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5. 활자가 움직이는 모습으로
“반지도 안 줬으면서 무슨 청혼이야?”
그 말이 나간 건 정말 엄청난 순발력이었다. 아테올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사실 준비해 뒀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반지까지 드리면 당신이 얼마나 기겁할지 걱정이 되어서 안 꺼냈을 뿐이지.”
“…….”
부정할 수 없었다. 청혼하는 듯한 몸짓까지는 어느 정도 퍼포먼스로 보인다. 하지만 반지까지 준다? 온 나라가 난리가 날 것이었다. 내 반응에 따라서 좋은 쪽으로, 혹은 나쁜 쪽으로. 유등제 때 한 행동까지는 아테올의 단순한 애정 표현과 구애로(즉, ‘탑주의 마음을 돌리려 황제가 분투하고 있다’는 소문의 뒷받침으로) 보일 수 있지만, 반지는 다르다. 그건 그야말로 모든 소문을 기정사실화하는…… 잠깐만, 반지를 준비해 뒀다고?
“거짓말이지?”
“사실입니다.”
“그럼 보여줘 봐.”
“제 침실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두어서요. 나중에 보여드리지요.”
나는 아테올을 빤히 쳐다보았다. 거짓말인지 진심인지 알 수 없었다.
“못 믿겠으니까 거절할래.”
“그건 반지를 보여드리면 받아주신다는 뜻이실지?”
“……그건 아니지만.”
“뭐, 좋습니다. 무거운 돌은 언젠가 바다 바닥에 닿는다고 하니까요.”
여기식 속담이었다. 무게를 가진 돌이 계속 버티면 심해 바닥에라도 안착한다는 의미, 즉 노력과 끈기를 강조하는 말이다. 구애하며 기다리는 남녀가 상대에게 자주 하는 얘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소리를 하기엔, 아테올은 사흘이나 연락 두절이 되지 않았던가? 이건 아주 치명적이다.
차마 클로든이나 다른 사람에게 아테올이 바쁜지 물어볼 수는 없었기에 그가 정말 바빴던 건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모른다. ‘바빴어?’라고 직접 묻자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소설에서 이런 장면이 나오면 ‘대화 좀 해라! 대화를 하라고!’ 하고 가슴을 퍽퍽 쳤는데, 사실 그 대화를 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또 대화로 해결 안 되는 일이 세상에는 더 많다.
“연락하지 않은 건 죄송합니다. 정말 바빴습니다.”
“그랬겠지…….”
아, 비꼬는 걸로 들렸으려나. 정말인데. 아테올은 황제였다. 기분이 가라앉는다고 옆구리에 너구리 두 마리 끼고 뒹굴뒹굴할 수 있는 나와 달리 할 일이 많다. 지난 사흘 동안 도저히, 잠깐 편지도 보낼 틈 없이 바쁜 시간이 이어졌는지도 몰랐다.
근데, 그래도 심부름꾼 한 번은 보낼 수 있는 거 아닌가?
나는 밀고 당기고 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청혼은 아테올이 했는데, 지난 사흘 동안 마치 내가 그에게 무릎을 꿇었던 것처럼 마음이 심란했다. 매일매일 창가며 문가를 바라보다가 시간이 다 갔다. 나를 애태우려는 심산이었다면 아주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왜 한 거야?”
한참이 지난 끝에 내 입에서 나온 말은 그랬다.
“무엇을요. 설마 청혼이요?”
그래, 설마 청혼. 계속 누워서 이야기하는 것도 이상해 상체를 일으켜서 높은 쿠션에 기댔다. 아테올은 날 보곤 의자를 끌고 와서 앉았다.
“청혼에 왜가 어디 있겠습니까.”
“청혼에는 원래 왜가 많지.”
“음……. 그것도 맞는 말씀이군요.”
청혼은 수많은 ‘왜’로 이루어지지 않는가. 감정적으로든, 현실적으로든. 아테올이 재미있다는 듯 다리를 꼬더니 날 바라보았다.
“하지만 제 이유는 단순합니다. 당신과 결혼하고 싶습니다.”
“…….”
“당신은요?”
나, 나는……. 난 아테올의 시선을 피했다. 결혼? 감정만 따지자면, 아직 결혼까지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흘끗 상태창을 확인했다. 체력 12, 마력 999+, 아테올의 호감도 99%. 채워지지 않는 1%는 뭘까. 그리고 호감도의 진짜 이름, 실체는 무엇일까.
이래서 사람의 마음을 읽는 게 저주받은 능력인 모양이다. 아테올이 좋은데, 아테올의 눈빛이나 행동만 봐서는 완전하게 믿을 수 없다. ‘호감도’가 ‘호감’이 아니라고 하지만 그 이름 때문에 아무래도 그 비슷한 감정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으니까. 99%는 100%가 아니지 않은가.
“난…… 모르겠어.”
“모르겠다?”
“너는 어떤데? 왜 나랑 결혼이 하고 싶은 건데.”
“글쎄요, 결혼해서 아이가 셋쯤 생기면 당신이 도망보다는 여기서 살아남는 쪽에 더 초점을 맞추지 않을까 싶어서요.”
선녀와 나무꾼이냐? 난 그 동화 싫어해. ……여기서 아테올이 ‘당신이 너무 좋아서요.’ 같은 감성적인 말을 했다면 마음이 좀 흔들렸을까.
“그러니까, 왜 그렇게 나를 잡아두고 싶어 하는 거냐고.”
“답을 그렇게 알고 싶으시다면 두 가지로 설명하지요.”
그래, 알고 싶다. 알고 싶어서 죽겠다. 눈을 흘기자 아테올은 한쪽 눈을 가볍게 찡긋하는 것으로 받았다.
“먼저 현실적인 부분은, 당신이 탑주인 쪽이 제게 절대적으로 유리합니다. 이미 황제 자리에 올랐다고 해도요. 이건 당신도 아시겠지요?”
“……알아.”
시우는 이미 로아네스 대공에게 큰 호감을 가지고 있고, 그녀의 편일 테니까. 하지만 아테올이라면 그를 잘 구슬려 수중에 넣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특히 대공과 오래 떨어져 있는 지금이라면 기회가 아닌가.
“두 번째로 감정적인 부분입니다. 이쪽이 중요하죠.”
“감정?”
“네, 제 감정 말입니다. 저는 당신을 절대 놓고 싶지 않습니다.”
“그게 뭐야.”
“말 그대로입니다. 벌써 몇 번이나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당신을 놓치면, 뭐랄까…….”
아테올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나를 보았다.
“죽는 게 낫다 싶을 만큼 후회할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대체…… 왜?”
이번엔 정말 이해가 안 가서 물었다. 우리가 그 정도로 절절하게 감정을 나누었던가? 물론 사…… 좋아하는 마음이야 단 몇 시간 만에라도 생길 수 있다지만, 죽음 운운할 정도로 절절하게?
“저도 모르겠습니다.”
“…….”
“모르니 더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지요.”
아테올이 느릿하게 손을 뻗어 내 손을 잡고, 손등에 입 맞췄다. 가슴이 쿵 뛰었다.
“그런 당신은 왜 그렇게까지 도망치려고 하는 겁니까? 진짜고 가짜고 하는 건 제가 해결해 드리겠다고 그렇게 말하는데도.”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야. 시우는 마법을 되찾아 갈 수단이 있어. 나는 그 방법이나 과정조차 모르고.”
“그건 쉽죠. 무슨 방법이든 쓰지 못하게 하면 되는 겁니다.”
“탑주는 함부로 해코지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야.”
“탑주는 당신입니다.”
“…….”
내가 빤히 쳐다보자 아테올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말을 바꾸었다.
“어쨌든 그는 지금 평범한 인간이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그를 죽여서 자리를 차지하라니,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고!”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아무리 책 속의 인물이라도, 시우를 죽여 그의 자리를 차지한다는 건 엄청난 거부감이 들었다. 그리고 시우도 시우였으나, 가짜 탑주가 있다.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모를 영혼. 그가 돌아올 수도 있는 일 아닌가?
“유리 님. 저는 원래 반란을 일으킬 생각이었습니다. 수많은 방법을 생각했고, 그중에는 형제와 부모를 몰살하고 피 묻은 황좌에 앉는 것도 있었지요.”
“…….”
“권력이란 원래 그렇게 차지하는 겁니다.”
나는 아연해져 아테올을 바라보았다. 그는 나와 사고방식이 너무 달랐다. 하지만 그런 그를 도덕적이지 못하다느니, 잔인하다느니 말할 수는 없다. 이 책 속 세계가 돌아가는 구조가 그러하니까. 강한 사람이 피를 보면서라도 원하는 걸 가진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계였다. 만약 아테올이 정말 그렇게 제위에 올랐다면 패륜이라느니 악마라느니 하는 꼬리표가 따라다니긴 했겠지만, 모두가 두려워하는 강한 황제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아테올이고. 나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시우를 죽이고 진짜 탑주가 된다는 선택지는 나에게 없다. 차라리…….
“그럼 그냥 숨겨줘.”
“……네?”
“시우가 진짜 탑주로 돌아오게 두고, 나는 숨겨줘. 네가 원하는 곳에 숨기면 되잖아. 생각해 보니 그게 더 안전할 것 같아.”
“…….”
아테올이 묘한 얼굴을 했다. 눈동자가 살짝 흔들린 것도 같았다. 하지만 곧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걸 떠나, 먼저 이성적인 이유를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당신이 탑주인 쪽이 제게 더 도움이 됩니다.”
“나랑 결혼하면 황권이 더 강해지니까? 그럼 시우랑 결혼해.”
“하하.”
“왜 웃어?”
“두세 마디로 제가 나름대로 한 설명을 전부 뭉개놓으시는군요.”
그는 다시 헛웃음을 치고 자세를 한번 고쳐 앉더니, 아예 침대로 넘어와 걸터앉았다.
“다시 말씀드리지요. 시우는 로아네스 대공의 수족입니다. 멍청한 척하지만 본성을 알 수 없고요. 지식과 기억이 없는 건 사실이라 해도, 이리저리 잔머리를 굴리는 게 별로 마음에 안 듭니다. 대공을 썩 좋아하긴 해도 대공이 그를 아끼는 만큼은 아닌 듯하나, 그렇다고 제게 넘어오리라는 법도 없죠.”
“난 시우가 대공을 굉장히 좋아한다고 생각해……. 그리고 대공과 함께하면 힘과 권력을 되찾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릴 거야. 하지만 네가 손을 내밀어 준다면 쉬워지잖아. 시우는 권력을 좋아해. 빨리 되찾을 수 있다고 하면 마음이 기울지도 몰라.”
“그렇게까지 시우를 생각해 주시다니, 선량하십니다.”
“선량한 게 아니라, 난 그냥 이 상황이 무서운 거라고! 시우를 건드리고 싶지 않아. 착해서가 아니라 무서워서!”
비아냥거리는 듯한 말에 마음이 울컥해서 목소리가 높아졌다. 사실이었다. 내가 시우를 계속 보호하고 그에게 자리를 돌려주려 하는 건 내가 착해서도, 양심적이어서도 아니다. 그저 세계관을 망치는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아서였다.
책 속이라도 이곳은 하나의 세계였다. 그걸 나라는 이방인이 멋대로 고쳐 쓰고, 내 입맛대로 바꾸고, 나를 위해 원래 있던 인물을 죽이고……. 그러는 게 싫은 걸 넘어 무서웠다. 이 세계에 흙발로 들어온 건 나인데 마치 내가 침범을 당한 듯한 기분까지 들었다.
“……좋습니다. 그럼 두 번째.”
“…….”
“당신을 붙잡아두고 싶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죄인처럼 숨겨두는 게 아니라, 제 곁에.”
“왜 그러고 싶은 건데.”
아테올이 다시 내 손등을 잡고 손가락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손끝에 살며시 입술을 댔다.
“사랑한다고 말씀드리면 믿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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