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06. 기억이 없으면 사람은 미궁에 빠진다
“설마요. 제가 우는 게 보고 싶으십니까?”
고개를 든 아테올의 얼굴은 정말 멀쩡했다. 뭐야, 괜히 놀랐네. 잘못 본 모양이다. 하긴 아테올이 울 리가 없지. 호감도 100%가 되면 특별한 일이 일어난다더니…… 휘황찬란한 이펙트 같은 것도 없이 조용했다. 대체 그 특별한 일이 뭔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아테올은 나를 안고 그대로 침실로 향했다. 조금 전의 묘한 분위기에 대해 물을 틈도 없이, 키스로 정신을 빼놓고 침대에 눕혀 옷을 벗겼다. 그는 내 입술을 깨물고 혀끝을 핥고, 혀를 내밀게 해서 아플 정도로 세게 빨며 옷의 복잡한 매듭과 단추를 손쉽게 풀어 헤쳤다. 나는 금세 옷을 입은 것도 벗은 것도 아닌 상태로 침대에 파묻혀야 했다.
가슴 사이로 손을 짚어 배꼽까지 죽 덧그리며 내려간 손이 벌써 젖은 성기를 쥐었다. 차박차박 소리를 내면서 커다란 손은 능란하게 내 것을 문지르고 주무르고, 손가락으로 미끌미끌한 그것을 쓸었다. 몸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이어 향유를 찾아낸 아테올이 똑, 똑, 한 방울씩 내 뒤에 미끄럽고 향긋한 액체를 떨어뜨렸다. 꾹 닫힌 입구 위로 향유가 떨어질 때마다 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아테올은 내 허벅지를 꾹 눌렀다. 종아리에 거추장스러운 옷자락을 매단 채 나는 그의 손길을 따라 다리를 벌렸다. 향유를 바른 손가락이 입구 근처를 더듬다가 단번에 안으로 들어왔다.
“히윽……!”
몸을 움츠리며 신음한 나는 눈을 겨우 뜬 채로 아테올을 보았다.
“뭐, 뭐야, 오늘 왜 이렇게 급하게…….”
“발정이 나서요. 그렇게 보이지 않으십니까?”
“무슨, 무슨 소리야, 아, 앗!”
말없이 손가락이 더 깊은 곳으로 들어왔다. 미끈거리는 내벽을 움키듯 문지르는 손길이 머리를 짜릿짜릿하게 했다. 게다가 오늘 아테올의 움직임은 평소와 조금 달랐다. 평소에도…… 날 잘 알고 있긴 했지만, 오늘은 뭐라고 해야 할까, 만지는 곳마다.
“아! 흐윽, 거, 거기 좋아…….”
만지는 곳마다 발끝까지 전율이 내달릴 정도로 좋았다. 내가 한 번 사정할 정도로 아래를 풀어놓은 그는 숨을 들이켜고는 벌어진 입구에 귀두를 콱 찍어 눌렀다. 물렁하게 젖은 살이 귀두의 모양을 따라 사방으로 벌어지며 등줄기로 오싹오싹한 감각을 전달했다.
“흐, 응, 으응…….”
위로 올리고 있는 두 팔에 옷이 휘감겨 꼭 손목이 묶인 듯한 모양이 되었다. 아테올은 그 옷을 풀어주기는커녕 손으로 만지작거리더니 어느 부분을 잡아당겨 매듭이 더 단단해지게 만들었다. 두 팔을 위로 올린 채 꼼짝도 할 수 없게 된 나는 하반신을 버둥거렸으나, 이쪽도 골반을 아테올에게 붙들려 있어 자유롭지 못했다.
“당신은…….”
“흐으……, 앗, 아아!”
“이렇게, 한 번에 넣어 주는 걸 좋아합니다. 그렇지요?”
머릿속이 새하얘져서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흐물흐물하게 풀어져 있었다곤 해도 이런 커다란 것이 단번에 뚫고 들어오는데 아무렇지도 않을 리 없다. 배 속이 터질 듯 꽉 들어차고 잔뜩 짓눌린 내벽의 속살은 예민하게 꿈틀거리며 부들부들 경련했다. 온 신경이 죄다 아래로 몰려버린 듯, 그곳에서만 모든 감각이 느껴졌다. 아프고 뜨겁고 짜릿했다. 향유와 섞인 뜨거운 체액이 작은 빈틈도 없는 듯한 접합부로 어떻게든 질걱질걱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아테올은 한 손으로 내 골반을, 다른 손으로 가슴을 움켜쥔 채 허리를 크게 쳐올렸다. 내 입에서 비명이 튀어나왔다. 촘촘하게 예민해진 감각이 일제히 달아올랐다가 낙하하는 것처럼 잦아들고, 다시 솟구쳤다.
“으, 으응, 흑, 이상해……. 흐윽…….”
“이상하다고요?”
살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몸이 자꾸만 위로 떠밀렸다. 아테올의 몸에 부딪힐 때마다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얻어맞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동시에 안쪽은 어느 한 곳 모자란 부분 없이 모조리 자극당하며 눌리고 문질러졌다. 배가 파들파들 떨리고 사정감이 밀려들었으나, 입에서 버거운 신음이 마구 쏟아질 때까지 나오는 액체는 없었다. 그러나 사정할 때보다 더 온몸이 타는 것 같고, 등줄기가 오싹했다.
“히, 윽, 으응, 좋아, 좋, 아…….”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드라이 오르가슴 속에서 나는 이마를 아테올의 가슴에 문지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아테올은 손을 들어 내 두 뺨을 감싸고 키스했다. 입맞춤까지 더해지니 쾌감은 배가되었다. 헐떡거리는 숨이 아테올의 입으로 넘어갔다. 오늘은 정말 이상했다. 평소에도 아테올은 능숙하고 나를 잘 알지만 오늘은 유달리……, 날 정말 속속들이 다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도 모르는 내 느끼는 부분을, 내 습관을, 나를 완전히 녹여놓을 만큼 잘 아는 것처럼.
“오늘, 너 이, 상해…….”
“이상한 게 아니라, 좋은 것 아닙니까?”
“흐악! 아, 앗, 아아……, 아, 아……!”
그 공세에 나는 어쩌지도 못하고 그저 이끌려 갈 뿐이었다.
***
부스스 깨어나자 한밤중이었다. 목이 잠긴 느낌이 들어 입을 열고 뭔가 말해 보려 했더니 쉭, 하는 소리만 나왔다. 어이가 없어서 입을 벙긋거리고 있는데 차가운 잔이 뺨에 닿았다.
“드십시오.”
받아서 마시고 보니 차가운 허브차였다. 박하의 시원한 향에 그대로 꿀꺽꿀꺽 한 잔을 다 비웠다.
“지금 몇 시…….”
말하다 입을 다물었다. 목소리가 나오긴 했지만 심하게 쉬어 있었다.
“벌꿀과 약을 가지고 오라고 했습니다. 그걸 드시면 나아지실 겁니다. 다른 곳은 어떠십니까?”
다른 곳……. 온몸이 뻐근하고 아팠다. 슥 내려다보자 얇은 침의 안쪽의 살은 온통 물리고 빨린 자국 투성이였다. 내가 정신을 잃을 때도 창밖은 어두웠다. 오전 나절부터 밤까지 계속 섹스만 했다는 뜻이다. 그것도 잠깐 숨 돌릴 틈조차 없이 내내 몰아치기만 하는 섹스를.
“대체 무슨 일이야…….”
아래도 쓰리면서 따끔따끔하게 아팠고, 손목에는 멍이 들어 있었다. 내 중얼거림에 아테올이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체력을 확인하기 위해 상태창을 보았다. 그런데.
‘응……?’
상태창이 있어야 할 곳이 덩그러니 비어 있었다.
‘뭐야?!’
특별한 일이라는 게 설마 상태창이 없어지는 건 아니겠지? 안 돼, 그거 체력 표시 유용하게 써먹었단 말이야. 그때 메시지가 퐁 하고 떠올랐다.
[tip: 상태창이 잠시 숨김 처리 되었어요! 체력 경고는 표시되니 걱정하지 마세요٩( *˙0˙*)۶]
대체 왜?
[tip+tip: 상태창을 표시하는 것도 힘이 드는 일이랍니다( ˃⍨˂̥̥ ) 잠시 힘을 비축할 시간이에요!]
그래……. 참 힘들겠다…….
황당함을 애써 감추고 있는데 옆에서 손이 뻗어와 내 머리를 쓸어 올렸다. 돌아볼 것도 없이 아테올이었다.
“유리 님.”
“응?”
“…….”
부르기만 하고, 그는 계속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면서 말이 없었다. 뭔가 말을 고르는 느낌이었다. 뭐지? 이런 모습은 처음 본다. 항상 입을 털기에 주저함이 없는 아테올 아니었던가.
“왜 그래?”
“글쎄요.”
잠시 망설이던 그가 다시 말했다.
“무슨 말을 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고 할까요.”
“말이 뭐 그래. 잘못 말한 거 아니야?”
“아닙니다.”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무슨 말을 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는 게 무슨 말이야? 한국말……, 아, 한국말 아니지. 아무튼 제대로 된 말 맞아? 아테올이 몸을 굽히더니 내 머리카락에 입 맞췄다. 얼굴이 가까웠다. 조금 전까지 질리도록 맡은 아테올의 향이 다시 훅 밀려들었다. 부끄럽게도 배 속이 약간 따끈해졌다.
“당신은 정말……, 어떨 때 보면 좋은 사람만은 아닙니다.”
“뜬금없이? ……나 뭐 잘못했어?”
정말 뜬금없는 말이었다. 내가 자면서 아테올 욕이라도 한 걸까. 아니면 정신없는 와중에 아테올의 머리카락을 죄 잡아 뽑기라도 했나. 그런 것치고는 여전히 풍성한 모발을 자랑하고 있는데.
“아니요. 당신 잘못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엥…….”
점점 더 알 수 없다. 이상하다는 눈으로 쳐다보자 아테올은 눈웃음을 지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고, 뺨을 어루만지며 키스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정말 녹을 듯이 달콤한 몸짓이었다. 입 안으로 들어오는 혀끝도 황송할 만큼 조심스러웠다.
“당신 잘못이 아니었고, 아니라는 걸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아까부터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아직은 그러실 테지요.”
“……나 이런 대화 별로 안 좋아해.”
이런 선문답 같은 대화는 별로다. 나는 명확한 게 좋았다. 아테올이 피식 웃었다.
“그러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무슨 말을 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고. ……뭐, 너무 화내지 마십시오. 곧 알게 될 테니까요.”
“그래? 영영 모를 것 같은데.”
“그러면 큰일이지요.”
아테올은 나를 끌어안았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아테올이 왜 이러는지도 의문이지만 그냥 가만히 있었다. 그가 시종이 가지고 온 벌꿀과 약을 내게 먹이고 다시 품에 안은 뒤 자리에 누울 때까지. 몸이 어지간히 피곤했는지 나는 금방 잠들었다가, 중간에 일어나 꿀에 절인 배와 우유를 넣은 진한 차를 마시고 또 잤다.
그리고 그날 새벽. 가을 별궁에 암살자가 숨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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