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04. 상상하는 모든 이야기는
아테올은 나를 욕조 안에 둔 채 로브를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큰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나지막이 대화하는 소리……. 그 속에서 얼핏 들린 건 익숙한 음성이었다.
‘시우.’
이번에도 그는 얼떨결에 같이 왔다. 여전히 아테올은 시우가 평화롭지 못한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할지 지켜보고 싶어 했고, 여차하면 스윽…… 하려는 생각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핏 들리는 아테올의 목소리가 냉랭했다. 시우가 당황해 뭐라고 하더니 거의 뛰다시피 밖으로 나가는 기척이 일었다. 쿵. 문이 세게 닫혔다.
얼마 후 아테올이 욕실로 돌아왔다.
“시우입니다. 그의 방에 이 방과 연결되는 통로가 있었다고 하는군요.”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아무리 작은 도시의 공관이라지만 보안이 엉망이었다. 그런 통로가 있다는 말도 듣지 못했고 미리 받은 공관 도면에도 표시가 없었기에, 세르타도 존재를 몰랐을 것이다. 알았으면 벌써 위병이 배치되었겠지. 하지만 그 통로를 알아냈다고 해서 생각 없이 들어온 시우도 시우였다. 자칫 잘못하면 시해 미수죄를 뒤집어쓸 수도 있는데.
“시우는?”
“일단 돌려보냈습니다.”
그 말에 나는 잠시 아테올을 바라보았다. 뜻밖이었다. 아테올에게는 시우를 처리할 좋은 핑계였는데. 내 눈빛의 의미를 알아차렸는지 그가 다가와 내게 입을 맞추며 말했다.
“당신이 그걸 별로 원치 않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내가 원하지 않으면 안 할 것처럼 말하네.”
“왜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닐 것 같으니까.”
미안하지만 아테올을 향한 신뢰도가 그리 좋진 못했다. 아테올은 어깨만 한번 으쓱하더니 다시 물속으로 들어왔다. 슬그머니 옆으로 피하려 하다가 그대로 허리를 안겨 붙들렸다.
“방에 서 있는 걸 본 순간 죽일까 생각은 했습니다.”
“…….”
“하지만 참았는데요.”
그래서…… 칭찬이라도 해달라는 건가? 아테올이 한술 더 떠 고개를 갸웃했다.
“말씀드리지만, 죽이는 게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이었습니다.”
“……그게 어떻게 이성적이야?”
“암살자인 줄 알고 곧바로 죽였다고 하면 감히 누가 저를 탓합니까? 그는 제 발로 죽여달라고 온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듣고 보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비밀 통로가 있었고, 거길 통해서 내 방에 들어왔다. 그것도 아테올과 내가 함께 목욕 중인 사실(私室)에. 시우의 신분이 대공의 대리인이 아니라 대공 본인이었다 해도 할 말이 없었다. 비밀 통로의 목적지를 몰랐다는 변명도, 아니, 변명이 아니라 그게 사실이라도 마찬가지다.
만약 여기서 시우가 아테올의 손에 죽었다면 내 걱정은 모두 해결되었겠지. 하지만 내 생각은 변함이 없다. 아무리 책 속의 인물이라 해도 내가 그를 죽여서 그의 자리를 빼앗는 건 안 될 일이었다. 도덕적인 거부감과 양심의 가책이 느껴진다. 고작 종이 인간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그만이었으나 어쨌든 내 앞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지 않은가.
그러고 보니 나보다 먼저 유리의 자리를 빼앗은 ‘가짜 탑주’란 캐릭터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내가 빙의되는 걸로 스토리가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진 건가? 입력했다 사라진 글자처럼 말이다. 그러고 보니 글자도 캐릭터라고 하지.
“유리 님.”
갑자기 물속에서 허벅지를 꽉 쥐는 손길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아테올이 나를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뭐냐고 물으려 입을 연 순간 입술이 깊게 닿았다.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추고 떨어진 아테올이 웃으며 말했다.
“시중을 마저 들어드리겠습니다.”
“……필요 없어, 나가!”
“사양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당신의 시중을 드는 거라면 기꺼우니까요.”
“내가 싫다니까……, 아, 아!”
결국 목욕은 꽤 길어졌다.
***
커다란 공용 우물 주위에는 사람이 바글바글하게 모여 있었다. 전부 탑주가 우물을 말리는 무시무시한 마물을 어떻게 처리할지 구경하러 나온 사람들이었다.
늘 그렇지만 이 책 속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너무 쉽거나 너무 어려웠다. 지금은 쉬운 쪽이었다. 나는 내 눈앞의 우물을 중심으로 넓게 거미줄을 펼쳤다. 물감이 번지듯 스르르 퍼져 나간 거미줄이 촘촘해지고, 이내 그 한 부분에 수상쩍은 것이 걸렸다.
겉면이 물컹물컹하고 커다란 해면체. 오랫동안 물속에 담가 놓은 떡처럼 퉁퉁 불어 있다. 거미줄로 피부를 슥 쓸자 질퍽할 정도로 물렁거리는 감촉이 손에까지 느껴지는 듯했다. 감각이 예민하진 않은 편인지, 그 정도 접촉으로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거미줄을 확 조여 그것의 몸통을 거의 삭둑 자르다시피 했다.
잘렸던 몸은 거미줄이 다 지나간 순간 다시 찰싹 달라붙었으나, 통증은 느낀 모양이었다.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엄청나게 꿈틀거린 그것이 내가 회수한 거미줄의 뒤를 쫓았다. 무시무시한 속도였다. 우물 아래 물이 통하는 통로를 따라서 맹렬히 닥쳐온 그것은, 내 앞의 우물을 통해 위로 솟구쳤다. 사방에서 비명이 울려 퍼짐과 함께 사람들이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
우물 밖으로 나온 마물의 크기는 엄청났다. 나는 곧바로 마력을 쏟아부었다. 파직거리는 전류가 마물의 몸을 휘어 감았다. 전기가 잘 통하게 생긴 재질이니 충격이 상당하겠지. 예상대로 전격을 먹은 마물은 미친 듯이 경련하기 시작했고, 이대로 끝날 터였다. 방해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
나는 놀라서 마력을 곧바로 거두었다. 마물의 거대한 몸통에 압축되어 있던 마법이 일시에 돌아온 순간, 머리가 찌릿하고 현기증이 일었다. 꼴사납게 비틀거리는 건 간신히 모면했으나 마법을 갑자기 내 몸으로 되돌린 여파가 상당했다. 체력이 와장창 소리를 내며 단번에 8이나 깎여 나갔다. 체력 4가 된 상태로 후들거리면서 앞을 보았다. 마물의 손에 잡힌 한 사람이 보였다. 시우였다.
‘쟤가 왜 저기 있어?’
당황을 넘어 황당하기까지 했다. 시우는 내가 마법을 쓴 순간 마물 앞으로 튀어나왔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져 있던 마물은 시우를 보자마자 낚아챘다. 내가 영역을 지정해 놓은 곳은 마물의 몸 둘레였으므로, 그 손에 붙들려 끌려 올라간 시우 또한 마법의 영향권에 들어간다. 게다가 마물의 몸은 대부분 물. 시우의 몸도 80% 정도는 물이다. 물은 전도체였다. 마물의 몸을 휘도는 전류가 시우의 몸으로도 흘러간다는 뜻이었다.
시우가 붙잡힌 순간 즉시 마법을 거뒀지만, 그 짧은 사이 이미 시우는 기절한 뒤였다. 저걸 어떻게 해야 하지? 내가 어물거리는 틈에 아테올이 검을 뽑아 들며 휙 뛰어올랐다. 그는 몇 층 높이는 될 법한 마물의 손 앞까지 순식간에 도약해 시우의 머리채를 움켜쥐고는 검을 휘둘렀다.
마치 나무에서 열매를 따듯 시우를 비틀어 따낸 그가 땅으로 내려왔다. 생각보다도 먼저 몸이 움직였다. 거두었던 전력을 그대로 내보내 마물에게 내리꽂았고, 마물은 감전되어 격렬하게 진동했다.
그 주위로 불꽃을 일으켰다. 불과 전기가 만나 파박거리는 스파크가 사방으로 튀면서 마물의 몸을 이루던 물이 수증기가 되어 증발했다. 마물이 내지르는 소리 없는 비명은 공기를 뒤흔드는 초음파가 되었다. 넋을 놓고 보고 있던 사람들이 비틀거리며 귀를 막았다. 철퍽. 물기가 모두 날아가고 비교적 작아진 뱀 모양의 마물이 마른 우물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는 그것을 마법으로 집어 우물 밖 흙바닥에 휙 던졌다.
동시에 아테올도 기절한 시우를 바닥에 내동댕이치는 게 보였다. 시우는 다행히 큰 충격을 받은 건 아니었는지, 바닥에 엎어진 순간 움찔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아테올은 그를 걷어차고 싶다는 얼굴로 싸늘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와 아테올을 번갈아 본 시우가 잔뜩 주눅 든 얼굴로 웅얼거렸다.
“죄,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다냐. 나오는 한숨을 참는데 상태창이 반짝거렸다.
[호감도: 시우]
90%
‘시우는 당신의 힘에 감탄하며 큰 ■■을 느낍니다.’
별로 고맙진 않은 호감도 상승이었다. 검은 네모는 뭐지, 매력……? 맥락상 그렇지만 왠지 아닐 것 같다.
세르타가 마물의 시신을 수거하며 그 자리는 그대로 정리되었다. 아테올은 볼일이 끝났으니 이만 돌아가자고 했으나, 마물이 워낙 괴상해서 시체를 잠시 지켜보고 싶었던 데다 시장이 연회를 준비했네 어쩌네 수선을 피우는 바람에 떠나지 못하고 하루를 더 보내게 되었다.
시우는 그날 밤, 내가 아테올과 함께 있을 때 나를 찾아왔다. 멀쩡히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니 전기 충격이 내가 걱정한 것보다 훨씬 약했던 모양이다. 그는 아테올의 차가운 시선에 눈치를 보면서도 우물쭈물,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어, 사, 사죄를 드리고 싶어서 왔습니다.”
“무슨 사죄.”
“……마물을 만져보고 싶어서 그랬어요……. 글쓰기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뭐…… 글?”
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귀를 의심했다. 뭐, 글? 글쓰기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마물 앞으로 뛰어들어? 이젠 기가 막혔다. 아테올은 한쪽 입꼬리만 올린 채 웃고 있었다. 당장 시우를 목 졸라 죽일 듯이 살벌한 얼굴이었다.
나는 잠자코 아테올의 허벅지에 손을 올렸다. 여기서 이유 몇 가지만 더 생기면 그가 정말 시우를 죽일 것 같았다. 시우는 지금 사자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밀고 이빨 개수까지 세고 있는 상황이나 마찬가지였다. 지금 한 여섯 개쯤 셌으려나.
“시우, 네가 한 짓은…….”
점잖게 그를 타이르려 했을 때였다. 요란하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를 방해했다. 세 쌍의 시선이 일제히 문으로 쏠렸다. 아테올이 인상을 찡그리더니 입을 열었다.
“누구냐.”
“세르타입니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평소 이렇게 경거망동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들어오라는 허락에 곧바로 문을 열고 들어온 그의 얼굴은 다소 심각했다. 무슨 일이 또 터졌구나, 하는 예감이 들었다.
“왜 그래?”
“……말랐던 우물이 차면서 이상한 물건이 떠올랐다고 합니다.”
“물건?”
세르타가 가까이 다가와 내게 기름 먹인 천으로 감싼 무언가를 내밀었다. 천을 풀자 돌돌 만 양피지가 담긴 유리병이 나왔다. 뭐야, 바다에 띄워 보내는 편지냐. 유리병의 뚜껑을 열어 양피지를 꺼냈다. 그리 오래된 것으로 보이진 않는 양피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탑주는 가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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