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06. 기억이 없으면 사람은 미궁에 빠진다
새벽에 기이한 비린내를 맡고서 잠에서 깨어났다. 어렴풋한 어둠 속에서 눈을 뜬 나는 그대로 다시 졸도할 뻔했다. 침대 주변이 온통 피바다였고, 그 위에 아테올이 검을 비스듬히 든 채 서 있었다.
“뭐, 뭐야…….”
“움직이지 마세요. 침대 바깥쪽에도 피가 조금 튀었습니다. 묻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는 너는, 이라고 말하려 했으나 놀랍게도 아테올은 피 웅덩이를 직접 밟은 맨발만 제외하면 어디도 지저분해진 구석이 없었다. 그가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내고는(심지어 이 과정에서도 몸에 피가 안 튀었다) 검집에 넣더니 내 쪽으로 다가왔다. 찰박거리는 소리가 섬뜩했다.
“쥐새끼가 몇 마리 숨어들어서요……. 모처럼 잘 자고 있었는데 아쉽군요.”
그 몇 마리 쥐새끼는 어둠 속에서도 알 수 있을 만큼 무참한 꼴로 쓰러져 있었다. 눈에 띄지 않는 검은 옷에 바닥에 떨어진 작은 무기. 암살자였다. 여전히 피가 울컥거리며 흐르는 걸 보면 아직 죽지 않은 듯했는데, 초점 없는 눈을 보니 살아날 가망은 없었다.
아테올은 깨끗한 두 손으로 내 옷을 여며 정돈하고 이불로 감싼 뒤 바깥을 향해 말했다.
“이제 들어와도 좋다.”
말과 거의 동시에 문이 열리고, 클로든이 시종 여럿과 함께 들어왔다. 시종들은 시신을 밖으로 옮긴 뒤 재빠르게 엉망이 된 침실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클로든이 침대를 빙 돌아 내게 와서 상태를 살폈다.
“괜찮으십니까?”
그러나 걱정이 가득한 그의 손길은 곧 멀어졌다. 정확히는, 아테올의 손에 밀려났다. 아테올은 내 어깨를 끌어안아 자기 쪽으로 당기곤 클로든을 보았다.
“탑주님은 괜찮다. 새 침실을 준비하고, 놀라셨을 테니 따뜻한 마실 것을 준비하거라.”
“예, 폐하.”
“그리고 침실로 세이어 경과 크로일러 경을 부르도록.”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본 클로든이 사라진 뒤, 다른 시종들이 곧 우리를 새 침실로 안내했다. 급하게 단장한 티가 조금도 나지 않는 화려한 침실에는 옅은 향이 피워져 있었다. 코를 찌르는 피 냄새가 사라지자 좀 살 것 같았다.
“유리 님.”
아테올이 나지막하게 나를 불렀다. 눈을 들어 쳐다보자 그는 내 입술에 가볍게 키스하며 손을 옆으로 뻗어 찻잔을 집었다.
“놀라셨습니까?”
“조금.”
“드세요.”
찻잔의 가장자리가 입술을 눌렀다. 벌꿀과 섞인 허브 향이 훅 올라오고, 곧이어 딱 마시기 좋을 만큼 미지근한 액체가 입 안으로 넘어왔다. 턱을 살짝 들어 올리는 아테올의 손길에 나도 모르게 목을 움직여 입 안의 약차를 삼켰다. 그렇게 어린애나 동물한테 하듯이 차 한 잔을 다 먹인 아테올은 다시 입술을 맞대며 키스했다. 쌉쌀한 약차 냄새가 서로의 입 안을 오가며 뒤엉켰다.
입술이 떨어진 후에야 나는 내가 직전까지 상당히 긴장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잠에서 깨자마자 사람이 죽은 현장을 목도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분명 침실 안은 그윽한 향기로 가득한데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직도 피 냄새가 나는 것 같아.”
“향을 좀 더 태울까요?”
“아니……. 너는? 넌 괜찮아? 다친 곳은?”
그제야 안위가 걱정되어 묻자 아테올이 고개를 살짝 모로 기울이고는 부드럽게 웃었다. 순간 가슴이 덜컹했다. 원래 아테올이 이런 식으로 웃던가? 이건 너무…… 다정한데.
“놀라서 마음을 조금 다쳤습니다. 위로해 주시겠습니까?”
장난은. 내가 찡그리며 가슴을 퍽 때리자 그는 맞은 자리를 문지르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굉장한 위로네요. 덕분에 다 나은 것 같습니다.”
뭐라 한마디 더 하려다가 뒤늦게 그가 레사와 세르타를 불러두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문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아테올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아무렇지 않게 클로든을 불렀다. 문이 열리고, 긴장한 얼굴의 레사와 세르타가 들어왔다.
“경들.”
“폐하, 탑주님.”
“덕분에 새벽에 갑자기 침실을 옮기는 수고를 하게 되었어.”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두 사람은 동시에 말하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내 호위 기사인 세르타와 아테올의 호위 기사인 레사. 원래대로라면 암살자가 침실까지 들어오기 전에 그들이 알아채고 먼저 처리했어야 했다. 그게 늦어져 아테올이 직접 검을 뽑게 만든 것은 문책받아야 할 일이 맞았다. 하지만, 나는 아테올의 팔을 가볍게 잡았다.
“유리 님?”
“세르타의 처분은 내가 알아서 할게.”
어째서요, 라고 묻듯 아테올이 고개를 갸웃했다.
“세르타는 내 사람이고……, 너희 둘은 원래 앙금이 있으니까.”
“……지금 제가 지나간 감정 때문에 크로일러 경에게 과한 처분을 내릴까 봐 걱정하시는 겁니까?”
순식간에 분위기가 싸늘히 식었다. 고개를 숙인 두 기사단장의 정수리에서도 당황이 느껴졌다. 그제야 내 말실수를 깨닫고 아테올을 보았다. 화를 낼 줄 알았는데, 그는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니, 꼭 그렇다는 게 아니라.”
“괜찮습니다.”
“어?”
“탑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시면 됩니다.”
그렇게 말하며 웃는데…… 나도 모르게 딸꾹질이 나올 정도였다. 침실의 분위기는 이미 걷잡을 수 없이 얼어붙었고 누구도 입을 떼지 못했다. 거기서 총대를 멘 건 레사였다.
“폐하.”
“…….”
아테올이 그녀 쪽을 쳐다보았다.
“어떤 벌을 내리시든 달게 받겠습니다. 내일 아침, 다시 문책을 들어도 괜찮을는지요.”
“아. 그래.”
잠깐만. 이대로 저들이 나가 버리면 안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러나 아테올은 가볍게 손짓했고, 레사가 벌떡 일어나더니 안 나가려 버티는 세르타까지 질질 끌다시피 해서 침실을 빠져나가고 말았다.
“너희도 모두 물러가라. 탑주님께서는 더 주무셔야 할 듯하니.”
잠깐만! 너희 나가면 나 절대 못 잘 것 같아! 붙잡으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클로든을 포함하여 시종들은 내가 한시라도 빨리 쉬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아테올의 묵직하고 말 없는 위협에 당해내지 못한 건지, 모두 순순히 물러가 버렸다. 둘만 남은 침실에 침묵이 감돌았다. 아테올이 빤히 나를 쳐다보았다. 정적을 견디지 못하게 된 내가 결국 입을 열었다. 그가 왜 화가 난 건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테올?”
“네.”
“……너도 소유욕 같은 게 있어?”
그 말에 아테올이 침대를 짚고 있던 팔을 삐끗했다. 아테올의 표정이 점점 풀어지더니 결국에는 피식 웃었다. 왜 웃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얼굴을 보자 쿵쿵 뛰던 가슴이 그제야 진정되는 듯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있지 않을까 합니다만…… 당신도 지지 않을걸요.”
“내가? 왜? 아닌데…….”
“아닙니까?”
“그런 생각은 해본 적도 없어…….”
그러자 좀 더 웃은 아테올이 나를 침대로 밀어 쓰러뜨리며 말했다.
“그러면 이제부터 해주십시오.”
말과 동시에 아테올은 기껏 정돈해 입은 옷 사이로 손을 집어넣었다. 한번 열을 품었던 몸은 다시 달아오르는 것도 금방이었다. 그의 손길이 피부를 쓸기 시작하고 나는 몸을 비틀었다. 잠들기 전에도 느꼈지만 역시 이상했다. 아테올이 잠자리에 관해 잘 안다는 느낌은 원래도 받았다. 하지만, 이 정도까진 아니었다.
“으, 흐으읏……!”
안을 파고든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이며 말랑한 살을 퍽퍽 눌렀다. 배가 찌릿한 느낌과 함께 아래가 저절로 좁아지며 그의 손가락을 조였다.
“원래 당신은 조금 거칠게 하는 쪽을 좋아하셨죠.”
아테올이 웃음기가 어린 낮은 목소리로 내 귀에 속삭였다. 목소리가 마약처럼 온몸에 녹아 스미는 것 같았다.
“내, 내가, 언제에…….”
“언제나.”
말과 동시에 그는 완전히 풀어지지 않은 내 아래로 몸을 밀어 넣었다. 온몸에 전류가 내달리면서 발끝이 쭉 펴지고, 두 손은 침대보를 움켜쥐었다. 한껏 뜬 눈에 눈물이 잔뜩 맺혔다가 투둑투둑 흘러내리는 것을 아테올이 그대로 입술을 묻어 핥았다. 그의 말대로 행위는 다소 거칠었으나 나는 몇 번이나 절정이 겹치고, 쉰 목소리로 엉엉 울 때까지 느꼈다. 더는 내가 언제 그랬어, 난 싫어, 라는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나를 다시 씻기기 위해 욕실로 데리고 들어간 아테올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는 행동으로 약간의 화를 드러내면서 민망함과 창피함을 감추는 일뿐이었다. 그마저 아테올은 다 안다는 듯이 아무런 말이 없는 내게 혼자서 주절주절 잘도 떠들며 나를 씻겼다.
“몇 번이나 말씀드리지만, 황제에게 목욕 시중을 받는 사람은 이 대륙에서 당신이 유일합니다.”
그 말에 나는 결국 입을 열었다.
“다, 다른 황제들도 해줄 수도 있잖아…… 자기 황후한테.”
“음, 그거 좀 기분 좋게 들리는군요.”
“뭐? 왜?”
“당신이 제 황후라는 것 같아서요.”
결국 난 아테올에게 욕조의 물을 확 끼얹었다. 그는 제대로 피하지도 않고 물을 맞으며 웃을 뿐이었다. 그러더니 비누 거품으로 미끌미끌해진 내 몸을 껴안고 입 맞췄다. 정말…….
“너 이상해…….”
“제가요?”
“그래. 이상해.”
“어떤 점이 이상합니까?”
“나한테 너무, 으음.”
“너무?”
“잘해줘.”
“잘해주는 게 이상한 겁니까.”
그게 아니라, 하며 나는 다시 물을 끼얹었다. 아테올은 이번에도 피하지 않았다. 금발을 타고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저는 항상 이랬습니다. 앞으로도 이럴 거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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