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04. 상상하는 모든 이야기는
때로 너무 터무니없는 주장은 신빙성을 얻기도 한다. 그 주장이 나타난 타이밍이 극적이라면 더욱. 나는 도시의 수많은 사람 앞에서 우물 바닥의 마물을 끌어내 마법으로 처치했다. 그 모습을 본 사람이 수없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도시 일부에는 불안한 수군거림이 맴돌았다.
물론 대부분이 ‘그걸 믿는 사람이 있어?’라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원래 어디에나 ‘그걸 믿는 사람’은 있다.
지금까지 다른 곳에 퍼진 소문도 이런 식이었겠구나, 짐작했다. 자신이 다스리는 구역에서 그런 종이가 나온 것에 시장은 창백해졌다. 자기가 쓴 것도 아니면서 머리를 조아리고 어쩔 줄 몰라 하기에 적당히 반응해 주었다. 황당하다는 얼굴로, 가져다 태우라고.
아테올 역시 비슷한 반응이었다. 지금 지나치게 화를 내거나 하면 오히려 소문에 불을 붙이는 격이었으므로 ‘어처구니없다’로 대응하는 게 최선이었다. 당연히 내 속은 그러지 못했다. 어떻게 알았지? 왜 자꾸 이런 소문이 돌지? 누가 퍼뜨리고 있는 걸까?
돌아오는 내내, 그리고 돌아와서도 마음이 계속 불안했다. 아테올은 이틀 정도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 혹시 이 소문의 진원지는 대공이 아닐까? 그날 시우가 나를 방해했던 게 무슨 이유가 있었던 행동이라면.
“…….”
마음이 술렁거렸다. 옷을 챙겨 입고 4황자 궁으로 향했다. 어제 네사레에서 사과하러 왔다가 제대로 말도 못 하고 어영부영 돌아갔었던 시우는 여전히 주눅 든 상태였다. 잘 캐보면 뭔가 나올지도 모른다. 시우와 마주 앉아 막 말을 꺼내려 했을 때였다.
“너랑 ■■이 이번 ■■과.”
“네?”
입을 텁 다물었다. 방금 내 입에서 나온 소리는 나도 이해되지 않는 것이었다. 비프음도 아니고, 뭐가 깨지거나 부서지는 소리도 아니고, 굳이 말하면 깨진 글자를 그대로 소리 내어 읽은 듯했달까. 그런 게 가능한지는 몰라도.
[system: 시우와 자유로운 대화를 원한다면 호감도를 100%까지 올리세요! 아닐 시 중요 단어가 필터링 처리됩니다.]
아, 이게 까만 네모 칸의 정체였군. 어처구니가 없었다. 지금까지 시우한테 했던 말은 필터링할 거리가 아니었다는 뜻인가. 방금 하려던 건 ‘너랑 대공이 이번 사건과 관련 있어?’라는 직구였다. 필터링된 걸 보면, 긍정이라는 의미 아닐까. 나는 물끄러미 시우를 바라보았다. 처음엔 눈을 둥글게 떴던 그가 점점 어쩔 줄 몰라 했다.
[tip: 시우는 그 사람에 대해 많이 알게 될수록 호감이 올라가는 타입입니다. 시우에게 나에 대하여 좀 더 알려줍시다.]
으음……. 시우가 ‘나’에 대해 많이 알게 되면, 기억이 돌아올 확률도 커지고 나한테는 여러모로 불리한 거 아닌가. 대충 적당한 선까지만 알려주기로 하자. 그런데 어떻게 알려주지? 갑자기 자기 정보 줄줄이 늘어놓는 사람 오히려 별로 아닌가.
“타, 탑주님.”
오. 저쪽에서 먼저 말을 걸었다. 기회였다. 나는 너무 다급해 보이지 않도록 주의하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은 정말 죄송했어요. 마물을 그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건 처음이라……. 마물이 나오는 글을 쓰고 있거든요. 살짝 가서 구경만 하려고 한 건데 그렇게 되어서.”
만약에 이 소설을 읽는 사람이 있다면 시우를 보면서 욕을 바가지로 했을 것이다. 전형적인 민폐 행동이 아닌가. 뭐, 소설 속에서만 아니라 현실에서 저래도 엄청난 어그로에 팀킬이긴 했다.
“그래도 정말 깜짝 놀랐어요. 그런 힘이라니.”
시우가 눈을 반짝이며 나를 보았다. 별로 반성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그런 마법을 쓸 수 있나요?”
어떻게 하면?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떻게 하면…… 생각해 본 적 없다. 빙의한 직후부터 이 몸으로는 숨 쉬듯 자연스럽게 마법을 쓸 수 있었다. 시우를 잠시 쳐다보다가 손을 들었다. 시우가 어리둥절한 눈을 한다.
“이렇게.”
“이렇게요?”
시우도 나를 따라서 손을 들었다.
“나한테는 이거랑 똑같아. 너무 당연하고 쉬워서 뭐라고 설명할 수 없어.”
“와…….”
시우가 신기하다는 얼굴로 내 손과 자신의 손을 번갈아 보았다. 하, 나도 참. 진짜를 앞에 두고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람. 기억이 돌아오고 나면 내가 한 이 말을 얼마나 같잖게 생각할까. 흘끗 시우를 보자 그는 오묘한 얼굴로 자기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대로…… 기억이 돌아오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
그건 안 된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탑주님?”
시우가 의아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으나, 거의 외면하다시피 몸을 돌리고 그대로 4황자 궁을 나섰다. 탑으로 돌아오는 내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도망 나올 게 아니라 시우를 지켜봐야 했었나? 저대로 기억이 돌아오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지. 괜한 말을 해서는. 누가 봐도 이상한 내 모습에 클로든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나는 대강 끄덕였다. 클로든이 더더욱 수심에 잠긴 얼굴이 되어 말했다.
“곧 황제 폐하가 탑에 도착하신다고 합니다만…….”
왜냐고 묻는 것도 의미가 없었다. 아테올은 대체로 아무 이유 없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나는 비척거리며 침대로 향했다.
“나는 좀 잘 테니까 좋은 시간 보내다 가라고 해.”
내 헛소리에도 클로든은 잠자코 “예.” 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어쩌면 이 말을 부드럽게 포장만 해서 그대로 전할지도 모르겠다. 클로든은 아테올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까. 이를테면 ‘잠시 오수에 드셨으니 폐하께서도 휴식을 취하다 가시라고 하셨습니다.’라든가. 나는 자니까 방해하지 말고 구겨져 있다 꺼지라는 의미였다.
아무튼 아테올을 신경 쓸 경황이 없었다. 나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누워서 계속 시우를 생각했다. 첫사랑 생각도 이렇게 하진 않았을 것이다. 나한테 첫사랑이 있었는지 여부는 제쳐두고서.
다행히 졸음이 쏟아지진 않았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고 있는데 문이 가만히 열렸다. 아테올인 듯했다. 이대로 무시하고 누워 있을까 하다가 이불을 젖히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침대로 다가오려던 아테올이 놀란 얼굴로 날 보았다.
“이런 장난도 칠 줄 아십니까?”
장난? ……뭐야, 설마 내가 지금 ‘짜잔! 놀랐지!’라도 한 줄 아는 건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내 표정만 봐도 아니라는 걸 알 텐데. 나는 그냥 갑자기 일어나고 싶어졌을 뿐이다. 인상을 찌푸린 그대로 그에게 물었다.
“왜 왔어.”
“용건이 없어도 만날 수 있는 사이지 않습니까.”
“아닌데.”
“아니라고요? 흠. 뭐, 지금은 용건이 있긴 합니다.”
아테올은 능글거리며 다가오더니 침대 옆에 의자를 두고 앉았다.
“그 소문 때문에 말입니다.”
“…….”
별로 직면하고 싶지 않은 화제였다. 안 하면 안 되지만. 아니, 안 할 방법이 있긴 하지.
“믿는 사람은 1할도 채 안 될 겁니다. 그간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당신의 건재함을 과시한 보람이 있어서요. 뭐, 좀 더 확실히 해두는 편이 나을 듯하여 방법을…….”
“제일 좋은 방법이 있어.”
“뭡니까?”
“나를 그냥 보내주는 거.”
순간 주위가 싸늘하게 식는 것 같았다. 아테올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하지만 웃음의 온도를 측정한다면, 조금 전보다 30도는 떨어졌다. 빨간 눈동자가 차갑게 번뜩였다.
“그건 안 됩니다.”
“왜?”
“당신이 더 잘 알 것 같은데요.”
“내가 어떻게 알아. 그냥 보내달라니까!”
‘나한테 집착 그만해!’라고 또 소설 빙의자 전매특허 대사를 할 뻔했지만 참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에는 내 말을 후회했다. 아테올의 표정이 더더욱 차가워졌기 때문이다. 조금 전에 영하로 떨어졌다면 지금은 거의 남극 기온까지 갔다. 연중 적정 온도를 유지하는 내 방에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듯했다.
“역시 이러니까.”
아테올이 훌쩍 다가왔다. 무거운 체중이 침대 한쪽에 실리는 게 느껴졌다.
“제가 몸으로 당신을 꾀어야겠다는 생각이나 하는 겁니다.”
말과 동시에 아테올은 내 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뜨끈한 체온이 피부에 닿자 몸이 움찔했다. 거리낌 없이 가슴을 지나 옆구리까지 내려간 손이 나를 더듬었다. 은근하게 살을 미끄러져 내려오는 손길이 능숙했다. 이대로는 휘말릴 것 같아 몸을 뒤로 빼자, 아테올이 생각보다 순순히 손을 빼며 물러서더니 침대 앞에 섰다.
어쩐 일로 얌전하지? 미심쩍게 쳐다보자, 그는 내 앞에서 천천히 정복의 윗단추를 끌렀다. 금실로 된 매듭에서 보석 단추가 꾹 눌려 투욱 빠져나오며 옷깃이 느슨해졌다.
이어 망토 핀을 뺀 그가 망토를 풀어 의자에 놓고 옷을 마저 벗기 시작했다. 두 개, 세 개, 단추가 느리게 풀어지고 정복 겉옷 안의 셔츠가 드러났다. 겉옷도 의자에 던지고 나니 그는 셔츠에 바지만 입은 차림이 되었다.
비단으로 된 흰 셔츠는 아테올의 체구에 딱 맞추어져 팽팽하게 부풀어 있었다. 툭. 그의 셔츠 가장 윗단추가 열리고 목깃이 벌어지면서 굵고 유려한 목선이 드러났다. 내 눈은 나도 모르게 그의 가슴팍에 고정되었다.
양쪽 소매를 느릿느릿 걷은 아테올이 두 번째 단추도 풀었다. 가슴이 아슬아슬하게 보일 듯 말 듯했다. 세 번째 단추로 손을 가져갔던 아테올이 그대로 딱, 움직임을 멈췄다. 무심코 얼굴로 시선을 올리자 그는 나른하게 웃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물러갈까요? 아니면…….”
“…….”
“더 벗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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