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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의 원수를 공략합니다-68화 (68/93)

68화

5. 활자가 움직이는 모습으로

유등제 전야에도 작은 축제가 있었다. 내일 하늘로 날려 보낼 등이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한 것이라면, 오늘은 죽거나 멀리 떠난 사람을 위하여 강물에 작은 종이배를 띄운다. 물은 바다까지 흘러가니, 먼 곳에 닿아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음이 전해지기를 바란다는 의미였다. 죽은 사람에게는 잘 지내느냐고. 떠나가 돌아오지 않는 사람에게는 어서 돌아오라고.

아테올과 함께 온 언덕에서는 사람들이 한창 배를 띄우고 있는 강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연약하게 타는 작은 촛불을 싣고, 종이배가 강물의 흐름을 따라 느릿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문득 아테올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묘했다. 여느 때처럼 감흥이 없거나, 아름다운 것을 봤을 때 만족하는 눈이 아니었다. 붉은 눈동자에 담긴 주홍색 불빛이 일렁거렸다. 나는 조심스레 입을 뗐다.

“……너도.”

아테올이 내게로 눈을 돌렸다.

“돌아왔으면 하는 사람이 있어?”

“제게 말입니까?”

고개를 끄덕였다. 왜 이런 게 궁금해졌는지 모르겠다. 그저 종이배를 바라보는 시선이 너무…… 자신도 배를 띄우고 싶다는, 그런 눈이어서.

왜 그런 눈을 하는 걸까. 아니, 나는 왜 그가 그런 눈을 했다고 생각한 걸까.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한참 침묵하던 아테올은 그렇게 말을 시작했다.

“헤어진 사람이 없는데 누군가 그리운 건 왜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또 왜인지 퉁명스럽게 나간 대답에 아테올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뜻을 알 수 없는 웃음이었다. 사납게 군 게 미안해져서 공연히 덧붙였다.

“사람은 원래 다 이유 없이 외로운 거야. 있지도 않은 사람이 보고 싶은 거고.”

“그렇습니까?”

아테올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재차 물었다.

“당신도 그런가요?”

“난…….”

그야 그렇지. 사람은 원래 다 그런 것 아닌가. 내가 가족 없이 자라서 이런 생각을 하는지는 몰라도, 사람이라면 누구나 존재하지 않는 누군가를 항상 그리워하고 외로워하지 않을까. 망설이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공기가 일렁거렸다.

멀리서 이름 모를 거리의 가수가 노래하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그리고 선선한 바람, 강에 반사된 등불의 오렌지색 그림자, 옅은 습기로 느껴지는 물결의 흐름……. 가만히 나를 바라보는 아테올의 눈.

뺨이 달아올랐다.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깨닫고 마는 순간이 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몸을 돌렸다. 후드를 붙잡으며 언덕을 구르듯 내려가는 나를 아테올은 잡지 않았다. 그대로 도망치듯이, 아니, 도망쳐 탑으로 돌아온 나는 침대에 파묻혔다.

주홍빛 빛무리 속에 서 있던 아테올의 모습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가 내뱉는 말의 음절 하나하나까지 귀를 파고들었다. 코에는 그가 애용하는 장미 향수의 냄새가 떠돌았고 피부에는 그와 함께 있는 공간의 공기가 스며 있었다. 심장이 온몸을 감싼 것처럼 거세게 뛰었다.

나는 아테올을, 아테올이…….

“…….”

좋았다.

머릿속에 구체적으로 떠오른 그 한 단어에 온몸이 떨리는 듯했다.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러지 않으면 입술의 작은 틈으로 내 이 마음이 흘러나가 버릴 것 같아서였다. 감정이라는 것을 자각하는 순간은 생각보다 더 직접적이고 극적이고 충만했다. 나는 그를 좋아해, 아테올을 좋아해, 라는 말이 꿀처럼 머릿속에서 녹아 온몸에 퍼졌다.

그가 나를 상대로 장난스럽고 의뭉스러운 태도를 보일 때마다 기분이 상했다. 미처 내 마음을 알지 못했던 순간에도 화가 났던 모양이다. 놀리지 말라고, 기대하게 하지 말라고.

상태창은 ‘호감도’가 정말 ‘호감도’는 아니라고 말했다. 그럼 아테올의 마음은 무엇일까.

그러다 나는 퍼뜩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쿵쿵거리는 심장을 불현듯 어떤 현실이 꾸욱 짓눌렀다. 이걸 ‘현실’이라고 하기에는 역설적이지만, 여기는 책 속의 세계였다. 아테올의 호감도…… 아니, 감정은, 그리고 나의 감정은 진짜일까?

갑자기 눈앞에 안개가 낀 것처럼 모든 게 불분명해졌다. 나는 빙의했다. 빙의해서 모르는 책의 내용을 한 자락 이끌어 가고 있다. 이 책의 내용 속에서 내 행동은 어떤 의미가 있지? 책 바깥에서 들어왔다고 해서 나는 ‘캐릭터’가 아닌 건가? 이미 활자 속으로 들어온 이상 나도 마찬가지인 게 아닐까.

아테올에게 가끔 이상한 말을 하게 되는 때가 있다. 마치 내 의지가 아닌 것처럼 입에서 스르르 어떤 말들이 흘러나오는. 아예 생각하지 않았던 말인가 하면, 또 그렇진 않다. 머릿속 어딘가에서 조용히 부유하고 있던 것들이다.

이건 어쩌면 시스템이 나에게 말을 하도록 입력하는 게 아닐까. 그러니까, 활자가. 나도 결국 소설 속에 빙의된 한 인물이고, 작가의 뜻대로 움직여야 한다. 시우가 말하지 않았던가? 작가는 아무리 강한 인물이라도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나 역시 지금 모든 게 내 의지인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을지도 몰랐다.

혼란스러워졌다. 책 속은 무엇이고 책 바깥은 무엇일까. 내 몸의 원래 주인이던 가짜 탑주는 정말 어디로 사라진 걸까. 어쩌면 빙의되었다는 건 설정값에 불과하고, 나는 정말로 기억을 잃어버린 가짜 탑주, 이름도 모르는 그인 건 아닐까.

그런 내가 아테올을, 좋아한다면, 좋아한다는 건…….

그건 가짜 탑주의 감정일까, 아니면 내 감정일까. 애초에 나는…… 누구지.

거기까지 생각하니 막막하고 공허한 기분이 들었다. 어두운 미궁에 혼자 버려져 있는 기분이었다. 외롭고 아득하고 지루하다. 이런 기분을 또 언젠가 느껴본 것 같은데. 깊게 생각하기 전, 머릿속이 흐리멍덩해졌다. 금세 밀려온 졸음이 모래처럼 기시감을 덮었다.

잠이 오자 다시 두려움이 엄습했다. 이대로 잠들었다가 또 죽음을 맞이하는 건 아닐까, 이번에야말로 진짜로. 깨어나지 못하는 죽음. 나는 코를 훌쩍거리며 약을 찾았다.

수면제와 안정제를 물도 없이 씹었다. 쓴맛이 머리를 찌를 듯 올라와 결국 물을 마셔야 했지만. 얼굴이 다 젖은 채였고 눈은 아릿아릿하게 아팠다. 베개도 축축했다.

언제부터, 왜 울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입 안을 계속 떠도는 쓴맛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현기증과 함께 약 기운이 밀려들었다. 졸음이 공포를 이긴 순간, 기절하듯 눈을 감았다.

***

아침에 깨어나자 어제 내가 왜 그랬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뭐가 그렇게 심각했으며, 울기는 또 왜 울었는지. 어쨌든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중요한 건 오늘 있을 유등제였다. 흉흉한 소문……. 사실이라서 할 말이 없긴 하지만, 어쨌든 당장은 그 소문을 잠재워야 했다. 도망칠 방법이 요원하니까.

아테올은 기괴할 정도로 나를 잘 찾아냈다. 마법이 만능 같지만 은근히 그렇지 않다. 순간 이동을 하거나 완벽하게 투명 인간이 되는 방법, 완전한 무에서 유를 만들어낼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런 내 허점을 이용한 건지 아니면 무슨 레이더라도 있는 건지, 지난 여러 번의 도망은 전부 아테올에게 붙잡히면서 끝났다.

어떻게 찾는지, 왜 그렇게까지 찾는 건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더 이상의 도망은 아테올의 심기를 거스르는 것밖에 안 될 듯싶었다. 나중에 상황을 봐서 다시 도망치더라도 당장은 얌전히 있는 편이 좋았다. 내가 도망칠 때마다 뚜껑이 달칵달칵 열리던 아테올의 태도를 생각하면, 으음. 아무튼 지금은 도망칠 때가 아니라는 거였다.

바로 그 아테올은 지금 내 앞에 서 있다. 유등제를 위해 나를 데리러. 왜인지 처음 그가 하마난 축일에 나를 데리러 왔을 때가 떠올랐다. 어쩌면 또 다른 날. 그는 꽤 여러 번 이렇게 탑 앞으로 옷을 차려입고 와서 날 기다렸으니까.

오늘 그는 황제의 정복을 입고 머리를 말끔하게 넘긴 채였다. 귓불에 달라붙는 작은 루비 귀걸이까지 완벽했다. 어제 그 일로 내가 아테올을 의식할 줄 알았으나 생각보다 마음이 편안해서 평소랑 다를 바 없었다. 아테올 역시 어제 내가 냅다 도망친 것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마차를 타고 가는 동안에는 둘 다 입을 다문 채였다. 평소에 던지는 시답잖은 농담도 없는 걸 보면, 어쩌면 아테올은 어제 일을 신경 쓰고 있는지도……. 아닌가? 흘끗 아테올을 보다가 또 후드 아래로 눈이 마주쳤다.

“유리 님.”

“……왜?”

“기분은 어떠십니까?”

갑자기?

“기분은 왜.”

“눈 밑에.”

“……!”

장미 향이 훅 가까워졌다. 아테올의 붉은 두 눈이 코앞에 있었다. 그는 입이라도 맞출 듯 가까이 와서는 내 눈가를 들여다보며 천천히 말했다.

“그늘이 오늘따라 더 짙은 것 같아서요.”

한층 더 음침하다는 소리겠지? 나도 모르게 눈 밑을 손끝으로 만졌다. 어제는 자기 전엔 심하게 뒤척거렸고 자면서는 내내 꿈을 꾸다, 깨다 하며 선잠만 간신히 잤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아테올의 뺨을 누르듯 밀어냈다.

“행사 진행에는 영향 없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제가 뭘 걱정한다고요?”

“…….”

어깨를 으쓱한 아테올이 일단 자기 자리로 돌아가, 고개를 기울이고 나를 보았다.

“유리 님. 제가 뭘 걱정하는 것 같습니까.”

“유등제.”

“유등제의 무엇을?”

“……행사 진행.”

“어떤 행사 진행이요?”

뭐야. 스무고개야?

“내가 유등을 잘 꾸미지 못할까 봐 걱정하는 거잖아.”

“흠……. 제가, 그걸 왜 걱정할까요?”

지금 네가 몇 마디째 물음표를 붙이고 있는 걸까요? 어처구니가 없어 쳐다보자 아테올은 더더욱 고개를 기울였다. 저러다 귀가 어깨에 붙을 것 같았다.

“생각해 보십시오, 유리 님. 제가 유등제가 성공적으로 끝나길 바라는 이유가 무엇인지.”

“……소문 때문에?”

유등제에서 내가 잘하면 소문이 좀 가라앉을 테니까. 아테올이 고개를 기울인 채 끄덕였다. 저러면 모양이 빠질 법도 한데 안 그러다니, 역시 얼굴이 깡패다…….

“그렇지요. 그럼 저는 왜 소문을 잠재우려고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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