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06. 기억이 없으면 사람은 미궁에 빠진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전부터 뭔가 묘하다고는 생각했다. 세르타나 클로든, 벨이 말하는 것을 들을 때라든가, 탑주의 기록을 볼 때. 처음에는 이들이 영혼의 이동을 탑주의 계승으로 여기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점점, ‘사람이 바뀌었다’고 하기에는 이상하게 느껴지는 기록이 많이 눈에 띄었다.
평범한 사람들의 눈엔 그냥 탑주가 수십 년, 수 년에 한 번 바뀌는 걸로 보일 것이다. 일단은 계승식이라는 게 있고 거기서 새로운 탑주가 등장하니까. 그러나 탑주의 얼굴은 늘 가려진 채다. 실제로 그 로브 안에 누가 있는지 제대로 본 사람은 없다.
처음부터 가장 높은 탑의 마법사는 단 한 명. 영혼이 옮겨 가는 것도 이름을 이어받는 것도 아니고, 그냥 시기에 따라 몇 대라는 호칭을 다르게 할 뿐이다.
이는 비밀이 아니었다. 신화나 역사책에도 탑주는 언제나 가장 높은 탑에 있다고 기술된다. 황실이나, 황궁에 자주 드나드는 고위 귀족들은 모두 알고 있다. 단지 그것을 눈으로 확인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저 전설이라고 치부할 뿐이다.
칼레우스가 말한 ‘어린 시절’을, 칼레우스의 나이를 생각하여 당연히 내가 어릴 적이었을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 반대. 칼레우스가 어릴 때를 말하는 것이었다.
또 그것을, ‘아주 오랜 세월을 산’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건 이상한 일도 아니다. 칼레우스에게는 자기 자신 한 사람에게만 일어난 일이나 내게는 수없이 있었던 일들 중 한 부분에 지나지 않으니까.
“사란트 공.”
아테올의 낮은 목소리가 나와 칼레우스 사이로 끼어들었다. 어느새 기사들이 가까이 다가와 우리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유감이지만, 그대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군.”
칼레우스가 주위를 슥 둘러보더니 짐짓 여유로운 척 웃음을 지었다.
“……과한 처사가 아니십니까?”
“일개 공작이 탑주께 저지른 무례만으로 죄는 충분하지. 그대가 아직도 황족이라 생각하나?”
그가 작게 손짓한 순간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칼레우스는 당혹한 얼굴을 했으나, 이렇게 흘러갈 것도 어느 정도 예상했는지 생각만큼 동요하지는 않았다. 순식간에 두 팔을 구속당한 그를 그대로 끌고 가려 했을 때 내가 끼어들었다.
“잠깐만.”
아테올이 의아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나는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폭약만으로 일어난 폭발이 아니야.”
타버린 재만 남고 연기 하나 나지 않는 폭발의 잔해가 내 뒤에 있었다. 평범한 폭약이라면 여기에 설치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을 테고, 또 이런 식으로 타이밍 좋게 터지지도 않는다. 아직 이곳의 시한폭탄 기술은 그리 발전하지 못했으니까. 분명 마법적인 장치가 같이 있었다. 나는 한쪽 손을 낮게 들었다. 손 주위로 공기가 일렁거리다가, 흐릿한 빛을 내는 얇은 실이 되어 사방으로 퍼졌다.
주위의 시선이 모두 내게 모여 있었다. 거미줄로 마법을 탐지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목표물을 찾으며 천천히 꿈틀거리던 거미줄이 곧 멈칫하더니 팽팽해지며 우웅, 하는 소리를 냈다.
“찾았어.”
나는 고개를 들었다. 이건 이동용 포털에서 마법사의 이동 경로를 찾아내는 것과 비슷한 원리였다. 즉, 어떤 마법사가 마법을 사용했을 때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흔적이 남아 있기만 하다면 나는 그 마법사의 위치가 어디이든 찾아낼 수 있다는 의미다.
“생각보다 가까이 있네.”
거미줄의 끝은 저 멀리, 칼레우스의 수행원들 사이에 멈춰 있었다. 칼레우스의 얼굴이 처음으로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그날 내게 와서 내가 가짜 탑주임을 확신하고 이런 일을 벌인 것이다. 가짜긴 한데, 진짜가 하는 건 웬만해선 나도 다 할 수 있거든. 미안하게 됐네.
내 시선이 거미줄의 끝으로 향했다. 칼레우스의 수행원들이 웅성거리더니 거미줄을 피해 이리저리 흩어졌다. 거미줄이 얽고 있는 건 딱 한 명이었다. 가장 구석에 있던 말단 시종.
그가 바로 구조물의 폭약에 마법을 건 마법사였다.
설마 이렇게 빨리 들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지, 칼레우스가 당황해 소리쳤다.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탑주님. 아닙니다.”
“지금 내 마법이 틀렸다고 말하는 거야?”
“그, 그런 게 아니라……!”
칼레우스는 더욱 동요해 시종을 보았다. 시종 역시 얼굴이 새파래져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다.
“모두 잡아들여라.”
아테올의 짧은 한마디에 기사들이 움직였다. 세르타를 포함한 내 기사들은 내가 명령하기를 기다리고 있었으나, 굳이 나설 필요는 없어 보였다.
수확제는 그렇게 어수선하게 끝났다.
***
나는 황궁의 지하 감옥으로 향하고 있었다. 수확제 이튿날, 마법사가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다는 보고가 올라오고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은 때였다. 입을 안 여는구나, 아직 안 열 때긴 하지, 안 되면 미궁 지하로 데리고 올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성질 급한 아테올이 이미 직접 심문하겠다며 감옥으로 향했다는 것이다.
뭔지 몰라도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을 것 같아 부랴부랴 쫓아온 길이었다. 그러나 지하 감옥 아래로 내려가기도 전, 저 멀리서 걸어오고 있는 아테올과 마주쳤다. 아무 일도 없었나? 갔다가 그냥 돌아오는 건가. 내 생각은 그와 가까워졌을 때 하얀 옷의 옷깃에 살짝 튄 핏방울을 보고 멈췄다.
“……어떻게 된 거야?”
“마법사가 자백했습니다. 칼레우스의 지시로 한 일이라더군요.”
내가 소식을 듣고 여기에 도착하기까지 20분도 채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미심쩍은 얼굴로 바라보자 아테올은 어깨를 으쓱했다.
“저는 고전적이면서 참신한 고문 방법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 대부분 시간을 오래 잡아먹지 않는 것들이죠.”
“고전적이면서…… 참신한 고문.”
“어떤 방법인지 궁금하십니까?”
“아니.”
곧바로 대답했다. 알지 않아도, 아니, 알지 않는 게 인생을 살아가기에 문제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빠르게 고개를 젓자 아테올은 뭐가 재미있는지 웃더니 스치듯 내 뺨에 입 맞췄다. 레사와 세르타, 다른 기사들도 모두 그것을 보았으나 필사적으로 모르는 척했다.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글쎄요. 칼레우스는 끝까지 부인하겠죠. 재판으로 가게 될 테지만, 냄새 없이 내다 버리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겁니다.”
아테올은 칼레우스를 무슨 음식물 쓰레기처럼 말했다. 죄가 있고 지목하는 자와 부인하는 자가 있으니 재판은 피할 수 없었다. 딱히 그를 두둔해줄 이유가 없었기에 고개만 끄덕이고 말았다. 새삼 칼레우스가 느끼하게 나를 꼬드기려 했던 게 떠올라 약간 비위가 상했을 뿐.
“아무래도 재판에서 이런저런 죄까지 얹어 확실히 처리하는 게 모양도 좋고, 선황과 선황후에게도…….”
아테올이 거기까지 말하다 입을 다물었다. 저쪽에서 다급하게 달려오는 자신의 기사 때문이었다. 기사의 표정이 평범하지 않은 걸 보니 또 무슨 일이 터진 모양이었다. 구금된 칼레우스가, 아니면 대공이 사고라도 친 건가. 덩달아 긴장하는데 기사의 입에서 나온 건 상상도 못한 소식이었다.
“탑주님, 폐하. ……선황후가 잉태했다고 합니다.”
***
직계 황손이 잉태되면 그로부터 33일 동안 모든 재판이 중지되고, 감옥이나 구치소에 있는 죄수들에게도 구금만 유지될 뿐 일반인과 같은 대우가 주어진다. 배 속의 귀중한 핏줄에게 모든 축복을 모으기 위해서라고 했다.
문제는 선황후의 잉태 또한 직계 황손으로 인정된다는 점이었다. 아테올이 아직 미혼이고, 후계를 정한 상태도 아니었기 때문에 죄를 짓고 양위하긴 했으나 선대 황제와 황후의 자식인 배 속 아이, 아테올의 동생이 가장 유력한 후계 후보이기 때문이다.
칼레우스는 모친의 임신 사실을 알았을 게 분명하다. 뭔가 믿는 구석이 있어 보인다 싶더니, 이거였나. 33일이라면 한 달이니 그 사이 뭔가 대책을 마련하려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그런 대담한 짓을 벌였겠지. 하지만 아테올은 선황후의 임신 사실에 떨떠름한 얼굴을 할 뿐 칼레우스를 크게 신경 쓰는 기색은 아니었다.
“정말 괜찮겠어?”
“괜찮고말고요. 무덤을 파는 거죠. 33일이면 죄를 66가지는 만들 수 있는 시간입니다.”
66가지나……. 하루에 두 개씩이다.
“그보다 선황후가 문제입니다.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내가 고개를 젓자 아테올이 피식 웃었다.
“아이를 가진 몸으로 별궁 생활이 어려우니 황궁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하더군요.”
“……대단하네.”
정말 대단했다. 만약 그 요청을 아테올이 받아들이면 죄를 짓고 유폐된 선황후를 어떻게 황궁에 다시 들일 수 있느냐는 질타를 받게 된다. 그렇다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돌아오는 건 아무리 죄인이라도 임신한 모친에게 그래선 안 된다는 비난이다.
선황후는 역시 대단한 사람이었다. 나라면 아테올이 무서워서라도 그렇게 하지 못할 텐데. 지금이야 사람들의 눈이 있으니까 그냥 두는 거지, 아테올의 성격으로 보아 기회만 되면 그들을 좀 더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더 시골이라든가, 외딴섬이라든가, 뭐 그런 곳으로 보내려 작정하고 있을 텐데. 사실 그런 데면 다행이고 가장 편하게 저세상이라는 선택지를 골라두었겠지.
“어떻게 할 생각이야?”
“글쎄요. 어떻게 하는 게 제일 좋을지 생각 중입니다.”
그 말에 나는 잠깐 머뭇거렸다. 지난번, 탑주가 건국 이래 지금까지 줄곧 한 사람이며, 세르타와 클로든, 벨, 심지어 동물들까지 지금까지 탑주와 함께 살아왔다는 기록을 보고 찾아본 게 있다.
“그 아이가 중요한 건 네 후계자가 될 수도 있어서인 거지?”
“그렇죠. 고령으로 임신한 선황후의 몸 상태도 문제긴 하지만, 그야 별궁이 산속 오두막인 것도 아니고 무시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럼 네가 후계자가 필요 없을 거라고 하면 어때?”
“……네?”
황제와 탑주가 결혼하고, 탑주가 황제를 놓고 싶지 않을 때 어떻게 했는지에 대해서다.
아테올이 내 말에 순간 멍한 얼굴을 했다. 이런 모습은 또 처음 본다. 이내 그는 평소의 웃는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 말은, 제 청혼을 수락하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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