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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의 원수를 공략합니다-67화 (67/93)
  • 67화

    04. 상상하는 모든 이야기는

    “혀를 자르려고 했다고?”

    놀라서 숟가락을 떨어뜨릴 뻔했다. 클로든이 잠자코 내 잔에 따뜻한 차를 채우더니 이어 말했다.

    “다행히 옆에 레이안 경이 있어서 막았다고 합니다.”

    세르타가 그렇게 감정적으로 대응했다니 드문 일이었다. 아무튼 옆에 벨이 있었어서 정말 다행이다. 혀를 잘릴 뻔한 기사는 간 크게도 탑주가 가짜네 어쩌네 하는 소문을 수군거렸다고 한다. 다른 곳도 아니고 이 탑의 연무장에서.

    그걸 들은 세르타가 곧바로 검을 뽑아 기사의 혀를 자르려 했던 모양이다. 벨이 그걸 말렸고. 평소 다혈질인 건 벨 쪽인데, 세르타가 얼마나 화를 냈기에 벨이 말릴 정도였는지……. 아무튼, 세르타가 정말 그 기사의 혀를 잘랐다면 소문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을지도 모른다.

    “뒷일을 생각 못 할 사람이 아닌데…… 어쩌다?”

    클로든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탑 안까지 안 좋은 소리가 흘러든 것 같아 크로일러 경도 예민해져 있었던 듯합니다. 본보기를 보이려 했다더군요.”

    “역효과만 날 걸 왜.”

    말하다 말고 문득 예전에 했던 생각을 떠올렸다. 세르타나 클로든은 어쩌면 내 정체를 얼마쯤 짐작했을지도 모른다고. 사람은 정곡을 찔리면 화가 나듯이, 의심이 들지만 필사적으로 부정하는 일에 증거가 더해지면 감정적이 되는 법이었다. 어쩌면 세르타도…….

    “그 기사는 어떻게 됐어?”

    “레이안 경이 그자의 기사 자격 박탈과 탑 추방을 요청하는 서류를 올렸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즉결로 혀를 자르는 것까지는 과한 처사지만, 탑 안에서 탑주에 관한 헛된 소문을(사실은 진실이라고 해도) 떠드는 기사를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소문은, 어떻게 할까요.”

    클로든은 어두운 얼굴이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마법이 만능이라도 그림자처럼 사방에 퍼진 소문을 깨끗이 걷어낼 수 있는 힘은 없었다. 생각해 보면 그렇게 만능은 아닐지도.

    “어차피 믿고 싶은 사람은 계속 믿을 거야.”

    지금은 그 수가 적긴 하지만, 어쨌든 소문이 아무리 터무니없어도 믿을 사람은 믿는다. 만약 정치가가 외계인이라는 소문이 돌았다고 하자. 인류의 몇 퍼센트는 그 말을 진지하게 믿고 스트리밍 사이트에 분석 영상 따위를 올릴 거고, 또 누군가는 그 영상에 ‘좋아요’를 누르겠지. 게다가 이 소문의 경우에는 사실이기 때문에 찔리는 구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갑자기 입맛이 뚝 떨어졌다. 숟가락을 내려놓고 차를 몇 모금 마셨다. 음식 씹는 것조차 귀찮아질 정도로 순식간에 무력감이 밀려들었다. 푸짐하게 차려진 상을 바라보다가 클로든에게 물었다.

    “그 소문이 만약 사실이라면 너희는 어떨 것 같아?”

    그러자 클로든이 놀란 얼굴을 했다. 왜 내가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한. 이내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가, 다시 착잡하게 어두운 표정을 했다.

    “유리 님.”

    “…….”

    “유리 님과 그 오랜 세월을 함께했습니다. 저희가 당신을 알아보지 못할 리 없습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차마 할 말이 없었다. 너희가 오랫동안 알던 유리는 지금 4황자 궁에 있고, 그 자리는 한동안 가짜 유리가 차지하고 있었고, 이제 그 가짜 유리의 자리마저 내가 차지했어. 그리고 전생엔 6년이나 너희를 기만했지. ‘미안하다’로는 표현할 수 없는 무거운 죄책감이 나를 눌렀다.

    “혼자 있고 싶어. 그리고…… 약도 다 떨어졌으니 새로 가져다줘.”

    “……예.”

    클로든은 뭔가 더 말하고 싶은 눈치였으나 그저 고개를 숙였다.

    ***

    아테올은 그날 저녁에 또 찾아왔다. 쫓아낼까 했으나 애석하게도 구실이 없었다. 약 기운으로 기절하듯 자고 일어났기 때문에 마침 잠도 안 왔고. 그는 쫓겨나리라고는 생각도 안 한 사람처럼 여유로운 얼굴로(쫓아낸 적이 없으니 당연하지만……) 내 침실에 들어왔다.

    턱을 괸 채 심드렁히 있는 내 앞에서 그가 자기 방인 양 편하게 망토를 풀고 자리에 앉았다. 힐끔 시선만 들어 쳐다보자 한쪽 눈을 찡긋한다.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봐?”

    기분이 썩 괜찮아 보였다. 나는 별로인데. 내 말에 아테올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웃는 얼굴 그대로 말했다.

    “아뇨, 전혀 없었습니다.”

    “…….”

    사람 헷갈리게 하네. 시선을 도로 내리자 그가 말을 이었다.

    “곧 유등제가 있지요.”

    나는 대충 끄덕였다. 이곳은 달마다 챙기는 축제도 많았는데, 그 행사에 꼭 황실과 마탑이 참여했다. 유등제는 말 그대로 하늘에 등불을 날리는 날이었다.

    “탑주님의 이적으로 건재함을 보여주기에 딱 좋은 날 아닙니까?”

    “……그런가.”

    뭔가 이벤트를 하기에 축제만큼 좋은 기회가 없긴 하지. 그런데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시큰둥하자 아테올이 테이블 위로 몸을 내밀며 가까이 왔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뭐?”

    “등불 아래에서 사랑을 고백하면 이루어진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게 뭐.”

    “모르는 척하시긴.”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치고 아테올을 쳐다보았다. 여전히 실실 웃는 얼굴이다.

    “고백은 무슨 고백이야. 누가 누구한테?”

    “제가 당신한테요.”

    더더욱 어처구니가 없었다.

    “네가 나한테 고백할 사랑이 어디 있어.”

    “하하.”

    아테올이 다시 의자에 등을 묻으며 말했다.

    “서운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하…….”

    나를 놀리는 데 재미가 들린 모양이다. 혀를 차며 무시하고 유등제에서 뭘 할지 생각했다. 흠…….

    “유등이 화려할수록 더 복을 준다고 하죠.”

    “그렇지…….”

    하지만 아무래도 하늘로 날려 보내는 것인 만큼 화려하게 꾸미는 데는 한계가 있다. 아, 그럼 그걸 마법으로 꾸며준다? 제법 괜찮은 생각인 것 같았다. 원격으로 유등 꾸미기. 나쁘지 않았다. 화려하고, 마법의 효과를 제대로 보여줄 수 있고, 사람들은 좋아할 테고.

    “당신도 유등을 준비할 겁니까?”

    아테올이 또 뜬금없이 물었다.

    “내가 왜.”

    “저는 준비할 겁니다.”

    그 말에 아테올을 보았다. 나는 아테올의 이런 면이 별로라고 생각한다. 자꾸 사람 기분을…… 이상하게 만드는 점. 그의 말은 언뜻 진심처럼 들리지만, 그가 얼마든지 이런 일로 농담할 수 있는 사람임을 나는 잘 알았다.

    “설마 다른 사람을 위해 준비하는 거라는 생각은 안 하시겠죠.”

    “내가 바보야?”

    아테올이 어깨를 으쓱했다. 저거 지금 긍정한 건가? 내가 바보라는 뜻인가? 쯧……. 그런 생각을 하며 노려보자 그는 두 손을 들며 웃었다.

    “농담입니다. 그날은 제가 직접 당신을 수행할 테니, 등을 날릴 때 같이 있을 수 있어 좋겠군요.”

    봐, 농담이잖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농담인 거지? 여전히 아테올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그는 그 말만 하고는 망토를 챙겨 다시 두르며 일어났다.

    “뭐야?”

    “시간이 늦었으니까요.”

    “그래서 가겠다고?”

    “가지 말까요?”

    “…….”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어물어물하는 사이 아테올은 내게 정중한 인사만 남기고 정말 가버렸다. 대체 왜 온 거야? 황당해서 멍하니 있다가 드러누웠다. 자기 전의 공포는 오늘은 없었지만, 대신 꿈을 꾸었다. 황당한 기분이 반영되어서였는지 내용도 요상했다. 내가 아테올과 함께 유등을 날리고 있는 꿈이었다. 아테올은 하늘로 날아가는 유등을 보고 있다가 내게로 시선을 돌렸고, 그대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눈길이었다. 그리고 눈빛만큼이나 다정한 목소리로, 유등이 아름답다고 내게 속삭였다. 거기에 나는…… 내가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쩌면 대답하기 전에 깨어났거나.

    이상한 꿈을 꾸고 싱숭생숭한 기분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뻔질나게 찾아오던 아테올은 유등제를 목전에 둔 날까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느긋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흘끗흘끗 문가를 보는 일이 많긴 했지만, 문의 생김새를 본 거지 아테올을 기다린 건 아니었다.

    유등제 하루 전날. 황궁 밖에서는 전야제가 한창일 때였다. 나는 창가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내일로 다가온 축제에 아테올은 한창 바쁠 것이었다. 밤바람이 서늘한 게 기분 좋아서 창을 열어놓은 채였다. 그 창밖을 내려다본 건 정말 우연이었다.

    “…….”

    창밖에 서 있는 아테올을 발견한 것도 마찬가지로 우연이다. 그는 미궁의 등불이 총총하게 떠 있는, 강물 같은 미궁 너머에서 가만히 내 침실 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왔으면 들어올 것이지 왜 저러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그다음에 내가 한 행동 역시 정말 왜 그랬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책을 내려놓고는…… 그대로 지상을 향해 뛰어내렸다.

    그 먼 거리에서도 아테올의 표정이 급변하는 게 보였다. 저렇게 놀라는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던가? 이상하게도 낯설진 않았다. 언젠가 본 것 같기도 한데, 중요한 문제는 아니고. 나는 빠르게 떨어지다가 지상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둥실 날아올랐다. 언제부턴가 아테올이 팔을 뻗고 있었다. 원래는 그의 앞에 내려설 생각이었으나 왜인지 눈을 감았다 뜨자 품에 안겨 있었다.

    “새삼 놀라게 하시는군요.”

    “이제 와서 이런 일로 놀라지 마.”

    “그것도 그렇습니다만.”

    아테올은 내 몸을 고쳐 안았다. 이 주위는 위병이 없는 조용한 곳이었다.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서 나를 가만히 내려다본 아테올이 고개를 기울였다. 입술이 맞닿았다. 거절은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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