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06. 기억이 없으면 사람은 미궁에 빠진다
“그게…… 무슨 소리야. 꼭 당해봐야 아는 건 아니잖아.”
“그럴까요?”
아테올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럴까요, 는 무슨. 당연한 일 아닌가? 내가 화를 내는 건…… 음, 좀 과하게 화를 내는 것 같기도 하고. 그의 말대로 한 번쯤 혹할 수도 있는데 전혀 그런 마음이 들지 않는 건 신기했다.
“이런 이야기를 한번 해봅시다, 유리 님.”
수풀 옆을 벗어난 아테올이 커다란 나무 밑으로 가서 털썩 앉았다. 옆으로 오라는 말은 없었지만, 그대로 눈만 들고 쳐다보는 그에게서 무언의 압박이 느껴졌다. 왠지 어색해진 걸음걸이로 느릿느릿 그 옆에 가서 앉자 아테올은 바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평온하게 흘러가는 한 세계를 누군가가 입맛대로 조종하려 든다면 어떻겠습니까?”
“있을 수 없는 일이지.”
“당신의 감정적으로요? 아니면 현실적으로?”
“둘 다. 신이어도 그런 건 불가능해.”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아테올이 내 쪽으로 조금 몸을 돌려 앉았다.
“우리의 세계 밖에는 무수히 많은 세계가 존재한다. 어떤 사람이든 아주 사소한 우연의 일치로 그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다. 단순한 꿈으로 치부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갑자기 무슨 소리야?”
“옛날에 누가 저한테 해준 이야기입니다.”
“누가?”
“글쎄요.”
또 어깨를 으쓱한 아테올이 내 손을 잡더니 몸을 일으켰다. 딸려 올라가듯 나도 일어나야 했다.
“아직 문을 연 가게가 꽤 있을 겁니다.”
라오르 사람들은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편이었다. 언뜻 내려다보이는 마을엔 아테올의 말대로 곳곳에 불이 켜져 있었다. 아테올은 산길을 완전히 내려갈 때까지 내 손을 놓지 않았다. 마을 시장으로 들어서서 그가 향한 곳은 뜬금없게도 서점이었다.
“……서점? 왜?”
“소설은 이쪽에 있네요.”
내 물음에 답하지도 않고 아테올은 소설 코너로 향했다. 커다란 책장에 두께가 제각각인 책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아테올은 그중 몇 권을 펼쳐 파라락 넘겨보다가 내려놓기를 반복했다. 뭘 찾나 싶어서 내 시선도 자연스럽게 그의 손에 들린 책으로 향했다.
“어쩌면 이런 것들이 전부, 그 우연의 일치와 조우한 사람의 기록일지도 모르지요.”
“…….”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여기는 책 속의 세계였다. 그 책의 등장인물이 하는 말이라 그런지 상당히 여러 의미로 들렸다. 수많은 세계……, 그 세계 중 하나를 들여다본 누군가의 기록.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그저 이곳이 책, 활자 속의 가상 세계라고만 여겼을 뿐. 그런데 아테올의 말대로라면? 이곳이 실존하는 세계이고 나는 책 속이 아니라 다른 세계로 넘어왔을 수도 있다는 뜻인가?
아테올이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뭐지?
“기록은 기록에서 끝내야 합니다.”
책을 덮으며 말하는 아테올의 목소리에 나는 흠칫했다.
“그런데, 만약 그 기록자가 자신이 훔쳐본 세계를 욕심낸다면 어떻게 될까요?”
순간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새빨간 두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아테올은 내가 이방인이라는 걸 알고 있는 건가. 그럴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왜 내게 계속해서 진짜의 자리를 빼앗으라는 식으로 말하는 거지.
알고 있되, 뭔가 잘못 아는 건지도. 배 속이 서늘했다. 먹어서는 안 되는 무언가를 삼킨 것처럼.
“……피곤해.”
내 말에 아테올은 표정을 풀고 책을 제자리에 두었다.
“가까운 곳에 여관이 있습니다.”
그를 터벅터벅 따라가는 동안 머릿속은 기능을 멈춘 듯 부연 안개로만 가득 찼다. 내가 제대로 걷고 있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겨우 발이 땅에 닿고 떨어지는 정도만 느껴질 뿐이다. 여관 건물에 들어서서 방에 들어갈 때까지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쉬십시오.”
내가 고개를 끄덕였는지, 알겠다고 대답했는지,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잠가야 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발은 비척비척 침대로 향했다.
참을 수 없이 졸렸다. 졸리고, 손끝 발끝의 힘이 빠지고, 피가 썰물이 되어 빠져나가는 것처럼 오싹하니 기분 나쁜 감각이 온몸을 들쑤셨다. 답답함에 로브를 벗어 내던졌으나 시야가 훤히 트였음에도 검은 베일이 드리운 것처럼 주변이 잘 보이지 않았다. 숨이 가쁘다. 먹을 약도 없었다. 지긋지긋한 동시에 익숙해지지도 않는 공포가 이때만 기다렸다는 듯이 킬킬거리며 나를 덮쳤다.
“하…….”
숨이 턱 막혔다. 깊고 수압이 강한 물속에 끝없이 잠기는 기분이었다. 살려달라는 말이 저절로 나왔고, 엉엉 소리를 내서 울고 싶었다. 이대로 죽고 싶지 않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어질어질한 머리로 눈을 감지 않기 위해 버텼다. 눈을 감으면 정말로 죽을 것만 같아서.
“유리 님, 문도 안 잠그고……, 유리 님?”
폐로 공기가 들어가지 않는 느낌에 헐떡이고 있는데 어렴풋이 목소리가 들렸다. 익숙하고 부드러운 목소리. 하지만 지금은 별로 듣고 싶지 않은.
아테올이 성큼성큼 다가와서 내 몸을 홱 젖혀 안았다. 새빨간 두 눈이 나를 똑바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배 속이 저릿하더니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벌벌 떨리는 손끝으로 아테올을 밀어내며 겨우 말을 뱉어냈다.
“시, 싫어.”
“유리 님. ……유리.”
“나 그 약……, 먹기 싫어.”
“…….”
아테올은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실수로 고양이라도 걷어찬 듯한 얼굴이었다. 그의 표정이 어떻든 나는 고개를 젓는 게 먼저였다. 그리고 고장 난 것처럼 그 약은 싫어, 먹기 싫어, 라고 말하기만을 반복했다. 점점 숨이 막힌다. 약 기운이 돌고 있는 걸까. 헐떡거리며 떨리는 입술에 무언가 와서 닿더니, 폐부로 공기가 후욱 밀려들었다. 아테올이 내게 입 맞추고 숨을 불어 넣은 것이었다.
몇 차례 같은 일을 반복하자 머릿속에 가득 낀 안개가 조금씩 걷히고 시야가 명확해졌다. 천천히 눈을 깜빡이니 눈에 맺혀 있던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엉거주춤 손을 들어서 푹 젖은 속눈썹과 눈가를 문질렀다. 눈앞이 조금 더 또렷하게 보였다. 아테올이 심각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괜히 머쓱해져 몸을 옆으로 굴려서 그의 품을 빠져나왔다. 애처럼 무섭다고 징징거리는 모습을 들킨 게 부끄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대로 나를 놓아주나 싶던 아테올이 곧바로 따라와 내 등을 감싸서 자기 품에 도로 안았다. 이어 입술이 맞붙었다.
도톰한 입술이 내 입술을 사탕처럼 굴려 빨며 몇 번이고 닿았다 떨어졌다. 아테올과 나누는 키스를 알고 있는 내 입술이 제멋대로 벌어졌다. 아테올은 그 틈으로 당연하다는 듯 혀를 밀어 넣었다.
키스는 길고 달콤했다. 내 입 안을 고루 어루만지고 핥고 빨면서 아테올은 천천히 옷을 벗겼다. 로브 끈이 풀리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어깨를 타고 흘러내린 옷을 손쉽게 벗겨버린 그가 뜨거운 손으로 맨살을 더듬었다. 건조하고 단단한 손바닥이 피부에 착 감겨 달라붙는 것 같았다.
속옷까지 벗겨버리고 자신도 겉옷을 벗은 아테올이 날 안은 채 침대 위로 올라갔다. 가장 좋은 방이라곤 하지만, 시골 여관의 침대는 어쩔 수 없이 어른 남자 둘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삐걱거렸다. 침대 부서지는 건 아니겠지. 터무니없는 상상과 함께 허리를 움츠리자 아테올이 굽혀진 골반뼈 안쪽을 손으로 더듬듯 문질렀다.
몸이 움찔움찔 떨렸다. 그대로 손을 미끄러뜨린 그가 허벅지 안쪽에 자리를 잡고는 커다란 손으로 살을 주물렀다. 감촉을 즐기는 것 같았다. ‘유리’의 몸은 얼굴뿐 아니라 체형 같은 것도 원래의 나와 거의 다르지 않았다. 몸에서 살이 붙은 부분은 엉덩이와 허벅지 안쪽 정도였다.
아테올이 혀끝으로 납작한 가슴 위를 핥으며 내려갔다. 동시에 올려다보는 눈길과 허리를 손가락으로 매만지는 흐름이 너무 익숙해져서, 이제는 몸이 자동으로 반응했다. 배가 바짝 조여드는 게 아테올의 눈에도 보였을 것이다. 아테올은 내 가슴이며 옆구리, 배 위를 깨물고 빨며 진한 흔적을 남겼다.
허리까지 입술을 내렸던 그가 다시 상체를 일으키며 내 다리를 더 벌리고, 자신의 허벅지 위로 얹었다. 자연스레 기우는 몸을 팔로 받친 채 아테올을 바라보았다. 붉은 눈이 열기로 축축했고, 눈가는 붉었다. 멍하니 넋을 놓고 보게 될 정도로 준수한 얼굴이었다. 아테올은 자기 입술을 혀로 핥으며 날 보다가 몸을 더 가까이 맞붙이면서 내 손을 끌어왔다.
“음…….”
뜨겁게 젖은 두 개의 기둥이 손에 잡혔다. 당연히 한 손에는 잡히지 않아 두 손으로 꾹 움켜쥐어야 했다. 아테올의 손이 내 등을 받쳤다. 그 손에 의지해 반쯤 누운 채로 나는 미적미적 손을 움직였다. 손안에서 맥박치는 두 개의 성기가 문질러졌다. 피차 신경이 가장 예민한 곳이다. 마치 감각을 공유하듯이 젖은 살이 비벼질 때마다 숨이 차올랐다. 아테올은 날 안은 채 그저 내가 하는 양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처음엔 손을 열심히 움직였으나 점점 애가 달았다. 이것도 기분 좋지만, 부족했다. 두 손으로 성기를 문지르다가 결국 다시 놓고 아테올의 손을 찾았다. 그는 더듬거리며 뻗은 내 손에 기꺼이 깍지를 꼈다.
“네가 만져줘…….”
어디를? 하고 묻듯이 아테올이 내 귓가에 입 맞췄다.
“……여기.”
나는 아테올의 손을 성기보다 조금 아래쪽으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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