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07. 만약 당신이 빙의한다면 지켜야 할 것
실상, 공간이란 무한하며 말 그대로 끝없이 존재한다. 우주 밖에는 또 다른 우주가 있고, 그 우주들이 쌍을 이루어 대칭하며, 다시 그 바깥으로 확장된다. 공간은 서로 충분한 여백을 두고도, 그러니까, 수만 년이 지나도록 상대를 인식하지 못할 정도의 거리를 두고도 여유롭게 각각의 세계가 존재한다.
다만 이 모든 곳이 아득하게 넓을 뿐 ‘하나’의 공간인 것은 확실하다. 그렇기에 어떤 우연이 절묘하게 겹치면 누구나 다른 세계를 엿볼 수 있다. 또한 이 우연이란 어디까지고 커지기도 하기에, 단순히 엿보는 것에서 끝나지 않기도 한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 본래 이쪽 세계에서 태어났어야 할 생명이 어떤 착오로 인하여 저쪽 세계에서 태어났다. 그런 경우, 대부분은 영문도 모르고 스스로를 난파선이라 느끼며 외롭게 살아가다가 죽는다. 그런데, 여기에 또 다른 우연이 겹쳐 자신이 태어났어야 할 세계를 들여다보게 된다.
그리고 또다시…… 행성 정렬, 역행, 크고 작은 항성의 동시다발적인 소멸과 탄생, 위성의 탈락, 그 밖의 수많은 요소들이 이 한순간의 관찰자에게 어떤 힘을 부여한다. 이것은 마음을 담아 내뱉은 말 한마디가 정말로 이루어지는 것과 같은 종류의 행사(行使)다.
이에 휘말리면 하나의 세계는 통째로 그 축이 비틀리기도 한다.
***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난다.
……였으면 좋았겠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다 기억이 났다. 기억이라는 게 똑 떼어내서 버릴 수 있는 게 아니었으므로 당연한 일이었다. 아니, 사실 하나부터 열까지 기억한다는 건 내 기준에서긴 하지. 오늘 안 나온 사람 손들라고 하는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하지만 기억하는 한도 내에서도 충분히……, 차고 넘칠 정도로 창피하다.
아테올의 기억을 지워버릴 마법은 없을까?
아마도 없는 듯했다. 사용법을 떠올리려 해봐도 머릿속이 까맣게 암전되기만 하는 걸 보면. 머리나 이마를 만져보면 어떻게 될지도. 슬그머니 손을 들어 아테올의 이마 위로 가져간 순간, 그가 눈을 떴다.
“흐억.”
흠칫해서 침대에서 들썩거렸다. 분명히 잠들어 있었는데, 잔 적도 없다는 듯이 반짝 뜨인 눈에 너무 놀랐다. 그는 미동도 하지 않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불쑥 말했다.
“제 기억을 지울 방법이라도 생각하고 계셨습니까?”
“아, 어, 어?”
그걸 대체 어떻게 알았지? 설마 내가 소리 내서 말하기라도 했나? 아니면 아테올은 마음을 읽는 건가? 왠지 오싹해져서 어깨를 움츠리자 그는 팔을 뻗어선 나를 껴안아 자기 쪽으로 확 끌어당겼다.
“……방법도 모르는데 무슨.”
“방법을 알았다면 했을 거라는 말로 들리네요.”
“그야.”
어제 내가 한 짓이 한 짓이다 보니까. 술 먹고 주사 부리는 것 이상으로 부끄러웠다. 뭔가, 숨겨야 하는 약한 부분을 들킨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생각하는 사이 몸이 아테올에게 밀착되었고, 그는 입술을 내 이마에 살짝 눌렀다.
“그건 사양하겠습니다.”
뭐야. 진짜 하겠다고 한 적도 없는데 심각한 목소리였다. 누가 들으면 내가 정말 기억이라도 뺏겠다고 한 줄 알겠네. 애초에 할 줄도 모른다.
“그럼 네가 알아서 잊어줘, 어제 일.”
“왜요?”
“…….”
어처구니가 없어서 쳐다보았으나 아테올은 뭐가 문제냐는 얼굴이었다. 뭔가 더 말하려다가 퍼뜩 어제 일이 또 떠올랐다.
‘그런 일을 당해보기라도 한 것처럼요.’
어제 들은 그 많은 말 중에 왜 하필 이게 떠오른 건지 모르겠다. 아테올이 한 말은 전부 의미를 알 수 없고 머릿속에 고민이라는 형태로 남았지만, 유독 지금 생각난 게 그것이었다. 내가 시우의 자리를 빼앗는 것에 과민 반응 한다고, 꼭 그런 일을 당해본 사람처럼 군다고.
아테올에게도 말했다시피 꼭 겪어야만 알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냥 도덕적으로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그런데…… 그 말을 듣고 나서 생각하니, 조금 묘한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성인군자가 아니고 길에 돈이 떨어져 있으면 주울까 말까 망설이는 사이 다른 누군가에게 빼앗기는, 딱 그 정도의 평범한 도덕심을 가진 사람이었다.
탑주의 삶은 이상적이었다. 심지어 거기에 아테올이 함께 있다. 결국 시우를 해치는 일을 선택하진 못할 테지만, 적어도 짧은 갈등은 머리를 스칠 법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강박적일 정도로, 그래선 안 된다고만, 그런 짓을 하는 사람을 용서해서는 안 된다고만……. 돌이켜 생각하니 역시 조금 묘하다.
꼭 빼앗는 사람이 아니라 빼앗기는 사람의 입장처럼 느껴진다.
아테올은 내 이런 점을 이상하게 생각해 그런 말을 한 건지도 몰랐다. 그러면, 다른 말은? 서점에 데리고 가서 했던 말들은? 다시 울컥 하고 차가운 덩어리 같은 게 가슴에 치받쳐 올라왔다가, 이내 다시 얼음이 녹듯 스르르 녹아내렸다. 아마도 나를 빤히 쳐다보는 아테올의 눈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깜빡거리지도 않은 채 내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유리 님.”
“…….”
“제가 무섭습니까?”
나는 눈을 깜빡였다. 무서운지 묻는다면, 신기하게도 아니었다. 어젯밤만 하더라도 전생의 일을 떠올리고 발발 떨면서 바닥을 기지 않았는가.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있어도 무섭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내가 천천히 고개를 젓자, 아테올은 만족한 듯 내 허리를 끌어안아 뺨에 입 맞추더니 이불로 몸을 감싸서 일으켰다.
“이만 가야 합니다. 날이 밝은 지 벌써 한참이라.”
“어?”
그 말에 뒤늦게 현실로 돌아와 창 쪽을 보았으나, 두꺼운 커튼을 쳐둬서 해가 어느 정도 떴는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아테올은 직접 침대 앞으로 세숫물을 가지고 왔다. ……황제한테 목욕 시중은 물론이고, 세숫물까지 받는 사람은 정말 이 대륙에 나밖에 없을 것이다.
얼떨떨하게 씻고 수건으로 얼굴을 닦는 사이 아테올은 재빨리 내게 옷을 입혔다. 도대체 아무리 배척되며 살았다 해도 황자인 그가 남 시중드는 것에 이렇게까지 능숙한 이유가 궁금했다. 얼마 전엔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어디서 갑자기 배워오기라도 했나.
“갈까요.”
이미 아테올 자신도 옷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뒤였다. 포털이 있는 마을 뒤쪽 언덕으로 올라가면서 그는 내내 내 손을 잡아주다가, 내가 헥헥거리기 시작하자 아예 나를 안아 들었다.
“내가 걸을 수 있어.”
“대단하시군요.”
“…….”
놀리는 건가? 입술을 꽉 깨물자 아테올은 그런 나를 보고는 픽 웃고 말했다.
“어제는 어떤 꿈을 꾸셨습니까?”
“……꿈?”
갑자기?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꿈이라, 어제는 아무런 꿈도 꾸지 않았다. 아니, 기억하지 못한다는 게 맞겠지. 원래 꿈은 매일 꾸는데 그걸 기억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라고 하니까. 어쨌든 어제는 기절하듯 잠들었다가 눈 뜨니 아침이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아테올이 다시 물었다.
“제가 나오는 꿈은 안 꾸십니까?”
“너…….”
아테올이 나오는 꿈이라면……, 얼마 전에도 꿨다. 상당히 낯간지러운 내용으로. 아테올에게 안긴 상태에서 그 꿈을 떠올리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반응이 왜 그러십니까? 무슨 음탕한 꿈을 꾸셨기에.”
“아니야!”
“그럼, 달콤한 꿈이었나요?”
“아, 아, 아니라고!”
“더듬으시는 걸 보니 맞는 모양이군요.”
“……마음대로 생각하지 마.”
어느새 포털에 다 왔다. 아테올은 나를 조심스레 내려놓고는 허리를 폈다.
“점점 더 긍정만 해주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소리 없이 올라온 손끝이 내 뺨을 톡 눌렀다.
“얼굴이 이렇게 빨간데요.”
“그건 더워서…….”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차갑고 메마른 바람이 휘몰아쳤다. 아테올이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돈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갈까요.”
결국 부정하지 못한 채 포털에 오르고 말았다. 일렁거리는 느낌에 눈을 감았다 뜨자 바깥보다 훨씬 공기가 차가운 지하 공간이었다. 으스스할 정도로 추운 공기에 두 팔을 손으로 감싸며 머리 위에 빛의 구슬을 띄웠다. 어슴푸레 밝아진 지하의 안치실을 잠시 바라보는데 몸이 위로 둥실 떴다.
“……뭐야?”
“길이 좁으니까요.”
“내려올 때는 그냥 왔잖아!”
“내려오는 것과 올라가는 것은 다르지 않습니까?”
순간 너무 맞는 말이라 그대로 입을 다물어 버릴 뻔했지만, 다행히 정신을 차렸다.
“아테올.”
“네.”
“어제 뭐 잘못 먹었어?”
“흠……, 글쎄요, 어제 먹은 것 중에 기억나는 거라면 당신 정액 정도…….”
나는 재빨리 아테올의 입을 틀어막았다. 내가 팔 안에서 허우적거리고 입을 막아대고 난리를 치는데도 아테올은 좁고 가파른 계단을 가볍게 올랐다.
“갑자기 내가 걷는 법을 잊어버리기라도 한 걸로 보여?”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왜 이러는 거야?”
“뭐, 별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당신의 발이 땅에 닿는 것도 아까워서라고 하면 될까요?”
“농담하지 말고.”
“농담으로 들렸다니 유감입니다.”
희끄무레한 빛에 드러난 아테올의 얼굴은 정말 유감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방치된 궁에서 나오자 흐린 하늘 아래에 마차 한 대가 우두커니 기다리고 있었다. 마차로 탑에 돌아가 내가 목욕을 하고 나오는 동안 아테올은 새 옷으로 갈아입고 나갈 준비를 마쳤다. 그는 욕실에서 나온 날 보더니 또 안아서는 침대에 털썩 눕혔다.
“주무십시오, 유리 님.”
“…….”
“그리고 제 꿈을 꿔주세요.”
그렇게 말한 뒤, 아테올은 내 뺨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고 침실을 빠져나갔다. 아테올의 향만이 어렴풋하게 침대 위를 떠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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