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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의 원수를 공략합니다-73화 (73/93)

73화

5. 활자가 움직이는 모습으로

시우를 죽였다면, 맞다. 나는 아테올에게 실망했을 것이다. 아주 크게. 어쩌면 일방적으로 엄청난 감정의 골이 생겼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아테올은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을 줄 알았는데.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는데 아테올이 몸을 일으켰다.

“이만 돌아가시지요. 탑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혼자 갈 수 있어.”

“그럼 같이 갈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이 궤변은 뭐야? 어처구니가 없는데도 반박하지 못하고 끌리듯 일어났다. 그와 마주 앉아 마차를 타고 가면서 계속 생각했다. 진심일까, 아닐까. 상태창의 말이 떠올랐다. 아테올을 믿지 못하느냐고. 참 나. 내가 아테올을 못 믿게 된 이유는 대부분 상태창 때문 아닌가? 나머지는 아테올 잘못이고. 아니, 어쩌면 내 구질구질한 성격 탓인지도.

내가 생각하기에도 내 성격은 좀 음울하고 울적한 편이었다. 만약 내가 햇살처럼 밝은 사람이었다면, 아테올을 믿는 게 더 쉬웠을 수도 있지. 하지만 그렇지 못한 걸 어쩌겠는가. 생각의 늪에 빠지고 있는데 아테올이 말을 걸었다.

“요즘 선황과 선황후가 자꾸 저를 찾더군요. 할 말이 있다면서.”

“특기지.”

그들이 다급하게 나를 불러 오색구름을 보여주었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의 그 어색한 공기라니……. 역시 그들은 황제와 황후로서 그리 좋은 재목들은 아니었다. 아테올을 자꾸 불러대는 이유도 속이 훤히 보인다. 어떻게든 유폐된 그 궁에서, 사실 이름만 궁일 뿐 커다란 감옥에 가까운 곳에서 나오고 싶다는 거겠지.

“죄인이라 해도 부모인지라 내내 방치하자니 보는 눈들이 꽤 따갑습니다.”

“그럼 만나. 좋아하잖아. 권력의 맛.”

그러자 아테올이 잠시 눈을 둥글게 떴다가 큰 소리로 웃었다. 이게 그렇게 웃긴 말이었나? 한참 웃던 그가 웃음기를 여전히 머금은 채 대답했다.

“그렇지요. 요즘은 매일 즐겁습니다. 제게 이런 자리를 주신 당신에게 감사할 따름입니다.”

“어차피 내가 없어도 너는 황제가 됐을 거야.”

“뭐, 부정은 않겠습니다만 좀 더 시간이 걸렸겠죠. 몇 년쯤…… 6년은 더 걸렸을까요.”

6년이라는 말에 내가 멈칫했다. 회귀하고 벌써 다섯 달이 지났다. 유등제가 있었던 포레의 달에 내가 가짜인 게 밝혀졌으니, 지금으로부터 딱 6년 후에 아테올은 황제가 되는 셈이었다. 햇수가 꽤 정확해서 미미하게 소름이 돋았다.

“왜 하필 6년이야?”

“모든 준비가 끝나기까지 그쯤 걸렸을 테니.”

전생의 그는 언제 시우를 만났을까. 이때의 계획에 시우, 진짜 탑주라는 존재가 없었던 건 확실하다.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용기를 쥐어 짜내 물었다.

“만약에 내가 너한테 접근하지 않았어. 그리고 네가…… 대공보다 먼저 시우를 만났어. 그러면 네 계획은 좀 더 쉬워졌을까?”

“그야 물론이지요.”

빠른 대답이었다. 움찔하는데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훨씬 재미없었을 겁니다.”

“재미…….”

“인생에는 수많은 갈림길이 있지 않습니까. 길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길에는 무엇이 있었는지 알 수 없죠. 흠……. 이 재미를 영영 모르는 채 살았을 거라고 생각하면 아득해집니다.”

이 재미를, 이라고 말하며 아테올은 손을 뻗어 내 팔을 잡더니 휙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나는 아테올의 무릎 위에 앉아 있었다.

“뭐야, 놔.”

“당신이 먼저 시작한 이야기 아닙니까.”

“내가 언제. 네가 이상한 쪽으로 끌고 간 거잖아!”

그러거나 말거나 아테올은 나에게 키스했다. 처음엔 버둥거렸지만, 입술과 혀가 섞일수록 저항이 희미해졌다. 깊고 진한 키스에 몸이 사르르 녹는 것 같았다. 목에서 으응, 하는 신음이 무의식적으로 흘러나왔다.

아테올의 손이 내 로브 위를 여기저기 더듬다가 머리로 올라가 후드를 홱 젖혔다. 동시에 어깨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을 살짝 그러쥔다. 입술이 더욱 격렬하게 맞붙었다. 나는 순순히 입을 열고, 그가 혀를 내밀라고 하면 내밀었고, 입술을 빨라고 하면 빨았다. 키스는 오래도록 이어졌다.

“으, 응……, 으음…….”

질척한 소리에 신음이 섞였다.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옷 위에서 가슴과 허리, 엉덩이를 만지는 손길이 뜨거웠다. 그러다 마차가 멈춰 있다는 걸 깨닫고 퍼뜩 정신이 들었다. 나는 두 손으로 아테올의 가슴을 퍽 소리가 나도록 밀어냈다. 혀를 잘근잘근 깨물고 있던 아테올은 순순히 밀려났다.

“밖에 세르타랑 클로든이 있을 거야…….”

“아.”

아테올이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상당히 자극적인 말이었습니다.”

“뭐……? 어, 어디가? 어떤 점이?!”

“모르셔도 됩니다. 모르시는 편이 더 사랑스러우니.”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내 젖은 입술을 슥슥 닦아주고는 천연덕스럽게 자신의 얼굴도 내밀었다. 어쩔지 고민하다가 손등으로 대강 문질러주자 손등 아래에서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그가 내 손을 잡아 손등에 키스하곤, 후드를 두 손으로 잡아 다시 씌웠다.

마차 문이 열릴 때까지 내 얼굴은 새빨간 채였다. 아테올이 따라 내리기에 탑에도 같이 들어올 줄 알았지만, 그는 정중하게 인사하며 내가 들어가는 걸 배웅할 뿐이었다.

왠지 김이 빠진 기분으로 방에 들어왔다. 그런데 시우가 떠나기 전에 몰래라도 한 번쯤 만나야 하나. 시우의 호감도가 필요한데……. 아니, 그러면 내가 시우를 용서하는 게 된다고 했지. 그건 곤란했다. 호감도는 나중에 편지라도 주고받으면서 올려보지 뭐.

“필요한 건 없으십니까?”

클로든이 물었다. 오늘도 걱정스럽다는 얼굴과 목소리였다. 별로 필요한 건 없는데, 아.

“시우가 보려고 했다는 책 말이야. 정확히 뭐였어?”

“탑주님의 기록 중 사생활을 담고 있는 쪽입니다. 가지고 올까요?”

뭐야, 가지고 올 수 있는 건가. 하긴 탑주에게 불가능한 게 어디 있겠어. 고개를 끄덕이자 클로든은 알겠다고 말하고 자리를 뜨고선 3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책을 가지고 돌아왔다. 뭐야. 황실 도서관까지 날아갔다 왔나.

의문을 느끼며 표지를 보자 [사본]이라는 글자가 작게 금박으로 쓰여 있었다. 황실 도서관에 원본이, 마탑 도서관에 사본이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책을 펼쳤다. 기록은 정말 ‘사생활’에 대한 것이었다. 어떤 음식에 빠져 전국에서 구해 오게 했다든가, 공무가 있던 날 정식 일정을 마치고 누구를 만났다든가, 그런 소소한 일상. 물론 아주 자세히 쓰인 건 아니었다. 정사(正史)보다 약간 깊이 들어간 기록일 뿐이다. 무슨 동물을 키웠다는 말도 있었다. 너구리에 토끼……. 지금이랑 비슷하군.

[호감도: 시우]

93%

시우는 ‘더 알고 싶은데…….’라고 생각합니다.

“……?”

아니, 더 알고 싶다고 생각하는 건 그렇다 치고, 읽은 건 난데 왜 시우의 호감도가 올라? 대체 그놈의 호감도가 뭐기에. 혀를 쯧쯧 차며 책을 마저 읽었다. 난데없이 오른 호감도 때문인지 기록 속에 서술된 장면이 묘하게 내 모습으로 연상되었다. 나는 겪은 적도 없는 일인데 말이다.

더욱 이상한 일은 그다음에 일어났다. 오른 건 시우의 호감도인데, 그 메시지를 본 순간 나는 참을 수 없게 아테올이 보고 싶어졌다. 역시 나는 무언가에 휘둘리고 있는 걸까.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충동을 이길 수 없었다. 그대로 옷도 제대로 입지 않고 뛰쳐나갔다. 탑주님, 하고 클로든이 당황해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으나 무시했다.

계단을 지나 미궁을 거쳐서 탑의 입구로. 입구에 다다르자, 이제야 멀어지고 있는 아테올의 마차가 보였다. 거기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는데 마차가 멈추더니 아테올이 문을 열고 뛰어내리듯 마차에서 내려와, 빠른 걸음으로 저벅저벅 내 쪽을 향해 왔다.

레사를 비롯하여 그의 수행원들의 얼굴을 보고 나는 내가 후드도 쓰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나, 미처 손을 올리기 전에 아테올이 내게 당도했다. 나는 후드를 쓰려던 걸 잊고 두 팔을 뻗어 아테올을 끌어안았다. 힐끗 상태창을 보았다. 99%. 거기에 고정되어 버린 것처럼 숫자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차라리 특별 호감도가 한 번 더 나타났으면 좋겠다. 무엇이든 눈에 확실히 보이는 지표가 필요했다. 이런, 뜻도 모를 야속함을 느끼지 않게. 아테올을 안은 팔에 힘을 주자 그도 팔을 둘러 내 등을 껴안으며 속삭였다.

“한 번은 말을 들었습니다. 두 번째는 제가 원하는 대로 하겠습니다.”

“……응.”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테올이 잠시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지금 허락하신 겁니까?”

“응. 네가 원하는 대로 해. ……네 마음대로 해.”

아테올은 헛웃음을 터뜨리더니 내 귀에 입 맞췄다.

“외람되지만 당신을 좀 가르쳐야겠습니다.”

“뭘 가르쳐?”

“함부로 이런 말을 하지 않도록 말입니다.”

그가 나를 안아 올리며 후드를 씌웠다. 위병까지 포함해 몇 사람이나 내 얼굴을 봤겠지. 흘끗 위병을 보았다. 일전, 아테올이 왔던 것을 보고하지 않은 사건을 계기로 탑의 인원이며 배치가 꽤 많이 바뀌었다. 입구에 서 있는 건 나도 얼굴을 아는 이로 입이 묵직하고 진중한 사람이었다. 아테올의 수행원들은 말할 필요도 없다. 내 얼굴에 대한 말이 퍼져 나갈 일은 없을 것이다.

“내가 이런 말 하는 게 싫어?”

“싫은 건 아니지만, 제 앞에서만 해주시면 좋겠군요.”

“네 앞에서밖에 안 해…….”

이런 말을 또 어디서 한단 말인가. 중얼거리듯이 대답하자 아테올은 웃음 섞인 한숨 비슷한 것을 내뱉고는 날 안고 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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