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06. 기억이 없으면 사람은 미궁에 빠진다
사르나스의 가을 별궁은 오래전 제국이 이 땅, 한때 로웨타라 불리던 왕국을 점령했을 때, 왕궁의 아름다움에 반한 당시 황제가 불태우지 않고 남겨둔 곳이었다.
좁은 간격으로 늘어선 유선형의 긴 창문에는 포도 넝쿨 모양의 창틀에 어우러지는 스테인드글라스가 반짝였다. 로웨타에서 신성시하던 연꽃이나 백합 모양이 대부분이었고 장소에 따라서는 별자리를 그린 것도 있었다.
바닥은 온갖 보석 안료로 만든 작은 타일을 정교하게 이어 붙여 복도에서 복도로 이어지는 무늬를 그리고 있었으며, 돔 형태인 천장의 가장 꼭대기 부분은 두껍고 투명한 유리였다. 창문과 천장 유리의 모양 때문에 바닥에 만들어진 커다란 빛의 꽃은 다시 타일 무늬와 어우러졌다.
커다란 중정을 끼고 사각 형태로 지어진 이곳에는 다섯 층 높이의 공중정원이 있었고, 곳곳에 바닥을 파낸 커다란 연못이 찰랑거렸으며 가을에 색이 물드는 나무로 가득했다. 맑은 물이 바닥 밑에서 계속 순환하는 연못에는 자갈 대신 새하얀 월장석을 깔았고, 그 위를 은은한 색의 나뭇잎과 작은 등불이 떠다녔다.
황궁도 그렇지만 정말 사치의 극치라고 부를 만한 곳이었다.
나는 물에서 자라는 나무가 서로 둥글게 엉겨 커다란 터널처럼 만들어진 모양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하얀 조각배 맞은편에 아테올이 앉아 있었다.
바닥의 월장석이 그대로 비쳐 보일 만큼 맑은 연못에는 물에 뿌리를 내린 백합이 자랐다. 원래 백합이 물에서 자라는지는 모르겠지만, 거대한 유리 화병에 꽂아 놓은 꽃처럼 깨끗하고 아름다웠다.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흰 조각배에 나른하게 기대어 앉은 아테올 역시. 나는 물끄러미 아테올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로브 후드를 벗고 있었기에 수면에 내 음울한 얼굴이 비쳤다. 푸른빛으로 반짝이는 물에 괜히 손을 넣어 찰박거리다가, 문득 이 감촉이 익숙하다고 느꼈다. 손에 감기는 부드러운 백합 줄기, 물기를 머금은 꽃잎, 꽃을 건드릴 때마다 짙게 올라오는 향과 차가운 물의 온도, 내 손이 흰 월장석 바닥에 그리는 그림자까지.
데자뷔라는 건가? 한국에서 이런 곳으로 놀러 다닌 기억은 당연하지만 없는데. 애초에 한국엔 백합이 피는 맑은 연못 같은 건 없다. 있어도 연꽃이고, 물이 이렇게 수정을 녹여놓은 것처럼 깨끗하지도 않다. 고개를 갸웃하며 시선을 들었다. 터널처럼 만들어진 나무 사이로 햇살이 들었다.
이 터널을 빠져나가면 양쪽으로 소국이 피어 있는 길이 있을 것 같다. 온갖 색과 모양의 소국이 화려하게 꽃을 피운 길이다.
“아테올, 여기를 지나면…… 꽃밭이 있지? 소국이 핀.”
아테올이 의아한 듯 눈을 둥글게 떴다.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정말 있었다니. 순간 당황할 뻔했으나 그때 타이밍 좋게도 물결을 타고 소국 꽃송이가 흘러왔다. 나는 그걸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테올이 아, 하고 그 꽃송이를 가벼운 손짓으로 건져 올렸다. 커다란 손바닥에서 물이 주룩 떨어지고 물방울에 젖은 꽃만 남았다.
꽃은 마침 발견한 핑계였다. 나도 이곳을 지나 꽃밭이 있다는 걸 왜 아는지 모르겠다.
“가을 별궁은 당신이 워낙 좋아하시던 곳이니까요.”
“탑주가?”
“……네.”
내 정정에 아테올은 피식 웃더니 별다른 말 없이 대답했다. 내가 어떻게 그걸 알았는지는…… 뭐, 중요한 문제는 아니니까. 꽃이 떠내려 오는 걸 미리 본 걸지도 모르지. 흘러오는 꽃송이의 수는 점점 많아졌다. 꽃밭이 가까워지고 있는 듯했다. 아테올이 조금 몸을 일으키더니 내 쪽으로 왔다. 배가 기우뚱했으나, 워낙 그가 중심을 잘 잡고 있어 크게 흔들리지는 않았다.
그는 물에서 건져 올린 소국을 내 귓가에 꽂았다.
“……뭐 하는 거야?”
“잘 어울릴 것 같아서요.”
“그래서, 잘 어울려?”
“예. 아주 잘 어울립니다.”
퍽이나 잘 어울리겠다…….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작게 한숨 쉬었다. 아테올은 그런 날 보고 웃다가 내 쪽으로 더 몸을 기울였다.
“잠깐, 여기 배 위야.”
“알고 있습니다.”
“막 움직이면 뒤집…….”
“당신만 가만히 계시면 됩니다.”
배가 내 쪽으로 조금 기울어졌다. 아테올이 무게를 실으며 다가왔기 때문이다. 혹시나 배가 뒤집힐까 긴장해서 꼼짝도 못 하고 있자, 아테올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내 뺨을 손끝으로 훑어 내리고는 그대로 키스했다.
“으, 음…….”
배가 나아가는 물소리에 젖은 소리가 섞였다. 입술을 몇 번 맞댄 아테올은 그대로 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가, 내가 작은 신음과 함께 입을 벌리자 그 사이로 혀를 밀어 넣었다. 익숙한 양감이 입 안을 천천히 자극했다.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그 순간 배가 흔들려서 움찔 굳었다. 아테올이 그것 보세요, 라고 말하듯이 내 팔을 가볍게 그러쥐었다.
얼마간은 평온했다. 키스는 달콤하고 기분 좋았고, 감은 눈에 햇살이 부서져 비쳐 들었다. 일은 다음 순간에 벌어졌다. 키스가 한층 깊어지고 아테올이 나를 끌어안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입술을 떼고는 장난치듯 쪽, 쪽 맞대기만 하며 더 가까이 오지 않았다.
몸은 간질간질한 키스를 더 원하고 있었다. 결국 안달이 난 내가 몸을 확 일으키며 먼저 키스하려 했을 때였다. 배가 크게 기우뚱, 하더니 그대로 옆으로 넘어갔다.
“……!”
첨벙, 요란한 소리와 함께 나와 아테올과 배가 한꺼번에 물에 빠졌다. 순간 당황해 버둥거렸으나 곧 아테올이 굵직한 팔로 내 허리를 감고 빙글 돌려 일으켜 세웠다. 물은 내 목까지밖에 오지 않았고, 눈앞에는 너른 가슴팍이 보였다. 고개를 들자 물에 흠뻑 젖은 아테올이 머리카락을 넘기며 날 보고 있었다. 금색 속눈썹에도 물이 방울방울 맺혀 있다.
“괜찮으십니까?”
“……응.”
“그럼.”
뭐가 그럼, 이야, 하고 묻기도 전에 아테올은 나를 휙 안아 올렸다. 그대로 배와 그 위의 물건들을 내버려 둔 채 그는 물속을 마치 평지 걷듯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 가장자리의 계단으로 향했다. 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밖으로 나가자 곧 햇살이 비쳐 들었다. 소국 꽃밭이었다.
빨갛고 노랗고 하얀 작은 꽃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커다란 유화를 펼쳐놓은 것 같았다. 아테올은 꽃밭 가운데로 난 길을 걸어서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우리가 지나가는 자리마다 물웅덩이가 생겼다. 안쪽으로 조금 들어오자 시종이 돌아다니고 있었고, 아테올은 소매를 들어 내 얼굴을 가렸다.
“잠시 쉴 것이다.”
“예. 다과를 들일까요?”
“물과 마실 것을. 과일도 조금 가지고 와라.”
“예.”
다른 시종이 수건을 먼저 가지고 왔다. 아테올은 나를 긴 의자에 앉히고 수건을 머리부터 덮어 몸의 물기를 닦아냈다. 의자에 씌운 비단이 연못 물에 푹 젖어가는 건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물기를 닦아낸 뒤 그는 나를 욕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온천수가 나오는 가을 별궁은 어느 욕실을 가건 따끔따끔한 기포가 올라오는 온수가 흘러넘쳤다. 내 젖은 옷을 하나하나 벗겨낸 그가 나를 발끝부터 천천히 물에 집어넣었다.
욕탕은 계단을 몇 칸 내려가면 아까 우리가 빠진 연못보다 조금 더 깊은 정도였다. 나는 계단을 완전히 내려가서 몸을 굽혀 입술까지 물에 담근 뒤 뒤를 돌아보았다. 아테올이 젖어서 몸에 달라붙은 옷을 벗고 있었다.
겉옷은 이미 벗은 뒤라서 남은 건 탄탄한 근육에 반투명하게 붙은 흰 속 로브뿐이었다. 굵은 손가락이 허리의 끈을 풀어 바닥에 떨어뜨리고는 옷깃 속으로 들어가더니 몸에서 젖은 천을 떼어내듯 벗어냈다. 물기 때문에 다리에까지 완전히 얽혀 달라붙은 흰 로브는 얇기도 얇아서 아테올의 몸 선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 옷을 벗는 과정은 정말…… 정말……, 외설적이었다. 나는 눈 둘 곳을 찾지 못하고 이리저리 두리번대다가 아테올과 눈이 마주쳐 버렸다.
그는 마주친 그대로 눈꼬리를 휘며 웃더니 옷깃을 내리려던 동작 그대로 멈춰 자기 가슴 위에 한 손을 얹었다.
“제 몸이 마음에 드십니까, 유리 님?”
“…….”
“대답하지 않으셔도 답은 알고 있습니다만.”
아테올이 천천히 다가와 욕조 가장자리에 두 손을 얹고 몸을 굽혔다. 물이 맺힌 가슴골에서 뚝, 하고 물방울이 떨어져 뜨거운 물에 섞였다.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리로 향했다. 반투명해진 로브가 얽힌 몸통, 단단한 선을 그리는 배와 골반과 바위처럼 단단한 허벅지. 몸이 마음에 드느냐고? 물어볼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걸 차마 대놓고 말할 수는 없었기에 나는 슬그머니 눈을 피했다.
피한 것도 잠시. 아테올은 손을 뻗어 손가락 하나로 아주 쉽게 내 시선을 다시 자신에게로 돌려놓았다.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던 로브를 휙 벗은 그가 물속으로 들어와 나를 끌어안더니 엉덩이를 받쳐 들어 올렸다. 순간 얼굴이 확 붉어져 다시 그를 외면했으나, 이번엔 뺨에 닿는 입술 때문에 결국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황제를 이런 눈요깃거리로 만들 수 있는 건 세상에 당신뿐입니다.”
“내, 내가 하라고 한 적 없어. 너는…… 네가, 멋대로.”
“아무렴요.”
그렇게 말하며 아테올은 나를 추어올려 안고는 키스했다. 물속에서 맨살이 스치는 느낌이 미끄럽고 자극적이었다. 나는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아테올을 마주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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