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06. 기억이 없으면 사람은 미궁에 빠진다
시우에게서 편지가 왔다. 내용은 대충 반성하고 있다, 잘못했다, 뭐 그런 것이었다. 원래라면 휴가 중인 탑주에게 시우 정도의 사람에게서 온 편지(아마도 은쟁반 급도 되지 않을)를 일부러 전할 일은 없지만, 내가 미리 언질 해 두었기에 가을 별궁까지 전달되었다.
이유야 물론 호감도 때문이다. 편지라도 주고받아서 호감도를 올리겠다는 생각은 괜히 한 게 아니었다. 원래 게임에서도 편지 같은 게 호감도용 아이템으로 꾸준히 나오지 않는가?
내가 잉크와 펜을 끌어당겨 답장을 쓰기 시작하자, 침대에 앉아 있던 아테올이 로브를 주워 입고 다가와 맞은편에 앉았다. 흠. 근데 뭐라고 쓴담. 일단 가을 별궁의 풍경이 아름답다는 이야기랑…….
턱을 괴고 한참 고민하는데 어느새 아테올도 맞은편에서 내 편지를 같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도저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아테올.”
“예.”
“뭐라고 써야 그들 좋은 쪽으로 해석되지 않을까?”
나는 이런 일에 익숙하지 않다. 회사 생활을 해보긴 했지만, 이런 고급 사교 화법은 써본 적이 없으니까. 아테올이 글쎄요, 하고는 팔꿈치로 책상을 짚고 날 올려다보았다.
“그냥 무슨 말을 해도 저들 좋은 쪽으로 해석할 겁니다. 애초에 여지를 차단하는 게 낫지요.”
“그런가…….”
그래서 편지는 상당히 심심한 내용이 되었다. 머리를 쥐어 짜내 겨우 쓴 말은 ‘지루하다고 생각하는 시간이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였다. 죄짓고 구금되었으니까 지루하다느니 생각하지 말고 반성하라는 뜻이다. 나도 이 정도는 쓸 줄 안다.
편지를 다 쓰고 봉한 뒤 클로든에게 넘겨주고 나자 아테올이 나를 안아 들었다.
“볼일은 다 끝나셨습니까?”
“응? 뭐어…….”
볼일이라고 할 정도도 아니었지만. 내 대답에 아테올은 식사를 들여오게 했다. 닭고기를 바싹 구워서 큼직한 제철 채소와 함께 끓인 수프, 가지와 호박으로 만든 더운 샐러드, 으깬 콩 같은 게 테이블에 가득 차려졌다. 아테올은 클로든과 다른 식사 시종을 내보내고 직접 닭고기의 뼈를 발라주거나 콩을 떠서 내 그릇에 덜어주었다.
식사 후에는 느긋하게 목욕을 하고 잔뜩 나른해져서 침대로 돌아왔다. 아테올은 휴가 중에도 놓고 오지 못한 일감을 집어 들었고 나는 챙겨 온 책을 펼쳤다. 전에 시우가 가지고 나가려고 했던 탑주의 기록물 중 하나였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읽고 싶어져서 가지고 왔다. 내용은 별거 없었다. 꼭 남이 써준 일기장……, 아니, 일기장보다는 좀 자세하지 못한 관찰 일기에 가까웠다.
탑주의 일상이라고 해도 대단한 건 없었다. 그냥 내가 지금 보내는 것과 비슷했다. 어디에 큰일이 생기면 가서 도와주고, 그 외에는 탑에서 한가롭게. 거대한 포도 농장의 포도가 한꺼번에 다 없어지는 바람에 포도 도둑 마물을 잡으러 간 적이 있다고 한다. 규모가 수십만 평이었다는데 정말 큰일이었을 것 같다. 한참 여물었어야 할 포도가 홀연히 사라진 광경이라니.
응?
뭔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광활한 포도 농장, 텅 비어버린 나무, 그 근처를 우왕좌왕 오가는 사람들. 신기하게도 내가 보고 온 것처럼 머리에 그려진다. 그렇게 큰 포도 농장은 본 적도 없는데. 고개를 갸우뚱하며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는데 눈앞에 갑자기 상태창이 떠올랐다.
[호감도: 시우]
99%
시우는 반성하지 않습니다.
뭐, 뭐야. 여기서 시우 호감도가 왜 오르는데? 어리둥절하게 상태창을 보고 있는데 굵은 팔이 허리를 휘어 감았다. 얘는 또 뭐야.
“왜 그렇게 멍하니 계십니까? 뭘 보고 놀라신 거예요?”
“아, 어?”
“가끔 당신은 그럴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뭐랄까……. 먼지를 보고 놀라는 동물 같아서 귀엽지요.”
비유가 좀 그랬다. 반박하려 하는데 아테올이 내 눈앞으로 손을 뻗었다.
“여기에 뭐라도 있습니까?”
그리 말하며, 아테올은 손을 움켜쥐었다. 상태창을 정확히 잡았기에 깜짝 놀라 그를 보았으나, 아테올의 눈에 상태창은 보이지 않는 듯했다. 그러나 그의 손에 잡힌 상태창은 화소가 깨지듯 확 일그러졌다.
“나, 날벌레?”
“날벌레……? 뭐. 그렇다고 할까요.”
아테올이 내 뺨에 입을 맞췄다. 누가 봐도 수긍하지 못했으나 그냥 넘어가겠다는 투였다. 나는 아테올 쪽으로 슬쩍 몸을 기대며 시선을 돌렸다. 시선 끝에서 떨어진 상태창의 조각들이 합쳐지는 것처럼 다시 만들어지고 있었다.
***
나와 달리 아테올은 휴가 중에도 바빴다. 나는 역대 탑주의 일대기를 읽는 것도 질려 밖에 나와 돌아다니는 중이다. 아니, 일대기는 아닌가? 한 사람이었고 지금도 내가 잠깐 자리를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잘 살아 있잖아. 북부 대공이랑 황궁으로 돌아올 계략인지 전략인지를 짜면서.
시우의 호감도가 99%가 되었다. 그리고 떠오른 메시지는 ‘시우는 반성하지 않습니다’였고.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상하다. 탑주의 일기를 읽다 보니 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시우가 지금 반성을 해야 하는 건가. 지금 자리를 빼앗고 있는 악역은 나인데.
아테올이 내게 묘한 관심을 가지면서 책의 내용이 어그러지는 기분이 든다. 매우 불편한 사실이었다. 밖에서 들어온 존재가 평화롭게 굴러가야 할 원작 내용을 망가뜨린다. 이 사실에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격렬한 거부감이 느껴진다. 양심의 가책인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커다란 나무 아래였다. 나는 원래 몸 쓰는 일에 정말 재주가 없는데, 나무를 보고 있자니 왠지 타고 올라갈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으로 나무줄기를 슥 훑자 손으로 잡고, 발로 밟기 편해 보이는 옹이와 가지가 딱딱 들어왔다.
굵은 가지를 붙잡고 느릿느릿 매달리듯이 나무 위로 올라갔다. 다 올라오자 가지 두 개가 꼬이듯 엉켜 자라 딱 사람이 누울 수 있는 공간처럼 되어 있는 게 보였다. 참나, 어떻게 이런 게 있는 줄 알고 올라왔대. 하여간 내가 누울 공간은 본능적으로 잘 찾는다.
조심스레 몸을 누이니 원래 날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몸에 딱 들어맞았다. 나보다 체구가 조금만 컸다면 불편해서 못 누울 것이다. 드러눕자 온몸이 편안하고, 나뭇잎 사이로 흘러드는 가을의 잔잔한 햇살이 따스했다. 기분 좋다……. 조용한 콧노래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복잡한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렇게 멍하니 있었는지, 아니면 깜빡 잠들었는지. 나는 다급하게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유리 님!”
아테올의 목소리였다. 이 나무 쪽으로 다가오고 있다. 나는 돌아눕듯 몸을 살짝 옆으로 세우고 두 손으로 가지를 짚으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다소 신경질적인 기색의 아테올이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아테올.”
작게 불렀는데도 아테올은 내 목소리를 듣고 멈춰 서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바스락, 내 움직임을 따라 가지가 살짝 움직이고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아테올의 금빛 머리카락에도 나뭇잎이 붙었다. 그걸 보고 웃다가 내려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무를 타고 내려가는 건 아니었다. 그냥 뛰어서…… 그러고 보니 아까도 그냥 뛰어 올라올 수 있었는데, 왜 굳이 힘들게 기어 올라왔지? 아무튼. 뛰어내리려다 무심코 아테올을 보았다. 그는 빤히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붉은 눈동자를 본 순간 이상한 충동이 들었다. 나는 두 팔을 아래로 뻗으며 그대로, 마법도 사용하지 않고 다리를 박찼다. 몸이 중력을 따라 아래로 떨어졌다. 아주 짧고 느리게 느껴지는 추락이었다. 아테올은 조금 당황하는가 싶더니 금세 자리를 잡고 두 팔을 벌려서 나를 받아 안았다. 아무리 그라도 성인 남자의 몸무게는 버거웠는지 조금 비틀거린다.
“하하.”
괜히 웃음이 나와서 킥킥거리다가 아테올의 얼굴을 보았다.
“……아테올?”
그는 이상한 표정이었다. 멍한 듯, 무언가에 얻어맞은 듯, 이상한 것이라도 본 듯…… 정말로 이상한 표정을 한 채 미간을 찌푸리곤 입까지 반쯤 벌렸다. 화가 났나? 그런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때 요란스러운 효과음과 함께 상태창이 떠올랐다.
[호감도: 아테올]
100%!
아테올의 호감도 100%를 달성했어요!
이제 특별한 일이 일어날 거예요.
아니, 그 특별한 일이 뭔지도 알려달라고. 답답한 기분으로 상태창을 보다가 다시 아테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나 내가 아테올의 얼굴을 똑바로 보기 전에, 그가 바닥에 주저앉으며 나를 꽉 끌어안았다.
“윽, 잠깐, 아테올, 숨 막혀…….”
내가 어깨를 탁탁 때리는데도 아테올은 반응도 없이 나를 그저 계속 껴안고 놓지 않았다. 바람이 한차례 지나가고, 나뭇잎이 다시 우수수 떨어지고 작은 동물이 뛰어가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그러니까 꽤 긴 시간을. 심지어 아테올은 조금 떨고 있기까지 했다. 조금이라도 팔에 힘을 풀면 내가 사라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필사적으로 끌어안고 있었다.
“저기…….”
“…….”
점점 곤란해졌다. 아테올은 나를 안은 채 긴 숨을 내뱉었다. 숨결의 끝에 떨림이 섞인 것 같다. 표정을 보려고 했지만 그는 계속 내 머리를 자신의 가슴 쪽으로 끌어 내리며 내가 얼굴을 볼 수 없게 했다.
“눈을 감아주시겠습니까?”
“으응?”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동시에 찾아든 것은 따뜻한 입술이었다. 입맞춤이 꽤나 격렬했기에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천천히 실눈을 떴다. 그리고 얼핏 보인 모습에 깜짝 놀라 아테올을 밀어냈다.
“아테올……, 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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