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06. 기억이 없으면 사람은 미궁에 빠진다
속으로 몇 번이나 물었으나 상태창은 말이 없었다.
“누가 그 말을 입력한 거냐니까.”
참다못해 소리를 내서 말했다. 하지만 여전히 상태창은 스탯과 호감도, 두 개를 띄운 기본 메뉴에서 바뀌지 않았다. 색도 원래의 갈색으로 돌아와 있다. 내 말에 대답한 건 상태창이 아닌 다른 쪽이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
중얼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는지 아테올이 나를 보고 있었다. 순간 꿈속의 그와 지금 그의 모습이 겹쳐졌다. 이대로 손을 뻗어 날 껴안고 침대를 구를 것만 같다. 그 모습을 떨칠 겸, 대답도 할 겸 고개를 가로저었다.
“혼잣말은 제게도 들리도록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럼 혼잣말이 아니잖아. ……왜?”
혹시 혼잣말에 안 좋은 기억이라도 있나? 아테올은 아무래도 황자치고 좋지 못한 대우를 받으며 자랐으니까…….
“궁금하잖아요.”
“…….”
깊게 생각한 내가 바보였다.
“아, 그렇지……. 칼레우스의 새로운 소식이 있습니다만. 들으시겠습니까?”
“칼레우스?”
아테올의 목소리는 자고 일어나서인지 조금 갈라져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물었다.
“칼레우스 전에 선황과 선황후 이야기를 해야겠군요.”
그러고 보니 선황이 자꾸 찾는다던가, 그런 이야기를 했었지. 쓸데없는 용건일 거라고. 그새 만나고 온 건가. 아테올이 몸을 반쯤 일으키더니 물주전자를 찾아 물을 따라 마셨다.
“아직 만나진 않았습니다. 상대가 올지, 안 올지 기다리며 초조해하는 시간이 그들에게 꽤 즐거울 것 같아서.”
물잔을 내려놓는 그의 얼굴은 꽤 즐거워 보였다. 나는 베개를 끌어안으며 잠자코 그가 하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용건은 미리 들어두었습니다. 무슨 말을 하려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글쎄…….”
“당신이 가짜라는 이야기.”
“…….”
그야 요즘 화제이긴 하지만, 황제를 불러들이기까지 해서 할 말은 아니지 않을까? 대단한 카드인 것도 아니고.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아테올이 웃었다.
“그러니까 말씀드리지 않습니까? 당신이 이 나라를 구한 거라고요. 선황이 10년만 더 집권했어도 사람이 수만 명은 죽었을 겁니다.”
“뭐야……. 미, 미래를 알아?”
순간 나도 모르게 당황해서 물었다. 선황의 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테올은 이미 아는 건가? 설마 아테올도 내 빙의와 회귀에 뭔가 얽혀 있는 걸까, 아니면 역시 그가 주인공이라서…….
“아니요. 미래를 아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만 예측하는 거죠. 점점 오를 세금, 단절되는 교역, 틀어진 치수(治水), 뭐…… 그런 문제들 말입니다. 결과적으로는 사람이 죽게 되죠.”
“아.”
깜짝 놀랐다. 아테올은 그런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손을 뻗어 내 뺨을 문질렀다. 꼭 귀엽다고 말하는 듯한 태도였다. 괜히 부끄러워져서 옆으로 얼굴을 뺐다. 그때 마침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천상에서 내려온 구원의 손길로 느껴졌다.
“누, 누구야.”
“탑주님. 클로든입니다.”
평소에는 대답도 안 하면서 재깍 묻자 익숙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내가 아테올과 함께 있을 때는 좀처럼 침실 가까이 오지 않는데, 급한 용건이라도 있나 싶었다. 아테올이 로브를 걸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저벅저벅 문가로 걸어갔다.
“무슨 일이지?”
“폐하. ……사란트 공이 탑주님께 알현을 청하고 있습니다.”
클로든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란트 공은 칼레우스를 말했다. 칼레우스는 앞서 공식적으로 황태자 작위를 박탈당한 상태였으나, 아무 작위도 없는 사람에게 황태자와 황후의 임무를 맡길 수는 없었다. 해서 수도 북쪽 땅, 사란트 영지의 공작 위를 임시로 받은 상태였다.
“그는 여전히 주제를 모르는군. 그대도 그래…… 칼레우스가 알현을 청한다는 게 탑주의 개인적인 시간을 방해할 이유가 된다고 보나?”
“송구합니다. 다만, 이번이 직속 기사의 열한 번째 방문인지라.”
뭐, 열한 번째? 끈질기기도 했다. 침대 너머로 고개를 뺐지만 로브를 입은 아테올의 너른 뒷모습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늘은 탑주님께 말씀이라도 올려주지 않으면 돌아갈 수 없다고 하기에.”
“흠…….”
그런데 생각보다 아테올의 반응이 유했다. 나도, 아테올도 잠들어 있는 시간을 클로든이 방해한 건데……. 응? 그런 시간에 기사가 찾아온다고? 그것도 몸을 사리고 또 사려도 모자란 칼레우스의 기사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에 뒤늦게 시간을 확인하자 벌써 정오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화들짝 놀라 일어났는데 몸에 걸칠 게 아무것도 없었다. 급한 대로 얇은 이불을 끌어당겨 어깨에 두르고는 아테올의 곁으로 갔다. 클로든이 잠시 멈칫했다가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몇 번을 왔었다고?”
“사란트 공이 직접 찾아왔던 것까지 포함하면 스무 번 이상은……. 계속 거절해 왔습니다만, 이대로 두면 만나주실 때까지 찾아올 것 같습니다.”
처음에 칼레우스가 날 만나고 싶어 한다고 하기에 앞으로도 쭉 거절하라고 했었다. 그런데 설마 스무 번 넘게 찾아올 줄은 몰랐지. 끈질기기가 장마철의 곰팡이 수준이었다. 닦아도 닦아도 계속 뿌리에서 솟아나는 곰팡이.
“알겠어, 한번 찾아오라고 해.”
클로든이 고개를 깊게 숙이고 물러갔다. 이대로 계속 무시한다는 선택지도 있었지만, 끈질기게 찾아오는 이상 한 번은 만나야 했다. 공식적으로 칼레우스가 무슨 죄를 지은 건 아니기 때문이다. 역시 그때, 선황과 선황후를 보낼 때 한꺼번에 보냈어야 했는데. 결과적으로는 그가 그들의 죄를 캐내는 데에 도움을 준 셈이 되어버리면서 일이 어려워졌다.
한숨을 내쉬는데 옆에서 손이 뻗어 나오더니 몸이 번쩍 들렸다.
“맨발로 걸어 다니시면 안 됩니다.”
안 될 것까지야……. 지금까지 늘 그랬는데. 하지만 아무 말 않고 안겨서 침대로 돌아갔다.
“선황과 선황후를 만나야겠습니다. 가서 헛꿈 꾸지 말라고 잘 말해 두고……, 칼레우스도 어떻게든 해야겠군요.”
“당장은 어쩔 방법이 없는 거 아니야?”
“없을 리가요. 가족이 하나 되어 개수작을 부리고 있으니 빨리 처리해야지요.”
“너도 그 가족이면서…….”
그러자 아테올이 솜사탕이라도 내려놓듯이 조심스레 나를 내려놓고는 턱을 깨물었다. 아파서 어깨를 때리자 그가 픽 웃었다.
“그런 말씀 하시면 서운합니다.”
뭐, 그렇긴 하겠다. 나 같아도 그런 가족이랑 같은 묶음에 들어가긴 싫었다. 가족을 가져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아무 가족이나 다 좋다는 건 아니었다.
“농담……, 아니, 미안.”
“……진지하게 사과하시라고 드린 말씀은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아테올은 피식 웃더니 나를 이불째 침대에 눕히고 뺨에 입 맞췄다.
***
“존안을 뵙고 싶었습니다, 탑주님.”
인사를 마치자마자 칼레우스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조금이라도 ‘오래 기다렸다’느니 ‘이제야 허락해 주신다’느니 하는 말이 나오면 무례하다고 꼬투리 잡아서 보내버리려고 했는데 의외의 방향성이었다.
“내가 보고 싶을 일이 뭐가 있어.”
“서운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윽, 갑자기 며칠 전 아테올이 비슷한 말을 한 게 떠올라 약간 소름이 돋았다. 하필 얼굴도 똑같아서는.
“하긴, 어릴 적에도 탑주님은 원치 않으시면 언제까지고 저를 만나주지 않으셨지요.”
“…….”
어릴 때 일이야 내 알 바 아니다……. 애초에 나였던 것도 아니고. 불만 있으면, 그때의 ‘어린 유리(진짜 유리였는지 가짜 탑주였는지는 모르겠지만)’한테 가서 따지든가.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결국 제가 연못에 빠진 후에야 저를 만나주셨는데.”
“……기억나.”
사실 안 나지만, 황태자가 연못에 빠진 사건인데 기억 안 난다고 하면 의심할 수도 있었다. 대강 대답하자 칼레우스가 웃었다. 짜증 나게 웃는 얼굴도 아테올과 비슷했다. 모든 유전자가 얼굴에만 몰려 닮아버린 게 분명하다.
그 후로도 칼레우스는 어릴 때 이야기를 주절주절 떠들어댔다. 참다못한 내가 “그래서.”라고 말하며 탁자를 가볍게 내리칠 때까지.
“하고 싶은 말이 뭐야?”
“그저 당신을 다시 뵙고 싶었을 뿐입니다.”
으윽. 느끼해. 사람 잡는다!
심지어 칼레우스는 정말로 그게 목적이었던 것처럼 짧은 알현 시간 내내 내게 잡담과 나를 찬양하는 말만 늘어놓다가 사라졌다. 칼레우스가 몸에 밴 정중한 인사를 하고 돌아간 뒤, 나는 어이가 없어서 그가 나간 문을 쳐다보고 있었다.
‘……불안한데.’
황당함은 점점 다른 느낌으로 바뀌었다. 불안해졌다. 저 칼레우스가 어떤 꿍꿍이도 없이 스무 번이 넘도록 탑 앞을 서성거리며 날 만나게 해달라고 애걸복걸했을 리 없다. 한두 번 만나서 내 마음을 돌릴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도 않았을 거고.
‘무슨 생각이람.’
아무래도 아테올에게 칼레우스를 더 예의 주시하라고 말해야 할 것 같았다.
***
유리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시각, 칼레우스는 마차에 올라타며 창밖으로 까마득히 높은 마탑을 올려다보았다.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결국 제가 연못에 빠진 후에야 저를 만나주셨는데.”
“……기억나.”
대화를 떠올린 후 칼레우스는 미소를 지었다. 흡족한 듯 음험한 듯, 어두운 미소였다.
‘기억이 날 리가.’
오늘 탑주 앞에서 늘어놓은 말은 전부 지어낸 소리였다. 탑주는 대강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 기억나, 그런 대답을 했지만 기억이 날 리 없다. 없었던 일이니까.
마차가 출발했다. 칼레우스는 더욱 웃었다. 탑주는 무언가 숨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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