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5. 활자가 움직이는 모습으로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이 인간이 지금 무슨 말을 한 거지? 한 차례 귀를 거쳐 들어온 말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다가 도로 빠져나가는 걸 간신히 붙잡았다. 하지만 되새겨 생각해도 말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지금 뭐라고 했어?”
“똑같이 말해 드릴까요?”
“됐어.”
두 번 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내가 싫은 표정을 짓자 아테올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말했다.
“대답을 들을 것도 없겠군요. 못 믿으시는 모양입니다.”
너 같으면 믿겠냐, 소리가 목구멍까지 나왔다. 나는 표정을 더더욱 찡그리며 내 쪽으로 잔뜩 기울어져 있는 아테올을 밀어냈다.
“너는 항상 거짓말만 하잖아.”
“항상은 아닙니다.”
“내가 보기엔 항상이었어…….”
말하는데 내 말투가 약간 투정 부리는 것처럼 느껴져 입을 다물어버렸다. 투정이라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테올한테.
“늘 그런 건 아니었잖습니까.”
심지어 아테올이 나를 달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물론 늘 그렇진 않았지. 사람이 어떻게 매일 거짓말만 하면서 살겠는가. 하지만 중요한 순간에는 늘 거짓말을 했고, 그의 마음을 확실히 알 수 있었던 적도 없다. 호감도도 99%에서 절대 움직일 기미가 안 보이고. 뭐, 이건 시우의 호감도를 올려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으니 이해한다고…… 하나 그래도. 그렇게 생각했을 때 상태창이 깜빡였다.
[tip: 시스템이 지금까지 했던 말들을 기억하세요!!!!!]
뭔데…… 느낌표가 다섯 개나 붙었냐. 어지간히 다급했던 모양이다. 하긴 이 상태창은 나랑 아테올을 어떻게든 달라붙게 하려고 애써 왔으니까.
[이벤트 발생!]
아테올은 진심인 것 같습니다. 이야기를 들어주면 어떨까요?
어째 이런 말이 나와도 미심쩍다. 흐린 눈으로 상태창을 보다가 아테올에게 시선을 돌린 순간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 내내 날 쳐다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마음이 복잡하다. 사랑이니 청혼이니, 내가 아테올을 좋아함에도 불구하고 전부 헛된 뜬구름처럼 느껴졌다. 이벤트라는 이름에 조종당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안 믿을 거야.”
그러자 아테올의 눈이 약간 휘었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
분명 웃고 있는데 주위 온도는 뚝 떨어졌다. 이것도 재주였다. 살짝 오싹한 기운을 느끼며 몸을 움츠리는데 아테올이 말을 이었다.
“청혼도 안 받아주실 걸 알고 한 겁니다.”
“왜?”
이 ‘왜’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럴 거면 뭐 하러 했느냐’와, ‘왜 안 받아줄 거라고 생각했느냐’ 등등……. 아테올은 그것까지 깊게 묻진 않았다.
“당신은 뭐랄까.”
좀 멀어졌나 싶었던 그가 다시 불쑥 가까워졌다. 그러곤 커다란 손으로 내 얼굴을 짚더니 눈가를 천천히 매만졌다.
“늘 구경꾼 같은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그게 뭐야.”
“그런데 눈을 보면 그렇지 않아요.”
손가락 끝이 눈꼬리에 닿아 멈췄다. 순간 긴장해 눈꺼풀이 바르르 떨렸다. 아테올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눈가에 입술이 가볍게 닿았다 떨어졌다.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눈꺼풀과 속눈썹에 거의 닿아 있는 입술에서, 목소리가 이어진다.
“눈은 ‘저 안에 녹아들고 싶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
“잡아끌고 싶어집니다.”
말과 동시에 그의 손이 허리를 휘감았다. 뜨거운 체온과 심장박동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의 심장은 나보다 느리게 뛰었다.
내가 그런 눈을 하고 있었나?
……이 세계에 녹아들고 싶다고.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유치한 소원을 들킨 어린애가 된 기분이었다. 아테올의 손이 내 옷 속을 파고들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그의 손목을 붙잡고 밀어냈다. 아테올은 순순히 손을 떼고 나를 바라보았다.
“하기 싫어.”
“흠.”
“안 한다고 하면 말 들을 거야?”
그러자 아테올이 피식 웃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저를 대체 어떻게 보고 계신 건지 의문이군요.”
“어떻게 보긴! 네가 지금까지 나한테 한 짓을 생각해 봐!”
“뭐, 그야……. 제 기준에서는 적당한 애정 표현이었습니다만.”
“어디가 적당해?!”
그간 아테올이 잠자리에서 나에게 했던 짓을 생각하자면, 으, 음, 생각해 보면…… 그렇게까지 강압적이었던 적은 없는 것 같기도 하고. 괜히 사람을 이상하게 취급했나 싶어 얼굴이 붉어졌으나 아테올은 그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물러났다.
“오늘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가겠다고?”
“시종장에게 당신의 상태가 그리 좋지 않으니 자주 살피라고 전하고 가지요.”
나는 멀쩡했다. 그냥 생각이 좀 복잡할 뿐. 생각이 복잡하면 그게 몸으로 나타나긴 하지만. 그리고 아테올은 정말로 몸을 일으켜 옷을 정리하더니 내게 깍듯하게 인사하고는 나가버렸다.
[이벤트 실패……]
아테올을 믿을 수 없나요?
……내가 아테올을 못 믿는 것의 절반은 이놈의 상태창 탓도 있었다. 이리저리 흔들리지 말고 상태창만 믿고 가자고 결정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당연히 이놈이 하는 짓이 의심스럽지. 뭘 위해 나를 아테올에게 붙이려 하는지 같은 것 말이다. 왜냐하면 나는 주인공이 아니니까!
녹아들고 싶다는 눈.
기분이 축 처졌다. 아테올은 정확히 봤다. 나는, 녹아들고 싶었다.
아테올의 세계에.
***
아테올은 긴 복도를 저벅저벅 걸었다. 발끝을 대면 탑의 가장 아래층으로 연결되는 기나긴 계단이 보였다. 계단. 정말로 그때 했던 말이 적절했다. 수천 개의 계단을 올라와 한 칸만 올라가면 목적지인데 어떻게 해도 그 한 칸을 올라가지 못하는 기분이라고.
유리를 볼 때면 그랬다. 그런 영문을 모를 답답함이 항상 목에 걸려 참을 수 없이 갑갑했다. 이 한 계단만 오르면 평생에 없을 아름다운 풍경이, 또는 인간이 얻지 못할 막대한 금은보화가, 세상에 다시는 존재하지 않을 귀한 물건이 있으리라는 걸 확신하는데, 그걸 오를 수가 없다. 뭔가가 부족했다.
‘나쁘지 않은데.’라는 생각이 ‘제법 귀여운데.’로 바뀌고, 거기서 점점 더 발전해 갔다. 마음이란 원래 한번 인식하면 차곡차곡 부지런히도 자라나므로 연애 감정으로 흐르는 것도 자연스러웠다. 다만 묘한 게 있었다.
유리를 상대로 꾸는 수없이 많은 꿈.
그 꿈은 마치 현실 같았다. 생생한 꿈, 정도가 아니었다. 정말 눈을 감으면 다른 현실을 보고 다시 지금의 현실로 돌아오는 것 같을 정도로 선명했다. 그 꿈의 내용은…… 유리와의 일상이다.
그러나 지금의 일상과는 사뭇 달랐다. 자신과 유리는 훨씬 친밀하고 달콤했다. 유리는 지금보다 조금 여유로웠고, 자신에게 물렀으며, 때로 어리광을 부리기까지 했다. 어리광을 부리는 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꿈속에서 두 사람은 마치 오래된 연인 같았다.
‘기억을 잃었다고 했나.’
그 말은 사실인 듯했다. 그는 정말 오래된 일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본인 말대로 책에서 읽은 듯 단편적인 ‘지식’만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러면 그 꿈은 어쩌면 유리의 옛 기억인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다른, 자신과 닮은 누군가와 함께했던 기억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심사가 뒤틀렸다.
하지만 기억을 잃은 게 아니라, 애초에 그런 기억 자체가 없다고도 했다. 자신은 진짜 유리가 아니라고. 유리는 시우가 ‘진짜 탑주’이며, 언젠가 그가 힘을 되찾아 자신을 없애러 올 거라는 공포에 빠져 있었다.
이 또한 기억을 잃었다는 말만큼이나 거짓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왜? 누가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애초에, 탑주의 마법을 고스란히 빼앗을 수 있을 정도라면 그 사람이 새로운 탑주가 되어 마땅한 게 아닐까? 힘을 빼앗기는 탑주가 이 나라에, 대륙에 필요한가. 다시 찾는다 해도 한 번 빼앗긴 이상 두 번은 없다고 장담할 수 있는가.
또한 그걸 핑계로 자꾸 도망가려 드는 유리를 보면 초조하고 화가 나 견딜 수 없었다. 그가 도망칠 때마다 정말 필사적으로 찾았다. 자신이 무슨 짓까지 했는지 알면 유리는 기겁을 할 것이다. 그 정도로 아테올은 유리를 포기할 수,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유리만 생각하면 조바심이 나고 충동적이 된다.
원래 자신은 충동적인 기질이 있었다. 그래서 계속 몸을 숙이고 있어야 할 때에도 한 번씩 사고를 치곤 했다. 거기서 선을 넘지 않은 것만으로도 대단한 인내심이라고 스스로를 칭찬하면서. 그 충동의 선을, 유리를 상대로는 지킬 수가 없다.
만약 자신이 꾸는 꿈이 정말 유리의 기억이라면 어떨까. 꿈속의 그 달콤하고 황홀한 시간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과 보낸 것이라면? 하하. 헛웃음을 터뜨리며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주위가 일렁거리나 싶더니 탑 입구의 마지막 계단을 밟고 있었다.
위병과 시종들이 아테올을 보고 깊게 고개를 숙였다. 아테올은 위를 올려다보았다. 까마득한 최상층에서 여기까지 단숨에 내려온 순간 마치 내쫓긴 듯한 기분이 들었다. 조금 전 본 유리의 태도와 자신의 머릿속 때문일 것이다.
아테올은 망토를 펄럭이며 탑 입구에서 다시 걸어 나왔다. 순식간에 미궁을 지나 마차가 세워져 있는 곳에 도착했다. 다시 한번 고개를 들었다. 멀리 구름 사이에 가려질 만큼 높은 곳에 유리의 방이 있었다. 지금은 이렇게 아득한데, 그날은 이상하게 가깝게 느껴졌다. 유리가 저곳에서 자신에게 뛰어내린 날. 그때 얼마나…….
“폐하.”
당시를 떠올리는데 레사가 그를 불렀다. 시선을 돌리자 그녀는 주군의 싸늘한 기류를 바로 알아채고는 한 발 물러나며 말했다.
“시우가 황궁 도서관에 잡혀 있다고 합니다.”
“무슨 일로?”
“금서(禁書)를 반출하려 한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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