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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의 원수를 공략합니다-90화 (90/93)

90화

06. 기억이 없으면 사람은 미궁에 빠진다

“……뭐?”

그때 내가 세르타에게 뭐라고 말했더라. 바뀐 구조에 대해 언급했던가? 했던 것 같다. 확실히 노을이 더 잘 보이더라고. 듣는 세르타에게 전혀 이상한 기색이 없어서 뭐가 잘못되었는지 눈치채지도 못했는데. 아테올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인을 시험했다?”

“불충함은 알고 있습니다. 다만, 탑주님이 아무래도 이상하신 것 같아서……. 시험하거나 의심한 건 아니었습니다. 단지 탑주님께서는 전에도 종종 이런 일이 있으셨기에, 확인했을 뿐입니다. 원래대로 돌아오실 때까지는 탑주님께 맞추어드려야 하니까요.”

아테올이 날 봤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확인이 의미가 있나 싶은데 아테올은 수긍했다.

“저도 탑주님께서 어딘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역시 클로든도 그랬구나. 뭔가 다 알고 있는 듯한 느낌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대들이 내린 결론은?”

“탑주님이 기억을 잃은 듯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동시에 조금 불안정하시다는 것도.”

클로든은 담담했다. 짧은 침묵이 흐르고, 나는 겨우 입을 열 수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만약에 가짜라면 어떻게 할 건데?”

그러자 두 사람은 동시에 대답했다.

“그럴 리 없습니다.”

……거짓말. 배신당한 표정을 지을 거면서…….

“저희가 탑주님을 못 알아보는 일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건 그들이 장담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실제로 전생에서는 못 알아봤으니까. 지금까지 일어난 적이 없는 일이기에 그럴 리 없다고 확신하는 것뿐. 다른 몸에 있던 심장을 이식해도 그 심장은 주인이 바뀐 걸 모른다. 그것과 같았다.

“알겠다. 우선 물러가라.”

두 사람은 끝까지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침실에서 물러났다. 둘만 남은 후, 아테올이 나를 가만히 끌고 가 의자에 앉히고 자신은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앉았다. 평소와 다른 높이에서 눈이 마주쳤다.

“제가 당신에게 어떤 도움을 드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어디까지 말해야 할지……, 당신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도.”

그가 내 손을 들어 손등에 입 맞췄다. 말캉하고 따뜻한 입술이 닿고, 손등에 한 장신구가 찰랑거렸다.

“우리는 아주 특별하고 비밀스러운 사이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건 농담이었잖아.”

내 말에 아테올이 눈매를 휘며 웃었다.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내 손등에 또 한 번 키스하고 일어섰다.

“내일 조례에 불참한다고 연락해 두지요.”

“왜?”

“어딜 좀 가야 해서요.”

“어디 가게?”

“당신도 가는 겁니다.”

그렇게 말하고 잠시 나갔다 들어온 아테올은 손수 갈아입을 옷을 챙겼다. 거추장스러운 연회용 예복과 달리 움직이기 편한 옷과 가뿐한 로브였다. 장신구를 빼내고 옷을 갈아입는 것까지 도와준 그 자신도 평범한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탑을 나서자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테올은 밤에 어디론가 몰래 이동하는 게 익숙한 사람처럼, 마부에게 으슥한 길로 갈 것을 지시했다. 마차 창밖으로 황궁에 이런 길이 있었나 싶은 곳이 지나갔다. 20분 정도 마차를 탔을까. 마차가 멈춰 서고 아테올이 먼저 내려 내게 손을 내밀었다.

계단을 밟으며 주위를 둘러보니 황궁에, 그것도 탑에서 마차로 고작 20분 떨어진 곳에 있으리라곤 생각도 못 해본 어두침침한 별궁이었다. 심지어 이름조차 모른다. 아무리 황궁이라 해도 손길이 덜 닿는 구역은 있게 마련이다. 이 드넓은 황궁을 전부 반짝반짝 닦아놓을 수는 없으니까.

“유리 님, 이쪽으로.”

주위를 멍하니 둘러보던 나는 아테올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황궁 안이긴 했기에 풀이 무성하게 자란 폐허까진 아니었다.

아테올이 단단히 잠긴 작은 궁의 문을 열었다. 안에서 서늘한 공기가 훅 밀려 나왔다.

“여긴 유령이 나온다는 소문이 있어서 아무도 오지 않지요.”

“……나와?”

“아니요. 제가 만들어낸 겁니다. 사람들의 접근을 막으려고요. 두세 명이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니, 이곳의 유령은 점점 크고 무서운 존재가 되어가더군요.”

하지만 그런 소문이 돌 법도 하다. 궁 내부는 사람이 오래 드나들지 않아서인지 으스스했다.

“지하로 내려가야 합니다.”

다행히 커다란 창에서 달빛이 들어와 계단을 내려가기에는 무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아테올은 내가 넘어질까 걱정하며 내 손을 잡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한 층을 내려가서 긴 복도를 지나, 점점 허름해지는 문 몇 개를 더 통과하니 아까와 달리 좁고 오래된 계단이 나왔다.

“지금 지하 감옥에 가는 거야?”

“그럴 리가요. 여긴 하인들이 쓰는 통로입니다.”

잘 보니 계단은 낡았을 뿐 오르내리기는 편해 보였다. 그리 높지도 않고.

계단을 내려갈수록 창은 없어지고 대신 천장에 붙은 환기구만 늘어났다. 그만큼 어두워졌기에 내가 불을 밝혀야 했다. 반딧불이 같은 동그란 구가 머리 위에서 요정처럼 떠올라 발치를 비췄다.

가장 아래층에 도착했을 때 나는 두 손으로 팔을 감싸고 있었다. 지하…… 5층쯤 될까? 차가운 땅속에 자리해 있어서인지 지금의 계절을 감안해도 무척 추웠다. 아테올이 망토를 벗어 내 어깨에 둘러주었다. 괜찮다고 말하려 했으나 이가 딱딱 부딪칠 정도의 추위가 그걸 막았다. 아테올이 전혀 추워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한몫했다.

“조금만 참으세요. 곧 빠져나갈 겁니다.”

“여, 여긴 대체 어디야?”

“뭐…… 이런저런 것을 보관하던 곳입니다.”

“이런저런, 게 뭔데?”

“외부로 반출하려는 것 중에서 잘 썩는 것들이요.”

쓰레기 말인가? 내 순진한 생각은 문을 열고 들어선 지하실 안쪽을 본 후 사라졌다. 벽을 파서 칸칸이 만들어진 공간. 딱 사람 하나가 누우면 꽉 찰 듯한. 그러니까, 여긴 시신 보관소였다.

“북쪽에 새로 건물을 만든 후로는 사용하지 않는 곳입니다. 아마, 쓰지 않은 지 수십 년은 족히 되었을 겁니다. 지금은 기껏해야 급하게 시신을 옮길 때나 잠깐씩 쓰죠.”

어쨌든 쓰긴 쓴다는 거구나.

“죽은 제 유모가 마지막으로 가르쳐준 은신처입니다. 부황이 장례를 치르지 못하게 해서 한동안 여기에 안치했거든요.”

“……왜?”

“제게 쓸데없는 것을 가르친 죄인이라고요.”

……유모 이야기는 처음 듣는다. 쓸데없는 것이라, 왠지 괜한 트집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지 물어도 돼?”

“그럼요. 제왕학입니다.”

“…….”

황실의 아이라면 누구나 배우는 게 제왕학이었다. 반드시 장자가 제위를 계승한다는 보장은 없으니까. 그런 걸 핑계로 유모를 죽인 뒤 장례도 못 치르게 했다는 건, 선황제가 정말로 아테올에게 어떤 것도 줄 마음이 없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걸 아테올이 똑똑히 알기를 바랐고. 이렇게 듣고 보니 아테올이 지금까지 4황자로 살아남은 것만 해도 기적이었다.

“이쪽입니다.”

아테올이 내 어깨를 안고 안치실 안쪽으로 이끌었다. 먼지 쌓인 잡동사니가 어수선하게 놓여 있었다. 커다란 상자 두 개와 빗자루 따위를 치우자 돌바닥에 길게 그려진 포털이 보였다. 저건…… 라오르로 가는 포털이다. 제국 서부에 있는 작고 고즈넉한 도시로, 여행객이든 뭐든 방문자가 많은 곳은 아니었다. 정보나 그곳의 풍경이 대강 떠오르는 걸 보니 책에서 읽은 모양이었다. 아마도. 음, 별로 중요한 문제는 아니니까.

“그런데, 거긴 왜 가는 거야?”

“가서 말씀드리지요.”

그것도 이 밤중에. 의아했지만, 어쨌든 아테올과 함께 포털에 올랐다. 익숙한 어질어질함과 함께 눈앞의 풍경이 바뀌었다. 라오르 역시 밤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아직 있을 겁니다.”

“뭐가?”

아리송한 소리를 중얼거린 아테올은 내 말에 빙긋 웃기만 할 뿐이었다. 뭐가 있다는 건지도 모른 채 나는 포털을 빠져나와 그를 따라갔다. 눈앞에서 기다리는 건 완만한 산길이었다. 사실 체력이 간당간당했다. 상태창 안 나오려나, 지금 체력 얼마나 남았는지 궁금한데. 느낌상으로는 3 정도밖에 안 된다.

다행히 산길은 길지 않았다. 힘들다는 말이 채 나오기도 전에 아테올은 도착했다며 걸음을 멈췄다. 주위는 무성한 수풀뿐이다. 여기서 뭘 보겠다는 건지. 아테올을 보자, 그는 입술에 손가락을 대더니 발소리를 죽여 천천히 수풀 쪽으로 다가갔다.

버섯이라도 찾는 것처럼 수풀을 조심스럽게 헤친 그가 날 보곤 손짓했다. 나도 덩달아 살금살금 그쪽으로 향했다. 그의 손짓을 따라 고개를 숙였을 때 보인 건 내 상반신 정도 크기쯤 되는 너구리 두 마리였다. 둘 다 깊이 잠들어서 털에 덮인 몸통이 새근새근 오르락내리락했다. 평범한 너구리 같지만 너구리는 아니고, 마수로 보였다.

“……레이랑 로이 같네.”

내 말에 아테올이 나를 보더니 웃었다.

“왜 웃어?”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으니까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내 반응을 예상한 게 맞아서 즐겁다는 건가. 아리송해져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는데, 수풀을 다시 덮고 일어난 아테올이 물었다.

“유리 님. 왜 ‘진짜’의 자리를 빼앗는 것에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하십니까?”

“내가 예민한 게 아니야……. 정상적인 반응이라고.”

“하지만 당신은 지나칠 정도로 화를 내십니다.”

“내가……?”

하지만, 정말 이런 반응은 당연한 것 아닌가?

“전혀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마치.”

아테올이 한 호흡을 쉬더니 이어 말했다.

“그런 일을 당해보기라도 한 것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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