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04. 상상하는 모든 이야기는
무슨 타이밍인지 네사레에 도착한 그날 오후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쓸쓸하기 짝이 없는 가을비였다. 이렇게 비가 자주 오는 편인데도 우물이 말랐으니 사태는 꽤나 심각했다.
빗줄기가 점점 굵어져 우물을 둘러보기로 한 일정은 내일로 밀렸다. 방에 틀어박혀 있는데 톡톡톡, 빗소리와는 다른 소리가 창문 쪽에서 들렸다. 침대에서 고개를 빼내 쳐다보니…… 로브를 뒤집어쓴 큰 체구의 남자가 발코니에 서 있었다. 흠칫 놀란 순간 이벤트 창이 떠올랐다.
[이벤트 발생!]
아테올과 빗속 데이트를 즐겨보는 건 어떨까요?
그래, 저런 짓을 할 게 아테올밖에 더 있나. 나는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창을 열자마자 비가 들이치기에 얼른 뒷걸음질했더니 아테올이 그만큼 앞으로 성큼 걸어서 나를 따라왔다. 손을 뒤로 뻗어 창을 닫고 로브의 후드를 젖히는 움직임이 제 방에라도 들어온 양 자연스러웠다.
빗속 데이트라니. 비극으로 끝난 연인 이야기를 가지고 무슨 재수 없는 행위냐고 생각한 게 불과 조금 전인데 이벤트 내용이 뭐 이따위란 말인가. 대체 이 시스템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tip: 시스템은 당신이랑 똑같은 생각을 한답니다★
웃기고 있네! 뻥도 정도껏 쳐야지! 혼자 어처구니가 없어서 씨익 하는 숨을 내뱉자 아테올이 고개를 갸웃했다.
“제가 찾아온 게 그렇게 싫으십니까?”
“……어? 아니, 그건 아니고.”
반갑진 않았으나 오해는 풀어줘야지. 지금은 아테올이 아니라 시스템에게 화낸 거였다. 그것까지 말할 순 없지만. 아테올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다면 잠시 외출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비 오는 풍경이 아름다운 곳을 압니다.”
나는 아테올의 뒤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안 가면 안 돼? 많이 쏟아질 것 같은데.”
“우산도 있고, 우의도 있으니까요. 정말로 후회는 안 하실 겁니다.”
혹시 아테올도 그 소설의 팬이거나, 유행에는 반드시 편승해서 인스타킬로그램용 사진을 찍어야 하는 타입인 건 아니겠지. 이 세계에 인터넷과 SNS가 없어서 다행이다.
“어딘데?”
어쨌든 이런 사소한 일로 아테올의 심기를 상하게 할 수는 없었다. 해줄 수 있고 엄청 싫은 게 아니라면 대강 맞추는 수밖에. 아테올이 웃으며 “멀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말대로, 정말 멀지 않았다. 공관을 빠져나가 언덕을 조금 걸어서 올랐을 뿐이다. 세르타도, 레사도 대동하지 않고 단둘이 왔다. 커다란 나무 밑으로 간 아테올은 슥 시선을 돌렸다. 내 눈도 자연스럽게 그를 따라 돌아갔다. 돌아본 곳에는 새파란 초원과 바위 언덕에 둘러싸인 작은 분지 도시가 있었다.
높이 치솟은 바위는 구름처럼 뭉친 안개에 가려져 드문드문 보였으며, 구불구불 좁은 거리로는 색색의 우산을 쓴 사람들이 바쁘게 돌아다녔다. 땅에서 올라오는 흙냄새가 신선했다.
낮고 두껍게 깔린 먹구름은 땅을 향해 녹아내리며 점점 굵은 빗방울을 뿌렸다. 비에 강하게 만들어진 지붕으로, 도시의 구획을 가르는 돌담으로, 울퉁불퉁하게 깔린 돌바닥으로 차가운 비가 쏟아졌다.
물안개가 부옇게 낀 도시 곳곳에는 비가 오는 날에만 밝힌다는 레몬색 등불이 켜져 있었다. 등불마다 주위로 빗물과 습기 때문에 생긴 둥그런 무지개가 아른거렸다. 어린아이 한 무리가 우산도 없이 빗속을 까르르 웃으며 달려갔다. 나는 한동안 그 풍경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아름답고, 묘하게 익숙하다. 지구에서 이런 곳을 본 적이 있던가? 기억에도 없는 향수가 자극되어 코끝까지 시큰할 정도였다.
“마음에 드십니까?”
아테올이 물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큰 기대도 없이 나왔는데 이렇게 아름다울 줄은 몰랐다. 옆에서 손이 슥 뻗어 와 내 후드를 젖혔다. 큰 나무 아래에 있긴 했지만 빗줄기가 꽤 강해졌기에 투둑투둑, 물방울이 떨어져 머리카락을 적셨다. 아테올은 어느샌가 후드를 벗은 뒤였다.
후드를 벗긴 손이 가만히 내 뺨을 감쌌다. 붉은 눈동자에 내가 비쳤다.
조금 얼빠진 모습처럼 보였다.
민망한 기분이 들어 몇 걸음 물러났는데 하필 나뭇가지가 성긴 부분이었고, 또 하필 그때 비가 거세어졌다. 쏟아지는 비를 그대로 맞았으나 잠시 놀랐을 뿐 싫진 않았다. 심지어 날씨가 이렇게 쌀쌀한데도 차가운 비가 추운 게 아니라 시원하게 느껴졌다. 내 얼굴이 퍽 뜨거웠던 모양이다.
아테올이 나를 따라왔다. 그의 금발도 금방 빗물에 젖어 색이 짙어졌다. 잘생긴 얼굴을 타고 물방울이 흘렀다. 그가 젖은 내 머리에 손을 얹더니 고개를 기울였다. 아니, 잠깐. 설마? 나는 손을 들어서 그의 입술을 막았다.
“……왜 막으십니까?”
내 손에서 입술을 살짝 뗀 그가 물었다.
“재수가 없잖아.”
“아. 제가요?”
“…….”
순간 말문이 막혔다. 아테올이 너무 태연하게 ‘제가요?’라고 물어서였다. 평소에 재수가 좀 없는 건 사실인데 지금은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니었다.
“아니, 그 연인 이야기 말이야. 결국 둘 다 우물에 빠져서 죽었잖아.”
“아……. 하핫, 그래서, 우리가 우물에 빠져 죽기라도 할까 봐 여기서 키스는 하고 싶지 않으시다?”
“그, 그런 뜻은 아닌데.”
아닌가? 맞는 듯도 하고? 어쨌든 우물에 빠져 죽는 건 사양이었다. 눈을 굴리는데 아테올이 혀를 내밀어 내 손바닥을 핥았다. 축축하고 따뜻한 것이 손바닥을 간지럽히는 느낌에 기겁해 손을 치우자 그가 웃었다.
“그 이야기의 중심은 둘이 비극적으로 죽은 게 아니라, 그 정도로 열렬한 연인이었다는 것 아닙니까. 결말이야 바꾸면 되는 겁니다.”
“이미 쓰인 내용을 어떻게 바꿔?”
“우리는 그 책의 주인공이 아니지 않습니까. 죽은 연인은 작가가 쓴 상상 속의 산물이고, 우린 평범하게 여기서 살아가는 사람이니까요. 미래야 만들기 나름입니다.”
“…….”
그도 그럴듯한 소리였다. 유창한 언변에 넘어가 멍하니 있는 사이, 아테올은 기어코 내게 키스했다. ……쏟아지는 빗속에서 나누는 키스는 솔직히 말해 따뜻하고 달콤했다. 나는 입 안으로 밀려드는 아테올의 온기를 느끼며 손을 더듬어 그의 젖은 로브를 붙들었다. 휩쓸리듯 강렬하고 거친 키스가 이어졌다. 빗줄기가 점점 더 거세어지고, 눈을 뜰 수 없을 정도가 되었는데도 둘 다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한참 후 입술이 떨어지고 내가 다리의 힘이 풀려 비틀거리자, 아테올이 내 몸을 팔로 안아 지탱했다. 몸이 그에게 푹 기대는 모양이 되었다. 비에 젖은 몸에 그의 온기가 촘촘히 옮아 왔다.
“나 이런 꿈 꾼 적 있어…….”
빗속에서 아테올과 키스하는 꿈. 바로 얼마 전에 꾸었다. 도시를 내려다보았을 때의 기시감은 그 꿈 때문이었을까? 아테올이 나지막이 대답했다.
“저도 당신 꿈을 자주 꿉니다.”
빗소리가 요란한데도 그의 말은 귀에 직접 꽂히는 것처럼 잘 들렸다.
“무척 꿈 같지 않은 꿈이죠.”
“꿈 같지 않은 꿈은 뭐야?”
“글쎄요……. 깨고 나면 정말 꿈이었나, 싶어지는 그런 꿈입니다. 가끔은 현실이랑 헷갈릴 정도예요.”
“신기하네.”
고개를 숙인 채 숨을 고르고 난 뒤 나는 먼저 발돋움해 아테올에게 입을 맞췄다. 내 입술이 닿은 건 그의 입술보다 조금 아래였으나, 그는 능숙하게 몸을 굽혀 재차 키스했다. 입맞춤은 아주 오랫동안 이어졌다. 키스로 정신을 홀딱 빼앗긴 와중에도 드문드문 아테올의 말이 떠올랐다.
우리는 그 책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말이.
[이벤트 성공!]
오늘 나눈 대화를 잊지 마세요.
***
물에 젖은 생쥐 꼴이 되어 돌아온 우리를 보고 세르타와 레사는 깜짝 놀랐다.
“아니, 폐하. 어디 웅덩이에 가서 목욕이라도 하고 오셨습니까? 아주…….”
레사가 무언가 더 말하려다가 옆에 선 세르타와 내 눈치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여전히 저 둘은 친구 같은 주종인 듯했다.
“그래. 차가운 물로 씻었더니 죽겠군. 목욕이나 준비해.”
물론 말하지 않았어도 이미 욕실은 준비되고 있었다.
“유리 님. 공연히 욕조를 두 번 채울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
나는 가느다란 눈으로 아테올을 흘겨보았다. 황제가 물을 아껴 쓴다는 말은 살다 살다 처음 듣는다. 검소한 황제, 좋은 말이지만 지금은 그렇게 좋은 의도가 아니다. 속내가 훤히 보였다. 그러나 나는 그를 매몰차게 내쫓는 대신 먼저 옷을 벗으며 내 방에 있는 욕실로 향하고 말았다.
“목욕 시중은 필요 없어.”
세르타에게 이런 말까지 하고서. 세르타는 조금 당황했고, 아테올은 무척이나 기분이 좋아 보였다. 공연히 민망해져서 걸음을 빨리 해 먼저 욕실로 들어가서 비에 젖은 몸을 씻고 뜨거운 물에 풍덩 들어갔다. 아직 차갑던 몸을 담그자 천국에 온 것 같았다.
아테올은 뭘 하는지 그때까지 들어오지 않았다. 그가 들어온 건 내가 물속에 정수리까지 담갔다가 나오기를 두 번쯤 반복한 후였다. 그의 몸은 말끔했고, 약간 젖어 있었다. 거의 코까지 담그고 있는 나를 보고 그가 태연하게 물었다.
“시중을 들어드릴까요?”
“됐어. 난 너한테 안 해줄 거야.”
“안 해주셔도 됩니다.”
“이미 다 했어, 난!”
“사실 저도 다 했습니다.”
농담 따먹기라도 하자는 건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아테올에게서 멀어졌다. 멀어졌다고 해봐야, 공관의 욕조는 크지 않아서 다리를 뻗으면 닿을 것 같았다. 최대한 몸을 웅크리고 앉았더니 아테올이 그런 나를 보며 피식 웃었다.
아무리 즉위 초기에 흉흉한 소문까지 돌아 상황이 나쁘다고는 해도, 황제와 탑주가 함께 이런 도시에 오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지금까지의 역사에 거의 없었다고 봐도 좋았다. 그런 만큼 공관은 황제 정도 되는 손님을 맞이할 수준이 되지 못했다. 황궁에 비하면 허름하게까지 보이는 욕조에 앉은 아테올의 모습이 어색했다.
따지고 보면 나 때문일 수도 있다. 내가 가짜라서. 소문의 출처는…… 시우와 관련이 되어 있겠지. 시우는 이번에도 함께 왔다. 조만간 그와 제대로 된 대화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능력을 찾는 것도, 아테올에게 제거당하는 것도 나에게 있어 그리 좋은 일은 아니었다.
“유리 님.”
“……어?”
생각에 빠져 있다가 퍼뜩 대답하자 아테올이 입가에 손가락을 세워 올렸다.
“밖에 누가 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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