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5. 활자가 움직이는 모습으로
그야…… 나 때문이었다. 어쩌면 나를 놓아주기 싫은 아테올 자신 때문이기도 하고. 말을 참 빙빙 돌려 한다고 생각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 후 도착할 때까지 서로 아무 말이 없었다.
아테올은, 이제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황자 시절처럼 공손하게 나를 수행했다. 사실 우리 사이를 더욱 강조하려는 행동으로 보이지 않는 건 아니었다. 황제가 내게 다정하고 정중하게 굴수록 사이가 좋아 보일 테니까.
딱히 그걸 거절할 이유까지는 없다. 우리는 같이 발코니에 올라가서 구름처럼 모인 사람들에게 인사를 해주고는 자리에 앉았다. 하늘 서쪽이 타는 듯이 붉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유등을 날릴 준비로 분주해졌다. 태양의 신이 하루의 짐을 완전히 내려놓고 달이 떠오르는 순간에 복을 비는 유등은 일제히 하늘로 떠오른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 속에서 도시의 윤곽 너머로 해가 넘어갔다. 광장에 삼삼오오 모여 있던 사람들은 저마다 종이 안의 등잔에 불을 붙이고 손을 멀리 뻗어 유등을 하늘을 향해 놓았다. 작은 유등들이 바람을 타고 둥실둥실 떠올랐다. 아테올이 흘끗 나를 보았고, 나는 한쪽 팔을 가볍게 들었다.
나비, 꽃, 반딧불이, 빛무리…… 떠오르는 것들은 전부 만들어냈다. 사람들 사이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작은 유등들 주변으로 내가 만든 색색의 빛 장식이 어른거리며 매달렸다. 유등은 날아가게 하는 용도이기 때문에, 화려하게 장식하려 해도 한계가 있다. 하지만 빛으로 된 장식이라면 얼마든지 매달려도 상관없었다.
시선이 저절로 나를 향해 쏠렸다. 드물게도 나를 보는 시선에 두려움보다 동경이 커진 순간이었다. 아테올의 생각대로, 이 쇼 덕분에 소문은 더욱 기세가 죽을 것 같았다.
나를 바라보고 있던 아테올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손짓했다. 뒤쪽에서 시종이 유등을 가지고 왔다. 기름이 떨어지지 않도록 잘 봉인한 심지에 불씨를 가져가자 도톰한 종이 안쪽이 노란색으로 밝아졌다. 아테올이 다시 나를 보았다.
“제 등도 꾸며주시겠습니까?”
“…….”
나는 말없이 손끝을 까딱했다. 수십 마리의 빛으로 된 나비가 하늘하늘 날아가 유등을 감쌌다. 아테올은 가만히 미소를 짓더니 하늘로 유등을 띄웠다. 빛무리에 화려하게 감싸인 유등은 아직 완전히 어두워지지 않은 하늘로 둥실둥실 날아가 다른 빛들 사이에 섞였다.
가만히 등을 보고 있다가 시선을 내린 순간, 아테올과 눈이 마주쳤다. 깜짝 놀라서 멈칫했다. 언제부터 나를 보고 있었던 걸까. 방금? 아니면 등을 날리고서 바로?
눈이 마주친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데 그가 움직였다. 반 발자국 정도. 나는 또 혼자 화들짝 놀라 두 걸음쯤 물러났다. 그러자 아테올이 고개를 갸웃하며 웃더니 성큼, 한 발자국을 더 다가왔다. 애석하게도 그 한 걸음은 내가 물러난 두 걸음보다 컸다. 더 물러나려 하는데, 그 전에 그가 손을 뻗어 내 손을 꽉 움켜쥐었다.
“더 물러나지 마십시오. 사람들이 모두 쳐다보고 있습니다.”
“그럼 네가 오지 마.”
“그건 어렵겠는데요.”
“뭐……!”
아테올은 그대로 내 손을 두 손으로 끌어당겨 입 맞췄다. 바로 빼내려 했으나 폭신하게 닿은 입술에 한 번 놀라고, 똑바로 나를 쳐다보는 눈동자에 또다시 놀라서,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되었다.
“저는 앞으로도 당신을 놓아줄 생각이 없습니다.”
“…….”
“그러니 포기하십시오, 탑주님.”
그는 그대로 입술을 꾹 눌렀다가 떼고는,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다시 손등에 키스했다.
마치 청혼하는 것처럼.
***
너구리 두 마리가 방 안을 종횡무진 돌아다녔다. 원래 너구리라는 동물이 저렇게 활동량이 많던가……. 나와 비교하면 거의 열 배는 되지 싶었다. 클로든이 처음 데리고 들어왔을 때는 좀 눈치를 보는 듯하더니 10분도 지나지 않아 자기들 세상이었다. 나는 시끄럽게 뛰어다니는 너구리들을 마치 대리 만족이라도 하듯이 바라보았다.
유등제가 끝나고 사흘이 지났다. 그동안 아테올은 한 번도 탑을 찾아오지 않았다. 이럴 거면 탑에 드나들 수 있는 권한은 왜 달라고 한 거지? 도로 뺏어 올까. 심란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해보다가 급기야 레이와 로이를 데리고 올라오게 한 차였다.
털 덩어리 두 개가 자기들끼리 뭉쳤다 떨어졌다 뛰어다니며 노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좀 편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이게 애니멀 테라피인 모양이다. 다행히 너구리 두 마리는 장소에 낯가리는 것도 없이 금세 적응하고 잘 놀았다. 아니었으면 도로 데리고 온실로 갈 뻔했는데.
아테올이 오지 않은 지 사흘째.
머릿속에는 계속 내 앞에 무릎을 꿇은 아테올의 모습만 둥둥 떠다녔다. 선 채로 손등에 한 번, 거기서 고개를 숙이고 무릎 꿇은 채 또 한 번 키스하는 건 이곳의 전형적인 청혼 방식이었다. 반지는 없었지만. 신기한 게 이곳에서도 프러포즈할 때는 반지를 준다. 결혼반지라는 개념도 있었다. 아무래도 몸에서 떨어뜨리지 않고 가장 눈에 잘 띄는 장신구이다 보니 비슷하게 쓰이는 듯했다.
어쨌든 나는 심란했다. 유등제 쇼부터 황제의 청혼 모습까지 실시간으로 본 사람들은 환호하고 노래하고 난리가 났었지만, 나는 아테올이 일어나 나를 내 자리에 다시 앉힐 때까지 그냥 얼이 빠져 있었다. 전혀 생각도 않던 자리에서, 불과 며칠 전 마음을 자각한 상대에게 청혼 비슷한 걸(반지를 안 받았으니까 완전한 청혼은 아니다) 받으면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그러고 나서 상대가 사흘 동안 코빼기도 안 비친다면 더욱.
드러누운 채 한숨을 내쉰 순간, 방 안을 신나게 뛰어다니던 너구리들이 잠시 멈칫하더니 내 쪽으로 달려왔다. 두툼한 꼬리가 퍼덕대는 게 제법 웃겼다.
대단한 점프력으로 침대에 올라온 두 마리는 꼬리와 몸통을 뒤뚱거리며 내 양쪽 옆구리 사이로 하나씩 끼어들었다. 갑자기 뜨끈한 온기가 느껴지는 게 썩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꾸무럭거리면서 자리를 잡은 두 너구리가 각자 할 일을 끝냈다는 듯 한숨을 폭폭 내쉬더니 내 품에서 푹 퍼졌다.
그래, 어린이랑 동물은 노는 게 할 일이지. 어린 동물은 말할 것도 없고. 나는 동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털이 달라붙는 것도 질색이지만, 손바닥에 만져지는 감촉이 너무 부드러워 참아주기로 했다. 너구리들은 몸통만큼 큰 꼬리를 천천히 움직였다.
지난 사흘 동안 거의 잠을 못 잤다. 그나마도 내내 꿈을 꾸느라 설쳤더니 피곤한데 난로 두 개가 옆구리에 들어오니까 몸이 축 늘어지면서 머리도 가물가물해졌다. 음, 안 돼……. 잘 것 같은데……. 졸리다고 생각한 순간 슬그머니 밀려드는 두려움에 너구리들을 더욱 부지런히 쓰다듬었다. 기분이 좀 나아지는 듯했다.
그렇게 꾸벅꾸벅 졸다가 깜빡 잠들었나. 머리가 한순간 붕 뜬다고 느낀 직후, 묘한 느낌을 받았다. 꼭 누가 쳐다보고 있는 것 같은. 뭐지. 실눈을 떴던 나는 기겁해서 빽 소리를 질렀다. 아테올이 침대 옆에 서서 몸을 기울인 채 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뭐 하는 짓이야!”
“주무시는 것 같기에 깨우지 않으려고.”
“깨웠잖아, 지금!”
“예민하시군요.”
“내가 예민한 게 아니야!”
열 사람을 놓고 물어봐라. 남산만 한……, 남산이라고 하면 여기 사람들은 모르겠지. 아무튼 어깨 떡 벌어진 거대한 남자가 눈을 시뻘겋게 빛내며(정말 뻘겋게) 위에서 들여다보고 있으면 놀라서 깰지 안 깰지. 너구리들도 어느새 일어나 꼬리를 세우면서 아테올을 째려보고 있었다.
“레이, 로이라고 하셨던가요?”
아테올은 레이와 로이를 정확히 짚어 가리키며 물었다. 전에 딱 한 번 본 게 전부인데 어떻게 바로 구분한 건지 모르겠다. 설마 해코지야 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괜히 두 마리를 품에 끌어안았다. 아테올이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너구리한테 질투하게 하지 마십시오.”
“무슨 헛소리야.”
“헛소리일까요?”
그는 시선을 내려 지그시 너구리 두 마리를 보았다. 레이와 로이가 움찔하더니 바들바들 떨면서 나한테 달라붙었다. 용맹하게 올렸던 꼬리는 어느새 축 처져서 몸에 말린 채였다. 헛소리가 아닐지도. 두 마리를 더 꼭 끌어안으며 올려다보자, 아테올이 나를 마주 보다가 내 머리 옆에 손을 짚더니 키스했다.
무심코 너구리들의 눈을 손으로 가렸다. 그걸 본 아테올의 입가가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내가 우스운 모양이었다.
“며칠 바빠서 오지 못했습니다.”
그가 입술을 반쯤 붙인 채로 가볍게 말했다. 다시 입술이 맞물리면서 속으로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라고 생각했다가 마음을 바꾸었다. 그까짓 게 뭐라고. 아테올은 그냥 사람들이 보고 있으니까 한 행동일 수도 있는데. 크라켄을 처치했을 때처럼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사흘 동안 머리를 처박고 보낸 시간이 괜히 민망하고 부끄러워져서 아테올의 혀를 콕 깨물었다.
아테올은 잠시 움찔했지만, 전혀 타격을 입지 않고 계속 멋대로 내 입 안을 휘저었다. 한참 후 입술이 떨어졌다. 내가 숨을 내쉬며 손의 힘을 빼자 너구리 두 마리는 후다닥 뛰쳐나가 방을 가로질러선 나란히 문을 박박 긁기 시작했다. 그러자 문이 아주 조금 열렸고, 그 좁은 틈으로 두 마리가 물주머니처럼 유연하게 빠져나갔다. 로이에 이어 레이의 꼬리 끝까지 보이지 않게 되자 문이 닫혔다.
발소리가 멀어지는 걸 들으며 나는 입술을 문질러 닦았다. 벌써 부어서 아릿했다.
어느새 일어나 닫힌 문을 빤히 쳐다보던 아테올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쳐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아테올은 천천히 머리를 모로 기울였다.
“시간은 충분히 드렸다고 생각하여…….”
“…….”
“대답을 듣고 싶은데요, 이제.”
어?
“청혼에 대한 대답 말입니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