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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의 원수를 공략합니다-85화 (85/93)

85화

06. 기억이 없으면 사람은 미궁에 빠진다

“시우를……? 그럴 수 있어?”

“대공가는 대가 바뀔 때마다 하나씩, 황제에게 무엇이든 부탁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죠. 필리아의 열쇠라 부르는 권한입니다.”

소원권 같은 건가. 사실, 최초의 대공이 북부로 간 것은 유배에 가까웠다. 황실이 전혀 그 대가를 치르지 않을 수는 없었을 터다. 그게 대를 이어 계속 내려오고 있다는 건가. 그리고 지금의 대공은 그걸 아직 사용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걸 사용할 거라고?”

“아뇨. 그러길 바라고 여태 구금을 연장해 왔는데, 더는 어려울 것 같아서요. 역시 이 정도로는 꿈쩍도 하지 않는군요. 시우가 더 이상 종이 쓰레기를 만들게 두느니 풀어주는 게 낫겠습니다.”

“뭐야……. 그렇게 중요한 걸 사소한 일에 쓸 리가 없잖아.”

“혹시나 했죠. 원래 대공 같은 사람이 한번 사랑에 눈이 멀면 터무니없는 짓을 하는 법이라.”

사랑에 눈이 멀었다고 할 만큼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시우한테 좀 마음이 있어 보이긴 해도. 내가 시우와 대화하자 질투하던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찔러도 바늘 하나 안 들어갈 이미지로 그러는 게 좀 뜻밖이긴 했지만, ‘황제한테 뭐든 들어달라고 할 수 있는 소원권’을 섣불리 사용하려 들 정도로 보이지는 않았다.

“왜 그렇게 생각했어?”

“글쎄요.”

“글쎄요는 대답이 아니야.”

“저와 대공은 은근히 닮은 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 더 싫어하는 거고.”

“너랑? 대공이?”

나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대공과 아테올. 완전히 대척점에 있는 것 같은 캐릭터들이었다. 아테올이 피식 웃었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도 이해가 갑니다만, 동족끼리만 맡을 수 있는 냄새라고 해두지요.”

“……그러니까, 너라면 필리아의 열쇠를 사용할지 진지하게 고민했을 거라는 뜻이야?”

풀어 설명하자면 그랬다. 나는 왜 대공이 그런 중요한 권한을 함부로 쓸 거라 생각했는지 물었다. 거기에 돌아온 대답이 ‘그녀와 나는 닮은 부분이 있으니까’다. 그건 곧 아테올이라면 단지 구금당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자신이 가진 가장 막강한 권한을 사용하려 했으리라는 말로 들렸다.

“네, 맞습니다. 사랑하는 당신이 구금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터질 것 같으니까요.”

“감옥에 들어간 것도 아니고, 어디 위험한 곳에 유폐된 것도 아닌데.”

“구금은 구금이지 않습니까.”

“……아테올.”

어느새 아테올은 내 손가락을 쥔 채 손등에 입술을 대고 있었다. 나는 참지 못하고 그를 불렀다. 그가 붉은 눈을 들어서 나를 보았다.

“너 좀 이상한 것 같아.”

“조금만 이상하다니 다행이군요.”

“아니, 며칠 전…… 그저께쯤부터, 꼭 다른 사람인 것 같아!”

아테올이 과하다. 지나치다. 정말 마물이 아테올을 잡아먹고 껍데기라도 뒤집어쓴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는 이상할 만큼 다정하고 부드러웠다. 꼭 나를 몇 년 동안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 연인 대하듯 군다. 아테올이 원래 의뭉스럽고 이해할 수 없는 구석이 있는 건 사실이었지만, 이건 이상해도 너무 이상했다.

“저런. 싫어도 적응하셔야 할 겁니다.”

“뭐?”

“저는 원래 이랬으니까요. 어쩌겠습니까? 원래 이렇다는데 당신이 적응해야지?”

“…….”

그리고 다른 말을 더 꺼내기 전에 그는 내게 키스했다. 할 말이 없거나 곤란할 때는 키스로 무마하는 거라고 하던 그의 목소리가 문득 떠올랐다. 아테올이 대체 왜 이러는 걸까, 그건 결국 휴가가 끝날 때까지 알 수 없었다.

***

「……그럼에도 불고하고 용서해 주심에 넓으신 아량을 존경드립니다. 직접인 인사를 드리고 싶은 마음을 헤아려주세요.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탑주님,

수도애서 뵙겠습니다.

시우 드림」

휴가가 끝나고 며칠 뒤, 나는 시우로부터 또 장문의 편지를 한 통 받았다. 아테올이 그의 구금을 해제한다는 서신을 보내고 곧바로 돌아온 답장이었다. 쓰면서 흥분했는지 평소보다 철자도 어법도 엉망이어서 한참을 읽어야 했다. 요약하자면 구금에서 풀려나게 해줘서 너무 고맙고, 더 긴 인사는 수도에 와서 내 얼굴을 보고 하겠다는 말이었다.

무슨 구금을 풀어준 정도에 이렇게 흥분하나 했더니, 구금이라는 게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냥 방에서 못 나오게 하는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방의 넓이부터 놓을 수 있는 가구, 하루에 할 수 있는 행동 범위, 먹는 음식까지 전부 제한이 생긴다. 창살이 없을 뿐 감옥에 갇힌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고 보니 4황자궁에서도 일이 터진 후에 방을 옮겼었던 것 같다.

반갑지 않은 건 수도로 찾아오겠다는 부분이었다.

명분은 직접 만나 감사 인사를 하고, 지금까지 수고해 준 황제의 기사들(그러니까 감시자들)을 배웅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혹시나, 다시 수도로 온다는 게…….

대공이 그때 말한 ‘때’가 되어서 그러는 건 아닐까.

감사 인사라면 서신으로도 충분할 텐데 왜. 불안한 마음에 방 안을 이리저리 오가고 있는데 문이 빼꼼 열렸다. 아테올인 줄 알고 돌아보지도 않았더니 문 쪽에서 탑주님, 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돌아보자 포니테일을 한 자그마한 머리통이 문틈으로 쏙 나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벨?”

“네. 멋대로 문을 열어서 죄송합니다, 탑주님. 한참 기다렸는데 대답이 없으셔서…….”

“내가?”

부르는 걸 못 들을 정도로 생각에 잠겨 있었던 모양이다. 들어오라고 손짓하자 벨은 가벼운 몸짓으로 방에 들어오더니, 밖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듯이 고개를 뻗어 두리번거리고는 문을 닫았다.

“왜……? 지금 도망치는 중이야?”

마치 주위를 경계라도 하는 모습에 의아해서 묻자 벨이 히히 웃었다.

“아니요. 지금부터 탑주님이랑 도망치려고요. 클로든 님이 잠깐 자리를 비우셨거든요. 가실래요? 밖에서 불꽃놀이를 한대요.”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벌써 어디서 났는지 내 외출용 로브를 손에 들고 있었다. 불꽃놀이……. 제법 끌리는 말이었다. 어차피 방에 혼자 있어 봐야 계속 불안한 생각이나 하게 된다. 갑작스러운 외출이 약간 귀찮았지만, 침대에 눕지도 못하고 서성거리며 시간을 보낼 걸 생각하면 차라리 잠깐 나갔다 오는 게 나을 듯했다.

결과적으로 잘한 행동이었다. 왁자지껄한 시장 한구석에 앉아 터지는 불꽃을 보고 있자 불안한 마음이 잠깐이나마 잊혔다. 벨은 내게 연유를 뿌린 튀긴 빵이며 구운 새우, 과일 사탕, 산딸기 주스 같은 걸 계속 사다 입에 물려 주었다. 예전이었다면 혈관이 좀 걱정되었을 텐데, 다행히도 이 몸은 동맥 경화나 위장 장애의 우려가 없었다. 배가 좀 부를 뿐.

마지막 불꽃이 화려하게 하늘을 수놓고 나서도 사람들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오히려 음악이 더 흥겨워지고, 자기들끼리 춤을 추기 시작했다.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서 나는 벨의 팔을 잡아당겼다.

“이만 돌아가자.”

“그럴까요?”

몸이 약간 피곤했다. 상태창이 사라지기 전이었다면 남은 체력을 확인한 뒤, 좀 버틸 수 있을 것 같으면 버텼을 텐데 수치로 보이는 게 없으니 알아서 사려야 했다.

벨과 함께 포털이 있는 집 근처 골목길에 들어섰을 때였다.

끼이잉…….

“……벨, 힘들어?”

“제가 낸 소리가 아니에요.”

하긴, 벨의 목소리랑은 다르긴 했다. 그럼 무슨 소리지? 나와 벨은 동시에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멈칫했다. 골목 구석에 쓰레기처럼 버려진 채 방치된 작은 상자. 그 안에서 뭔가, 일주일 내내 먼지를 닦은 걸레 비슷한 게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끼잉, 끼잉…….”

하는 소리를 내면서. 걸레는 떨지 않고 소리도 내지 않는다. 나보다 용감한 벨이 성큼 다가가서 지저분한 회색 뭉치를 두 손으로 들어 올리더니 헉 하고 눈을 둥글게 떴다.

“유리 님, 이것 좀 보세요!”

그녀는 마치 갓 태어난 동물의 왕을 자랑하는 제사장 맨드릴 원숭이처럼 살아 있는 먼지떨이를 들어 올렸다.

“개예요, 완전히 새끼! 개 새끼! 누가 버렸나 봐요!”

“……강아지. 아니면 하다못해 새끼 개라고 해.”

“뭐든요! 어쩌죠? 아직 살아 있어요.”

“살아 있는 건 나도 알아. 음.”

오늘 새벽엔 무척 추워진다고 했다. 지금도 덜덜 떨고 있는데 새벽의 추위를 만나면 무사하지 못할 게 분명했다. 보란 듯이 상자 속에 들어 있는 걸 보면 버려진 것도 맞고. 벨은 동물을 유기하는 나쁜 놈들을 매섭게 비난하고 있었다. 버린 사람이 들었다면 사흘은 잠을 못 잤을 엄청난 언어였다.

“진정해, 벨. 일단 우리가 데리고 가자.”

“네? 정말요?”

“다른 애들이랑 같이 키우면 되지.”

“하긴, 클로든 님이 잘 돌봐주시겠네요.”

“응. 아니면…….”

“아니면?”

“……아무것도 아냐. 일단 가자.”

“네.”

벨은 진동벨처럼 쉼 없이 떠는 먼지떨이를 소중히 안고 날 따라왔다. 세탁실을 통해서 방에 돌아가자 클로든이 있었다. 외출복 차림에 출처 모를 개까지 안고 있으니 우리가 같이 나갔다 왔다는 건 숨길 수 없을 것이었다. 클로든의 시선은 가장 먼저 벨의 품으로 향했다.

“……레이안 경, 그건?”

“길에서 불쌍하게 떨고 있는 걸 데리고 왔습니다. 그냥 두면 얼어 죽을 것 같아서요. 아직 어린 개……, 아니, 강아지입니다.”

클로든은 한숨을 내쉬더니 하인을 불러 강아지를 씻기게 했다. 털까지 보송보송하게 말리고 나오자 강아지는 몰라볼 만큼 귀엽고 깜찍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주인을 찾아줄까요? 아니면 탑에서.”

어느새 준비해 온 강아지 먹이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클로든이 말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다.

“……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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