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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의 원수를 공략합니다-84화 (84/93)

84화

06. 기억이 없으면 사람은 미궁에 빠진다

항상 이랬긴! 입에 침이나 발라라. 내게 독약을 내밀던 얼굴이 떠올라 울컥했다가, 아, 그건 지금의 아테올이 아니지, 라는 사실을 간신히 상기하고 가라앉혔다. 내게 독약을 주는 아테올은 이렇게 어느 순간 불쑥불쑥 머리에 떠오르곤 했다. 그 앞에 무력하게 앉아 있는 나도.

“얼굴이 붉네요. 이만 나갈까요?”

아테올이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더니 말했다. 잔뜩 지친 상태였기에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나를 안고 침실로 나왔다. 창밖은 이미 해가 완전히 떠올라 있었다. 두꺼운 비단 커튼을 전부 다 내린 그는 나를 침대에 눕히고 자신은 옷을 갖추어 입었다.

“어디 가?”

“쓸데없이 바쁘군요. 황제 자리도 마냥 좋지는 않습니다.”

아, 레사와 세르타를 문책하는 일도 아직 남아 있었다. 세르타 이야기를 한 번 더 못 박을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역효과만 날 게 분명했고, 무엇보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아테올의 표정이 떠오르자 더는 언급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갑자기 눈앞에 새빨간 경고창이 나타났다.

[체력 경고! 체력이 1까지 떨어졌습니다. 당장 안정을 취하세요!]

“…….”

좀 빨리 알려주라. 대뜸 1까지 떨어져 버리면 대비할 틈도 없잖아. 온몸이 뻐근하고 나른한 게 체력이 떨어졌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경고가 없어서 안심하고 있었는데.

상태창을 욕하면서 잠에 빠져들었다. 악몽이나 두려움을 느낄 새도 없는, 무의식으로 빨려드는 듯한 잠이었다. 잠결에 뺨에 아테올의 입술이 닿은 느낌이 들었다.

***

세르타에게는 구금 10일과 근신 30일, 반년 감봉 처분을 내렸다. 레사와 같은 처벌이었다. 아테올은 레사를 처벌한 뒤 나에게 세르타의 처리를 맡겼고, 나 역시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기사단장 대리는 벨이 맡았다.

일 아닌 일을 마치고 쉬고 있는데 클로든이 편지를 가지고 왔다. 다른 건 전부 내가 휴가 중이라는 이유로 걸러지니 남는 건 자연스레 시우의 편지뿐이다. 받아 들려고 본 쟁반에는 편지와 함께 두툼한 봉투도 올라와 있었다.

“이건 뭐야?”

“편지에 동봉되어 왔습니다. 탑주님께 같이 전달을 부탁드린다고 하더군요.”

의아해서 봉투부터 뜯었더니 두꺼운 종이 뭉치가 나왔다. 소설이었다. 고급 종이를 비단실로 단정하게 엮은 뭉치……. 두껍기도 엄청 두꺼웠다. 도저히 펼쳐 볼 엄두가 나지 않아서 편지부터 읽었다. 이번에도 별다른 내용은 없었다. 그냥 반성하고 있다는 말을 구구절절 잘 풀어 썼을 뿐.

‘시우는 반성하지 않습니다.’

상태창이 그렇게 말해서인지, 서툰 언어로 쓰인 이 편지의 긴 내용 어디에서도 시우의 진심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지막 줄까지 대강 읽고 편지를 접는데 옆에서 쑥 뻗어온 손이 그것을 낚아채듯 가지고 갔다.

“연애편지라도 받으셨습니까?”

“무슨 소리야. 시우가 보낸 거야.”

“그럴 줄 알았습니다.”

알면서 왜? 그가 읽어도 되냐는 듯이 손에 든 편지를 흔들었다. 어차피 읽으려고 가져갔으면서 묻기는.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선 채로 편지를 펼쳐 눈으로 훑었다.

“읽는 김에 이것도 읽어.”

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두꺼운 종이 뭉치를 아테올 쪽으로 밀었다.

“소설을 써서 보내드립니다, 탑주님의 무료한 시간에 부디 도움이 되면 합니다. 문장이 엉망이군요. 소설?”

“언어가 서투니 어쩔 수 없지. 이거야.”

종이 뭉치를 손가락으로 톡톡 치자 아테올이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그러더니 픽 웃으며 편지를 내려놓고, 종이 뭉치를 들어 파라락 넘긴다. 내용이 눈에 들어오기는 하나 싶었는데 마지막 장에서 종이를 덮더니 툭, 영 쓸모없는 것이라도 던지듯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전혀 반성을 안 하는 모양입니다.”

“그래?”

“그러니 소설이랍시고 이딴 종이 쓰레기를 보내지요. 당신의 시간은 금처럼 귀하니 이런 걸 읽느라 낭비하기엔 아깝습니다. 이대로 버리죠.”

“무, 무슨 내용인데 그래.”

저렇게까지 말하니 오히려 궁금해졌다.

“양녀의 계략으로 버림받은 공녀가 돌아와서 복수한다는 내용이요.”

“저번에도 그 내용이었는데.”

혹시 같은 걸 좀 수정해서 보낸 건가? 새로 썼다더니. 하지만 종이를 좀 들춰서 읽어 보자 등장인물의 이름도, 세세한 설정도 다 달랐다. 내용만 같은 모양이다.

“저번에도? 이번이 두 번째입니까?”

“응.”

“낯짝이 두껍군요, 역시.”

아테올은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젓더니 아예 내 손에서 소설 뭉치를 가지고 가 화로에 버렸다. 종이는 순식간에 타들어 갔다. 아니, 그래도 태울 것까진. 컴퓨터는커녕 타자기도 없는 세상이라서 그거 손으로 다 쓴 걸 텐데.

“모처럼 온 휴가인데, 안 그래도 황금 같은 시간을 구태여 쓰레기통에 처박을 필요가 있습니까. 나가죠.”

손수 내 로브를 가지고 온 아테올이 후드까지 단단히 씌우더니 나를 안아 들었다. 척척 걷는 걸음에는 조금도 망설임이 없었다.

“혼자 걸을 수 있어.”

“저는 당신을 안고 걸어야 할 것 같은데요.”

“대체 왜? 적절한 이유가 있어?”

“당신을 안고 있어야 마음이 안정됩니다.”

아테올은 내가 자기 애착 인형이라도 된다는 것처럼 말했다. 어이가 없어서 대꾸할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가 시종도, 호위도 모두 물리고 향한 곳은 구석진 숲길이었다.

“걷기 나쁘실 테니 계속 안고 가겠습니다.”

그럼 지금까지는 왜 안고 온 건데……. 우리가 지나온, 대리석이 깔린 말끔한 길을 보았다가 아테올에게 시선을 주자 그는 눈만 찡긋할 뿐이었다. 안긴 채 봐서인지 모르겠지만, 숲길도 걷기 아주 나빠 보이지도 않았다. 그냥 조금 외진 산책로라고 할까. 바닥에 깔린 낙엽이 푹신해 보였고, 길 양쪽으로 드리워진 나무는 이파리가 색색으로 물들어 정취가 있었다.

그렇게 숲길을 한참 걸어서 나와 아테올은 유리로 된 작은 온실에 도착했다. 아테올이 날 안은 채 별 힘도 들이지 않고 온실 문을 열었다. 온실이라고는 하나 사방이 유리로 되어 있고, 커다란 창이 열린 채여서 전혀 답답하지 않았다. 창을 통해 들어온 걸로 보이는 낙엽이 군데군데에 떨어진 것도 지저분하다기보다는 적절한 장식으로 느껴진다.

화로가 타닥거리며 타고 있는 온실 중앙에는 침대만큼 커다랗고 푹신한 안락의자와 따뜻해 보이는 모피 이불이 있었다. 나는 아테올에게 안긴 채 온실 안을 바라보다가, 또 문득 기시감을 느꼈다. 여기에 와본 듯한 기분이 든다. 둘레를 장식한 가을꽃의 색감, 맑은 물이 흐르는 작은 분수대, 돔 형태의 천장에서 들어오는 금빛 햇살까지.

“당신과 저만 들어올 수 있는 비밀 정원입니다.”

“시종이나 하인은?”

“마법으로 관리되어 아무도 들어오지 않지요. 이곳은 항상 이 모습입니다. 가을이 아닌 계절에 찾아와도요.”

아테올은 말하며 나를 안락의자에 내려놓았다.

“당신이 좋아하시는 간식을 준비하라고 해두었습니다. ……온 것 같군요.”

잠시 온실 밖으로 나갔던 그가 멀리까지 걸어가, 시종으로부터 쟁반을 받아서는 돌아왔다. 걸음이 빨라 돌아오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이곳에서 난 감으로 만든 다과를 좋아하시니까요.”

“여기서 난 감……? 그걸 어떻게 알아? 먹어본 적도 없는데.”

애초에 여기서 감이 나는지도 몰랐다.

“드셔보세요. 좋아하실 겁니다.”

아테올은 내 말에 웃으며 말하곤 쟁반을 덮은 비단을 치웠다. 감의 모양을 그대로 흉내 내 만든 케이크와 차, 한입 크기의 파이, 더운 기가 가시지 않도록 그릇 밑에 작은 초를 넣은 수프, 과일 같은 게 잔뜩 놓여 있었다. 아테올이 스푼과 케이크를 내 쪽으로 더 가까이 밀었다.

설탕물을 입혔는지 주홍색으로 반짝거리는 동그란 케이크는 진짜처럼 만든 감꼭지가 붙어 있어서 무척 귀여웠다. 숟가락을 대는 게 아까울 정도로. 하지만 보고 있자 침이 고였다. 스푼을 밀어 넣자 구름처럼 폭 들어가는 케이크를 크게 떠서 입에 넣었다. 케이크는 무척 차가웠고, 진한 감 맛이 입 안에 확 퍼졌다. 아테올의 말대로였다. 연달아 두 번이나 더 먹고 나서 차를 마시자 달달한 입 안에 차의 향과 맛까지 어우러져 기분이 좋아질 정도였다.

“마음에 드십니까?”

“……응.”

신기할 정도로 입에 맞았고, 왜인지 이 맛이 익숙하게 느껴졌다. 가짜 탑주도 이 맛을 좋아했던 걸까. 천천히 먹으려고 했는데 어느새 마지막 한 조각만 남아 있었다. 스푼으로 그것을 떠서 먹으려다가, 충동적으로 아테올에게 내밀었다. ‘뭡니까?’라고 하며 눈을 둥글게 뜰 줄 알았더니 아테올은 순순히 입을 열었다. 아니, 순순히 열었다기엔 아주 짧은 순간 쓴웃음 비슷한 걸 지은 것 같기도 했다. 단 거 싫어하나.

“나 혼자 다 먹었네.”

괜히 머쓱해져 말하자 아테올은 입에 있던 걸 금방 삼키곤 대답했다.

“저는 이 한 조각이면 충분합니다.”

“그, 그래……? 차도 마셔.”

“그럴까요?”

아테올은 망설임 없이 내가 먹던 찻잔을 가져가 한 모금 마셨다. 또다시 그의 눈에 묘한 빛이 스치고 지나간다. 내가 아테올을 계속 보고 있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정도로 찰나였다. 뭐지, 무슨 생각을 한 걸까. 음, 중요한 문제는……. 중요한 문제가 아닌가? 잠시 혼란에 빠지려는데 아테올이 입을 열었다.

“슬슬 대공이 시우를 풀어 달라고 요청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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