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06. 기억이 없으면 사람은 미궁에 빠진다
수확제는 중간까진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곡창지 대부분이 대풍작이었기 때문에 이번 수확제에는 예년보다 더 많은 영주들이 참석했고, 가두 행진에서 뿌리는 꽃과 금, 은의 양도 많았다.
수확제에 참여한 칼레우스는 태연한 얼굴로 나와 아테올에게 인사를 올렸다. 그러나 분명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굴면서 무언가 수작을 부려 놓았을 게 분명했다.
이런저런 연설이며 축사 같은 지루한 시간이 이어지는 동안 나는 칼레우스를 몇 번 흘끔거렸다. 그는 나보다 한참 낮은 자리에서 곧은 자세로 앉아 무대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 불현듯, 내 시선을 알아차렸는지 고개를 돌렸다.
이제 와서 시선을 피하면 더 이상하다.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계속 바라보자 칼레우스는 미소를 지었다. 역시 얼굴만은 아테올과 닮았다. 칼레우스에게 고정된 내 시선을 알아차린 아테올이 옆에서 큼큼 헛기침했다. 흘끗 보니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시치미를 뚝 뗀다. 뭐 하는 거람.
드디어 지루한 식순이 끝나고 야외 만찬장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돌아다닐 마음은 없었지만.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아테올은 내킬 때면 남과 어울리는 일에 그럭저럭 재능이 있었다. 원래 세계에서나 여기서나 일관적으로 사회성 바닥인 나와 달리. 사람들과 몇 마디 하러 간 아테올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눈에 띄지 않는 구석으로 물러나려는데 반갑지 않은 놈이 나타났다.
“탑주님.”
“…….”
피할까 하다가 그렇게까지 할 순 없어 그쪽으로 몸을 돌렸다. 칼레우스가 평소보다 얌전한 차림을 하고 서 있었다. 황태자 자리에서 내려온 이후 그가 처음 참석하는 대형 연회였다. 당연히 예전보다 복장이 수수하다. 이전의 꽁지깃 펼친 공작새 같은 꼴을 생각하면 그나마 봐줄 만한 것 같기도 하고.
정중한 인사를 그냥 고개만 까딱여 받는 것으로‘너와 대화하기 싫다’는 의지를 표현했다. 그러나 칼레우스는 전혀 굴하지 않고 말을 걸어댔다. 또 지난번처럼 과거 일을 들먹이면서 기억나느냐느니 어쩌니 말할까 봐 흘려들을 수도 없었다. 다행히 오늘 그는 날씨가 어쩌네, 어느 지방의 풍작이 저쩌네 이번에야말로 정말 쓸데없는 이야기만 했다.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 내 태도에 칼레우스가 난처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자리가 많이 불편하십니까, 탑주님?”
“글쎄.”
네가 꺼져주면 좀 편해질 것 같은데. 물론 칼레우스는 아직 꺼질 마음이 없어 보였다.
“올해도 수확제는 평온하군요.”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지. 나는 흘끗 칼레우스를 보았다.
“지금까지 한 번도 수확제에서는 사고가 일어난 적이 없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
온몸이 빳빳하게 굳는 듯했다.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지금까지 열린 다른 수확제는 모두 평탄하게 끝났다. 그렇긴 한데, 그걸 지금 굳이 짚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때문에 칼레우스의 말은 마치 지금부터 사고가 일어날 거라는 예고장처럼 들렸다.
내 시선에 불편한 빛이 담겼는지 칼레우스가 얼른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고개를 숙이기 전, 언뜻 눈동자에 스친 불온한 기색을 읽지 못할 정도로 내가 아둔하진 않았다.
“물러가.”
“예, 탑주님.”
그는 순순히 돌아서서 물러났다.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후 곧바로 아테올을 찾았다. 그는 저만치서 외국의 귀빈과 환담 중이었다. 그를 부르려 한 순간, 화약과 비슷한 냄새가 흐릿하게 코끝을 스쳤다. 완전히 화약만의 냄새는 아니다. 이건……. 분명 마법이 섞인.
정말 찰나의 순간이었다. 냄새에 이끌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본 그 잠시. 내 뒤쪽으로 설치되어 있던 구조물 위로 작은 불티가 톡, 하고 떨어졌다. 정말 작은 불씨였다. 그러나 그것은 구조물에 닿은 순간 사아아,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더니 이내 굉음을 불러일으키며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단숨에 일어나는 불길에 나는 팔로 얼굴을 가렸다.
“탑주님!”
쾅쾅쾅, 연달아 들리는 폭음 사이로 비명과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정신없이 뒤엉켰다. 사람들이 뛰기 시작하는 소리, 울음소리, 비명. 혼란 속에서 반사적으로 폭발의 여파가 일정 범위 밖으로 미치지 않도록 장벽을 세웠다. 그렇게 벽을 두른 것까진 좋았으나 곧 내가 멍청한 짓을 했음을 깨달았다. 내가 불길에 너무 가까이 있다.
나무로 된 구조물을 날름날름 삼킨 시뻘건 불꽃은 순식간에 시야를 가렸다. 그 직전에, 장벽 바로 앞까지 달려온 아테올의 모습이 보였다. 정말이지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저렇게 당황하는 얼굴이라니. 과장을 좀 보태면 놀라서 울게 생겼다.
뜨거운 열기가 훅 몸에 미쳤다. 그제야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고개를 가볍게 젓자, 열기와 불꽃은 나를 겁내듯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어쨌든 불에는 물이지. 나는 물을 불 위로 떨어뜨렸다. 내 주위로는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탑주가 연기에 그을리고 물에 쫄딱 젖은 채 나가면 그만큼 우스운 일도 없을 테니까. 우스워 보이기만 하면 다행이지. ‘탑주는 가짜다’라는 소문을 다시 부채질할지도 모른다.
‘칼레우스는 그걸 노린 모양인데.’
미안하지만, 칼레우스의 뜻대로 되진 않는다. 물이 불을 집어삼켰다. 말 그대로, 하늘 높이까지 치솟은 시커먼 연기와 불길을 젤리처럼 자유자재로 구불거리는 물이 완전히 휘감았다. 갑자기 타올랐던 불은 허무할 만큼 빠르게 꺼졌고, 내가 불러낸 물은 공기 중의 수분이 되어 흩어졌다. 피부로 느껴질 만큼 공기가 습해졌다. 곧 장대비가 내릴 것이다.
다행히 나는 로브 자락 하나 타지 않은 채, 그을음에 더러워진 부분도 없이 모든 게 정리된 자리에 서 있을 수 있었다. 일순 주위가 소리를 모두 제거한 것처럼 고요해졌다. 뭔가 잘못되었나 싶어 고개를 돌리려 한 순간 뭔가가 들소처럼 달려들어 나를 들이받……은 게 아니라 끌어안았다. 아테올이었다.
그와 동시에 정적은 함성으로 바뀌었다.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그럴 리가……. 멀쩡해.”
아테올이 속삭인 만큼 나도 작게 속삭이자 그가 나를 더 꽉 안으며 내 등을 쓸었다. 로브 후드가 벗겨질 것 같아서 손끝으로 꼭 잡고 끌어내려야 했다. 붉어진 얼굴을 감추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지옥의 것 같은 불길을 아무렇지도 않게 없애버린 마법사, 탑주를 향해서 환호를 보냈다. 뭐 나로서는 전화위복이었다. 그리고 이 전화위복을 겪게 해준 게 누구인지는 조사하지 않아도 뻔한 일이다. 흘끗 저편의 칼레우스를 보려 하는데 몸을 껴안은 팔 힘이 아플 정도로 강해졌다. 윽, 하고 신음하며 몸을 비틀었지만 힘은 약해지기는커녕 나를 터뜨려 죽이려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가 되었다. 뭐라 항의하려 했으나 그 순간 아테올의 몸이 가볍게 떨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뭐야, 놀랐어?”
“……놀란 게 아니라 걱정한 겁니다.”
아테올은 그제야 내게서 떨어져 한 손을 들었다. 그 몸짓에 주위가 다시 조용해졌다. 아테올이 뭐라 말을 하기도 전, 먼저 움직인 건 칼레우스였다. 불이 너무 순식간에 꺼져서인지 그의 얼굴에는 희미한 당황이 묻어 있었다.
“무사하십니까, 탑주님.”
“보다시피.”
그는 금세 표정을 만들어내 그저 걱정스럽다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 가증스럽기 짝이 없었다. 일정 거리까지 가까이 온 그가 좌중을 한 번, 나를 한 번 보더니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뭐야. 무슨 말 하려고 저래?
“조사를 해보아야 알겠지만, 탑주님. 그리고 폐하. 수확제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건 초유의 사태입니다.”
아테올이 ‘그래서?’라고 묻듯 고개를 까딱였다.
“외람되오나…… 이 일의 원인이, 한동안 떠돌던 그 불온한 소문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갑작스러운 칼레우스의 말에 아테올이 미간을 확 찌푸렸다.
“실로 조심스럽습니다. 또 이런 일이 일어나기라도 하면, 그때도 이렇게 무사히 넘어갈 수 있을지요. 하여 송구함을 무릅쓰고 이 칼레우스가 탑주님께 청을 드립니다.”
무슨 청. 빤히 그를 쳐다보았다. 눈이 음험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탑주님이 탑주님이시라는, 누구도 부정 못할 증거를 보여주심이 어떠신지요.”
순식간에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칼레우스를 향해 야유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평화로웠던 수확제에서 테러 비슷한 게 일어난 사실에 충격을 받은 이들은 칼레우스의 말에 그런가? 하는 표정을 짓기도 했다. 내가 탑주라는, 부정하지 못 할 증거. 그런 건 없다. 나는 일단 탑주가 아니니까.
그러나 이 자리를 빠져나갈 방법은 분명하게 있었다.
“사란트 공.”
“예, 탑주님.”
“그대가 지금 감히 내게 정당성을 증명하라고 요구하는 건가?”
“요구라니, 당치 않습니다. 저는 그저…….”
칼레우스는 사람들 쪽을 흘끗 보더니 부러 목소리를 키웠다.
“탑주님께서 저와의 어린 시절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시는 것에, 송구하오나 의구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요.”
그 말에 또 좌중은 술렁거렸다. 황태자와의 어린 시절.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고, 저렇게 말할 정도로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건, 그래. 이상한 일일 것이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을지도 모른다. 며칠 전이었다면 말이다.
지금은 아니었다.
“사란트 공.”
“예, 탑주님.”
탑주라고 생각 안 하면서 뻔뻔하긴. 나는 아테올에게서 한 걸음 더 떨어져 최대한 꼿꼿한 자세로 칼레우스를 굽어보았다.
“내가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황실의 어린아이들을 만나 왔을 것 같아?”
“…….”
“그런데 그중에 널 굳이 기억해야 한다고? ……욕심이 과한 것 아니야?”
칼레우스가 당황했다.
“사란트 공. 이 제국이 건국되고 수백 년. 그동안 ‘황태자’라는 이름으로 어린 시절을 나와 함께 보낸 아이가 몇 명이나 되는지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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