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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의 원수를 공략합니다-76화 (76/93)

76화

06. 기억이 없으면 사람은 미궁에 빠진다

“그게 다입니까?”

턱을 괴고 있던 아테올이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칼레우스가 찾아와서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옛날 추억이나 늘어놓고 갔다는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설마 그런 쓸데없는 이야기나 하려고 오진 않았을 것 아냐. 뭔가 속셈이…….”

“아.”

“왜?”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러 온 게 맞을지도 모릅니다.”

“……?”

“옛날 추억을 떠들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어쩌면, 당신을 떠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제야 나도 얼빠진 “아.” 소리를 냈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칼레우스가 내내 떠들었던 건 잡담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의 모든 질문에 건성으로 그래, 기억나, 맞아, 이런 대답을 했다. 그런데, 그 질문에서 언급된 일 대부분이 실제로는 없었던 일이라면? 칼레우스 역시 가짜 탑주 소문을 듣고 어떻게든 써먹거나 확인하기 위해 눈이 돌아갔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아무 생각도 없이 그에게 정답을 내놓은 꼴이 된다. 왜 좀 더 빨리 알아차리지 못했지? 스스로의 멍청함에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아테올이 어떻게 생각할까……. 걱정하며 아테올의 얼굴을 보자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어차피 칼레우스가 하는 짓이라고 해봐야 뻔합니다. 흠, 곧 수확제죠. 일을 벌이려면 아무래도 어수선한 때를 노릴 테니, 그때를 조심하는 게 좋겠군요.”

수확제. 또 축제였다. 아테올의 말대로, 뭔가 일을 꾸민다면 수확제의 소란을 이용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일이라. 만약 내 말 몇 마디로 칼레우스가 나를 의심하기 시작했다고 하면, 수확제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시우가 대공의 수중에 있다는 게 지금은 다행이었다. 나를 끌어내릴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시우일 테니까. 칼레우스 혼자서는 별 위협이 안 된다는 의미였다.

“그럼…….”

나는 아테올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가 왜요, 라고 묻듯이 고개를 까딱했다.

“그냥 지켜보는 게 어때?”

“칼레우스를 말씀이십니까?”

“응. 안 그래도, 처리할 명분이 없잖아. 뭐가 될지 모르겠지만 알아서 사고를 쳐준다면 고맙지.”

시우를 이용하고 나오지 않는 이상 무슨 짓을 하든 내게 큰 위협이 되진 못할 것이다. 안이한 생각인가? 그건 아테올의 반응을 보면 알겠지. 아테올을 바라보자 그는 잠시 가만히 있다가 피식 웃었다. 내가 아주 오답을 말하진 않은 모양이었다. 아니, 오답이 아닌 정도가 아니라…….

“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

“부정은 안 하겠습니다.”

아테올이 산뜻하기까지 한 말투로 대답했다. 예상한 바였다. 그 역시 칼레우스가 어떻게 나오건 큰 위협이 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올해는 풍작일 거라고 하더군요.”

“……그래?”

수확제에 걸맞은 화제다. 대강 대답하는데 아테올이 말을 이었다.

“제대로 된 탑주님이 계신 덕분입니다.”

“…….”

나는 말없이 아테올을 노려보았다.

“헛소리야.”

“설마…… 아직도 도망칠 생각을 하고 계신 건 아니겠지요?”

내 한마디에 갑자기 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새빨간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다. 윽, 아테올이 저렇게 쳐다보기만 하면 무서워 죽겠다. 저러다 아무렇지도 않게 독약 병을 내밀 것 같단 말이야.

“그런 눈으로 좀 보지 마.”

“제 눈이 어때서요. 뭐, 눈매가 사납다는 말은 자주 듣습니다만.”

눈매가 사나운 게 문제가 아니었다. 내 개인적인 체험의 문제지. 나는 한숨을 내쉬는 척 시선을 피했다.

“도망 하니까 말인데, 대체 어떻게 그렇게 잘 찾는 거야? 난…… 꽤 잘 도망쳤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습니까?”

“…….”

“그렇게 생각하셨군요.”

놀리나. 발끈해서 다시 노려보자 아테올이 웃음을 지었다.

“제가 잘 찾는다기보단, 당신이 티 나게 움직이는 겁니다. ……자세히 말씀드리면 다음 도망에 참고할 것 같으니 말하지 않겠습니다.”

이미 다음에 또 도망치려 한다는 게 아테올의 머릿속에선 기정사실인 모양이다. 솔직히 말해 장담할 수 없지만. 짧은 침묵 뒤 아테올이 말을 돌렸다.

“시우는 나크사벨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탑에 구금된 것을 감시인들이 확인했고요.”

“따라간 감시인들은 무사해?”

대공이 나크사벨로 출발할 때 감시인들을 보던 눈길을 생각하면 가는 길에 정체 모를 산적을 만나 그들이 몰살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는데. 아테올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직은 무사합니다. 대공이 내전을 일으킬 생각이라면 그들을 죽이겠죠.”

그들은 죽을 각오로 간 거겠지. 그런 엑스트라 캐릭터들에게 안타깝다는 마음이 들었다. 예전엔 아무 생각 없었는데, 아무래도 내가 이 세계에 너무 몰입한 모양이다.

힐끗 시선을 돌려 상태창을 보았다. 96%, 99%, 두 개의 호감도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아테올.”

“예.”

“만약에 어떤…… 수치(數値)나 감정을, 예를 들면 ‘호감’을 굳이 다른 단어로 부른다면 뭐가 될 거라고 생각해?”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는지 아테올의 눈이 동그래졌다. 약간 어려 보여서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뜬금없고 어려운 질문을 하시는군요……. 글쎄요.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꼭 바꾼다면 전혀 연상되지 않는 다른 말로 하지 않겠습니까.”

“왜?”

“다른 단어로 지칭한다는 건 원래 단어를 숨기려는 의도일 테니까요.”

음, 그건 그러네……. 그럼 호감도와 본래 단어는 전혀 상관없는 다른 단어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아테올이 ‘그런 건 갑자기 왜 물으십니까?’라고 물을 기색이어서 얼른 말을 돌렸다.

“대공은 수확제에 참석하지 않겠지.”

“……그렇겠지요. 그쪽도 책임자라고 할지, 보호자로서 자숙해야 할 입장이니까요. 신경 쓸 건 칼레우스뿐입니다.”

일을 벌이지 못하도록 막는 게 아니라, 일을 벌이게 두고 잘 수습하느라 드는 신경이겠지만. 아테올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말했다.

“유리 님.”

“왜.”

“시우를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보낸 게 걱정되십니까?”

뜻밖의 질문에 이번엔 내가 눈을 둥글게 떴다. 아테올이 이런 걸 물을 줄은 몰랐다. 뭐, 걱정이 전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오히려 잘됐다는 생각이 더 컸다. 호감도야, 편지라도 보내보지 뭐.

“수도에 있는 게 더 싫었어. 마탑에서 너무 가까워.”

“그렇지요. 대공도 노리는 바가 있어 시우를 수도로 보낸 것일 테니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가서 한동안 수도 구경이나 하라고 보낸 건 아니지 않겠는가? 다만, 때가 아니라느니 한 말을 생각하면 이번엔 정말 정찰이나 경험 삼아 보낸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말이 미심쩍어.”

“무슨 말이요?”

“때가 아니라고…… 한 말.”

“흠.”

그 말을 할 때 대공이 어떤 표정이었지? 기억에 보정이 더해져서인지 엄청난 야망으로 들끓고 있었던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건 즉, 우리에게 시간이 있다는 뜻이죠.”

“……그것도 그렇지만.”

아테올의 말이 맞았다. 때가 아니라는 건 준비가 덜 되었다는 뜻 아닌가. 그 ‘때’가 언제 올지 모르겠지만, 으음. 어쩌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 아닐까? 조용히 도망칠 수 있는. 그런 생각을 하며 슬그머니 아테올을 보았다. 차라리 아테올이 나를 어디 별궁 같은 곳에 아무도 모르게 유폐해 주기라도 하면 어떨까…….

하지만 아테올은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날 끌어당겨 안더니 픽 웃으며 속삭였다.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건, 안 됩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떻게 알고?”

“어차피 도망칠 생각이겠죠. 제가 원하는 건 딱 하나입니다. 당신은 그것만 들어주시면 됩니다.”

“네가 원하는 게 뭔데.”

“그야 당신이 진짜가 되는 거죠.”

“……그것만은 못 들어주겠다면 어쩌게?”

“그런 선택지는 없습니다.”

내 선택지를 왜 네가 정해. 진짜 이 자식 상태창 같은 놈이네. 원하는 선택지를 번쩍번쩍 강조해 두던 상태창이 떠올랐다. 지금 아테올도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아무튼……, 칼레우스도 그리 신경 쓸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은 일부러 어느 정도 자유를 주고 있는 것이니까요. 그걸 허점으로 생각해서 계략을 꾸미다 멋대로 자멸하겠지요.”

“으응……. 칼레우스는 그렇게 안 생겨서 은근히 사람을 잘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 어릴 때부터 별로 속아본 적이 없어서 그런가.”

나를 끌어안은 아테올이 멈칫했다. 의아하게 올려다보자, 그가 고개를 기울이더니 물었다.

“칼레우스를 잘 아는 것처럼 말씀하셔서요.”

아차.

칼레우스의 그런 성격은 전생 6년 동안 느낀 건데……, 아무래도 책을 읽어서 얻을 수 있는 지식은 아니다. 조심해야겠다. 책에서 읽었다고 하고 넘어가긴 애매한 문제니까. 나는 상황을 얼버무리기 위해 아테올에게 몸을 기대며 입술을 내밀었다. 다행히 아테올은 그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

시간은 빠르게도 흘러 수확제 당일.

요란한 폭발음과 함께, 나는 눈앞에서 슬로모션이 펼쳐진다는 게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별로 알고 싶지 않은 사실이었다. 검붉은 화염이 용암처럼 솟구쳐 순식간에 시야를 뒤덮었다. 어마어마한 열기와 연기가 온몸을 뒤덮었다.

불길에 잡아먹히는 시야에서 마지막으로 눈에 들어온 건 아테올이었다.

……흠. 저렇게 당황하는 표정은 처음 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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