 기억을 더듬어 필요한 것들을 정리했다.
최태혁. 다섯 명 중에 제일 처음 만나게 되는 게 이놈이다.
최태혁은 유명한 건설회사 초대 회장의 손자였다. 흥미로운 것은 그 건설회사가 우리나라 뒷세계를 장악하고 있다는 소문이 무성하다는 점이다. 그 영향인지, 녀석의 이탈리아인 어머니가 시칠리아 출신의 유명 마피아 가문의 사람이라는 이야기도 떠돌았다.
예령이가 그 소문이 어느 정도 사실이라고 했던 걸 떠올려보면 아마 내가 죽을 때 총이 나온 것도 이놈 때문이었을 거다. 그게 아니어도, 그저 소문이라고 치부하기엔 놈은 지나치게 위험하게 생기기도 했고.
190이 넘는 키에 커다란 근육질의 몸. 구릿빛 피부에 새까만 머리카락, 새파란 눈동자, 이탈리안 피가 섞여서 그런지 완벽한 서구형 이목구비로 완성된 선이 굵고 잘생긴 얼굴. 그는 늘 무표정하고 말도 더럽게 없어서 누구도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분위기를 풍겼다.
그 다섯 명 사이에서도 보스처럼 보였던 이 남자가 첫 타자라는 건 맘에 좀 걸리지만…. 놈과의 재회는 가장 생색낼 수 있는 상황이기도 하니까.
흐흐흐흐- 그럼 이제 구급상자를 꽉꽉 채워 넣어 볼까나~. 그리고 유튜브에서 상처 치료하는 법 같은 거 좀 찾아봐야겠다.
나는 회귀하자마자 새벽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대출금도 있고, 생활비도 필요했기 때문에 이것만은 전이랑 똑같이 할 수밖에 없었다. 1년 전 몸이라서 그런지 좀 익숙해졌던 노가다 일이 너무 고됐지만 회귀 전에 쌓았던 노하우를 발휘하다 보니 전보다 생고생은 덜 하는 느낌이다.
지이이잉.
나가기 위해 신발을 신고 있는데 주머니 속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여보세요?”
-아! 진호야! 역시 깨 있었네!
전화 너머에서는 예상치 못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채예령? 네가 웬일이냐, 이 시간에?”
-오늘 눈이 좀 일찍 떠졌는데 딱히 할 일이 없어서. 너 시간 괜찮으면 이야기나 할까 하고.
일 나가는 사람 입장에선 할 일이 없으니 이야기나 하자는 말이 얼마나 얄밉게 들리는지 이 녀석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르겠지?
나는 절로 나오는 한숨을 후 뱉으며 바쁜 사람 귀찮게 말고 나가서 조깅이라도 하라는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때 머릿속에 번뜩 떠오른 기억이 내 말문을 턱 막았다. 이맘때 딱 한 번. 내가 일하러 가는 새벽에 채예령이 전화를 건 적이 있었다.
당시에도 나는 하릴없는 도련님이 일찍 일어나 심심해서 전화했다는 소리가 어이없어서 그게 무슨 호강에 겨운 소리냐고, 난 일하러 가고 있으니 심심하면 나가서 뜀박질이나 하라고 했었다.
그냥 아무 말이나 나오는 대로 뱉은 거였는데 채예령은 진짜로 조깅을 하러 집을 나섰고, 조깅하는 길에 어떤 골목에서…. 세상에, 그게 오늘인가 보다!
-여보세요? 진호야?
갑자기 말이 없어진 내가 이상했는지 채예령이 자꾸 나를 불렀다. 미안한데 형이 지금 너한테 상황 설명해줄 시간이 없거든?
“야, 나 갑자기 급한 일 생겼다! 심심하면 다시 처자든가!”
-어? 잠…, 잠깐! 진호-.
대충 전화를 마무리한 나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뛰어나갔다. 오늘이 정말 그날이라면, 최대한 빨리 행동하는 것이 좋기 때문이었다.
분명 채예령은 우리 집으로 올라오는 길에 있는 골목 중 하나에서 최태혁을 발견했다고 했었다.
나는 숨이 턱까지 차도록 뛰어 언덕 어귀에서 멈췄다. 천천히 걸어가며 골목이 나올 때마다 기웃거리는데 한 골목 구석에서 검은 물체가 보였다. 가로등 불이 약해서 어렴풋한 형태밖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섣불리 다가가기 무서웠지만 침을 한 번 옹골차게 삼키고 발을 옮겼다.
혹시 그냥 이상한 사람이면 어쩌지 하는 마음에 살금살금 걸어가는데, 때마침 검은 물체가 무슨 소리를 냈다.
“…윽….”
한껏 억눌린 낮은 목소리. 찾던 사람이 맞는 것 같았다.
나는 재빨리 다가가 남자를 살폈다. 구겨져 있어도 잘생긴 얼굴의 주인은 역시 최태혁이 맞았다. 표정이 잔뜩 일그러트린 채 눈을 뜨지 않는 걸 보니 정신을 잃은 게 분명했다.
“으…. 피.”
바닥과 몸에 흥건한 피에 나도 모르게 진저리쳤다. 어두운 곳에서 봐도 보통 아파 보이는 게 아니었다.
이 거구를 어떻게 들고 가지? 문득 현실적인 걱정이 앞섰지만 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일용직 일꾼 김진호. 해보자.
나는 가까스로 그놈의 상체를 일으켜 벽에 기대게 한 다음, 등으로 간신히 들쳐 업었다. 다리가 땅에 좀 끌리긴 하지만 생명을 구해준 마당에 비싼 양복 값 물어내라 하진 않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힘겹게 집으로 향했다.
“윽….”
“하아…, 하아…. 진짜 더럽게 무겁네.”
겨우 집에 도착해 최태혁을 거실에 떨어트렸다. 숨을 고르고 옆에 주저앉아 축축이 젖어있는 검은 양복 재킷을 벗겼다. 그러자 배 부근이 전부 피로 물들어 있는 와이셔츠가 드러났다.
“윽, 씨발.”
진짜 벗기기 싫다. 흘린 피의 양만 봐도 상처가 클 게 뻔해 손이 다 떨렸다. 나는 심호흡하며 애써 마음을 가다듬고 단추를 풀어갔다.
손이 아래로 내려갈수록 드러나는 최태혁의 몸은 피범벅이었다. 자연스레 단추를 푸는 손도 더뎌져서 그냥 눈을 질끈 감고 와이셔츠를 활짝 벌려버렸다.
“하….”
깊은 한숨부터 나왔다. 코를 찌르는 비린내에 속이 울렁거렸다. 눈을 못 뜨겠어. 나 피 진짜 싫어하는데.
하지만, 하지 않으면 나는 미래에, 최태혁은 당장 내일이라도 죽을 수 있다는 생각에 다시 한번 심호흡을 하고 눈을 떴다. 언뜻 보인 꽤 길게 난 상처 때문에 토할 뻔한 걸 삼키고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병원에 데려가야 하나. 세숫대야에 따뜻한 물을 담으면서 잠시 고민했지만, 곰곰이 생각할수록 일단 여기서 처치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상처의 크기가 커서 그렇지 깊어 보이지는 않았고, 과거 채예령도 자기 집에서 직접 간호했다고 했었으니까.
거기다 어젯밤에 큰 소리가 들리지는 않았던 걸로 봐선 이 주변에서 칼부림을 했던 것 같지는 않고 상처가 난 후에 여기까지 걸어온 것 같은데, 병원에 가려고 마음먹었으면 걸어오면서 119에 전화를 했겠지.
나는 무슨 사정이 있을 수도 있으니 괜히 초치지 말자는 결론을 내렸다. 일어나면 병원에 갈지 집에 갈지, 지가 결정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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