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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의 원수를 공략합니다-79화 (79/93)

79화

06. 기억이 없으면 사람은 미궁에 빠진다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게 또 그렇게 되네. 내가 생각한 건, 탑주는 원하는 사람을 영생으로 만들 수 있는가, 였다. 클로든이나 세르타에게 직접 물어볼 수도 없기에 이리저리 에둘러 물어 조사하거나 잡다한 기록을 죄다 뒤져 보았다. 그 결과 얻은 대답은 간단했다.

내가 누군가를 영생으로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

클로든과 세르타, 벨은 처음부터 탑주를 지키고 보필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들이었다. 신화처럼 내려오는 기록에는 탑주의 마력이 그들을 만들어냈다고 한다. 그럼 아들들이랑 딸인 셈인가 싶은데 이건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동물들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예전부터 동물을 키웠다고 하는 걸 보면 동물 역시 그들과 비슷한 듯했다.

즉 ‘유리 아이엘레스’가 마법사로 태어나고, 영원히 살아가듯이 유리의 측근들 또한 그렇게 태어나 유리를 지키며 살아간다는 의미였다. 유리가 원하는 누군가를 아무나 영생으로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라. 다만, 예외는 있었다. 탑주가 영생으로 만들 수 있는 상대.

바로 탑주의 반려다.

지금까지 탑주와 결혼한 상대는 있었지만 그들 중 누구도 지금까지 살아 있는 사람은 없다. 지나가는 말처럼 클로든에게 그 이유를 물었을 때, 그는 대답했다.

‘반려로 삼고 싶을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러니까 탑주가 원한다면 딱 한 사람을 반려로 삼아 영원을 함께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러면 자연적으로 후계는 필요치 않게 되는 것 아닌가. 게다가 황제의 권력은 그 어느 때보다 강해진다. 후계 싸움과 관련된 알력이 사라지는 만큼 외압도 줄어들고.

그 생각만 하고 우선 이렇게 하는 게 어떨지 말하려 한 거였는데……. 그때 지나갔다고 생각한 청혼 이야기가 또 나올 줄은. 아니, 사실은 알았는지도 몰랐다. 아니아니, 예상 못했다면 그건 바보지. 나는 그냥 속 보이는 수를 던져봤을 뿐이다. 아테올이 뭐라고 대답할지.

당연하지만 내가 아테올에게 영생을 줄 수는 없다. 그건 진짜 탑주에게만 가능한 일이니까. 아무리 내가 마법을 쓸 수 있다고 해도, 반려가 어쩌고 하는 것까지는 어떻게 하는 건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또한, 아테올이 이렇게 대답할 거라고 내심 기대는 했으나 내가 거기에 어떻게 말할지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내가 묵묵히 있자 아테올은 피식 웃더니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이런 상황에 할 말이 없을 때는 어떻게 하는 건지 알려드릴까요.”

“……어떻게 하는데?”

“키스로 무마하는 겁니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나는 몸을 일으켜 아테올에게 키스했다. 잠시 놀란 듯 크게 뜨였던 아테올의 눈이 이내 가늘어졌다. 그는 평소와 달리 내가 먼저 입 맞췄는데도 주도권을 빼앗아 가거나 당연하다는 듯 달려들지 않았다. 그저 눈을 가늘게 뜬 채 내가 하는 양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홀린 듯 이끌려 키스하기는 했으나 사실 무마하겠다는 건 아니었다. 할 말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을 뿐.

내가 만약에 진짜 유리였다면 이 순간에 할 수 있는 말이 많았을 텐데.

허무한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오늘은 악몽을 꿀 것 같았다.

***

아테올은 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무슨 이유로 거절하는지도 가르쳐주지 않았고. 대신에 그는 선황후가 있는 별궁에 들어가는 예산과 시종, 의사의 수를 늘리면서도 공식적으로 ‘죄인의 직계 핏줄이 황위에 오를 일은 없다’라고 못 박았다. 안팎으로 잡음이 있었지만, 어느 길을 선택하든 반대하고 비난하는 목소리는 나왔을 테니 가장 적당하고 현명한 선택이었다.

몇몇 귀족, 특히 선황후의 친족 쪽에서 아테올을 들들 볶으려 시도했으나 그럴 때마다 아테올의 크고 작은 보복이 있었으므로 점점 시들시들하더니 다들 조용해졌다. 특히 아테올이 잘하는 보복은 상대방의 젊은 자식에게 영지를 하사한답시고 척박하고 외지고 위험한 땅으로 보내버리는 것이었다.

황제는 아테올이 전쟁에서 공을 세울 때마다 풀뿌리도 제대로 나지 않는 변방 영토를 선심 쓰듯 한두 개씩 하사했는데(버렸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 것이다), 그게 이제 선황후의 친족들에게 돌아가고 있었다. 정말 뿌린 대로 거둔다는 게 이런 건가 싶었다.

33일은 빠르게 흘렀다. 바람이 쌀쌀해지기 시작했을 때 칼레우스는 재판정에 섰다. 재판 참관은 두 번째. 이번에는 옆에 앉은 사람이 있었다. 아테올의 모습은 여유로워 보였다. 단언했던 대로, 그는 33일 만에 칼레우스에게 102가지의 죄를 뒤집어씌웠다. 아니, 그중에 절반 이상은 실제로 칼레우스가 저지른 죄를 찾아냈을 뿐이다.

“죽일까 했습니다만.”

“왜?”

죽일까 했다, 는 건 안 죽이겠다는 뜻이다. 칼레우스는 확실히 죽이는 게 뒤탈이 없을 텐데.

“아직 세 사람에게 충분히 보답을 하지 못한 것 같아서요. 이대로는 좀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대로는’ 이라 말하며 아테올은 턱을 괸 채 내게 한쪽 눈을 찡긋했다. 표정과 말투만 들으면 가벼운 농담이라도 하는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그 내용은 지금 바로 사형당해 죽는 것보다 더 괴로운 일들을 겪게 해주겠다는 살벌한 다짐이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혹은 어느 정도 짐작한 채로 죄인의 자리에서 이를 부득부득 가는 칼레우스가 보였다. 그는 이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감히 황제와 탑주를 허락 없이는 바라보지도 못하는 신분이 되었기 때문이다.

칼레우스는 선고되는 수많은 죄에 하나하나 이의를 제기하려 했으나 전부 기각당했다. 결국 그에게 돌아간 것은 나도 이름을 처음 들어보는 어느 추운 지방 수도원으로의 유폐였다.

그뿐 아니라 선황과 선황후도 지금 있는 별궁이 아닌, 각기 떨어진 다른 벽지로 유배가 결정되었다. 지금은 선황후가 임신 중이라서 집행이 유예되지만, 그것도 아이를 낳고 몸을 회복할 때까지 고작 1년 반 정도다. 심지어 태어난 아이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선황후의 임신이 나름 회심의 카드였던 모양인데 오히려 악수로 돌아와서 안타깝게 됐다. 칼레우스는 나가기 직전까지 소리쳤다.

“이대로 끝나진 않을 겁니다!”

그러다 재판정 경비병들에게 결국 질질 끌려 나갔다. 아테올은 팔짱을 낀 채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말했다.

“칼레우스는 가끔 저렇게 재미있습니다.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면이요.”

“진짜 이대로 안 끝나면 어쩌게?”

“그때는 그때의 방법이 나타날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생각할 수 있구나. 아테올이 왜 계속 내가 탑주가 되면 된다고, 시우는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는지 좀 알 것 같았다. 그는 실패를 모르는 사람인 거다. 내가 아테올의 입장이었다면 어땠을까. 그냥 얌전히 죽은 듯이 살다가 조용히 죽거나 죽임당했겠지. 슬슬 내 자신감에 대해 생각해 볼 때인 것 같다. 이렇게 살면 인생이 여러모로 피곤하니까……. 하지만 이게 뭐, 고치자! 라고 생각해서 고쳐지는 문제도 아니고. 그냥 조용히 한숨만 또 내쉬었다. 아테올의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자 언제부터 쳐다보고 있었는지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

무슨 말을 해야 하지. 할 말을 찾다가 부담감을 느끼고 우선 생각나는 걸 아무거나 입에 담았다.

“고마워.”

“고맙다고요?”

“응, 그냥 뭐…… 여러 가지로. 그냥 말해야 할 것 같아서.”

뭐가 고마우냐고 물으면 그것도 할 말이 없는데, 다행히 아테올은 그렇게 깊게 묻지 않았다. 버릇처럼 상태창을 보자 내 체력은 10 정도였고, 아테올의 호감도는 여전히 99%였다.

“흠. 네. 그럼, 정 고마우시다면.”

“정 고마운 정도는 아닌데.”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테올이 웃음을 터뜨렸다. 주위의 시선이 몰렸다. 기자들이 아테올과 내 반응 하나하나를 기사로 쓰려고 혈안이 되어 있을 텐데, 또 신문이 난리가 나겠구나. 그러나 아테올은 그런 것쯤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이 내게 잔뜩 몸을 기울이더니 거의 귀에 입술이 닿을 듯 붙이고 속삭였다.

“어쨌든, 제게 포상을 주시겠습니까?”

“……무슨 포상?”

내가 갸웃거리자 그도 나를 따라서 똑같이 고개를 움직이고는 말했다.

“휴가를 가고 싶습니다. 당신과 함께요.”

“휴가…….”

갑자기 언젠가 꿨던 꿈이 생각났다. 원정을 다녀와서는, 거기엔 내가 없어서 싫다며 투덜거리던 아테올과 ‘그럼 다음엔 같이 갈까?’라고 말하던 나. 휴가와 원정은 다르지만 어쨌든 어딘가에 함께 간다는 건 같지 않은가.

“어디로?”

“사르나스의 가을 별궁으로요. 지금쯤 한창 아름다울 겁니다.”

“그래, 뭐…….”

나야 하는 일도 없이 놀고먹는 사람인데,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것도 그런 걸 포상으로 원한다니 더더욱.

“약속하신 겁니다.”

그냥 별궁에 가겠다고 한 것뿐인데 아테올은 마치 놀이동산에 데려가 주겠다는 말을 들은 어린애처럼 즐거워했다. 음, 이 표현은 아테올과 좀 어울리지 않는다. 첫 데이트를 약속받은 소년……, 아니, 아무튼,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아테올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안쪽의 상황을 이미 들었을 기자들이 수첩과 펜을 든 채 벌건 눈으로 출입구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테올은 보란 듯이 내 어깨를 끌어안고 재판정의 계단을 내려가 같은 마차에 올랐다.

별궁이라.

조금 기대가 되는 것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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