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04. 상상하는 모든 이야기는
결국 아테올이 나를 놓아준 것은 아침에 가까운 시간이 되어서였다. 그것도 그가 놓아줬다기보다는 내가 반쯤 정신을 잃어서 늘어진 거였다. 마지막에 내가 무슨 말을 지껄였는지 잘 기억도 나지 않았는데, 기억하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신음도 섞이지 않은 울음소리를 엉엉 터뜨렸다는 정도만 겨우 떠오르니까.
그대로 세상모르고 잠들었다가 깨어나자 아테올이 아직 옆에 있었다. 주위는 어두웠고, 아테올은 상반신을 탈의한 채 두꺼운 서류 뭉치를 보는 중이었다. 순간 눈길이 그의 벗은 상체에 고정되었다. 돌덩어리를 뭉쳐놓은 듯한 팔뚝과 탄탄하게 부각된 가슴, 갈비뼈를 따라 매듭처럼 촘촘히 올라붙은 옆구리 근육과 보기 좋게 쪼개진 복근. 숨을 쉴 때마다 오르내리는 두툼한 흉통.
“탑주님?”
“…….”
나는 흠칫 놀랐다. 조각상이 갑자기 말을 건 기분이었다. 아테올이 날 보며 웃더니 내 쪽으로 몸을 돌려 기울였다.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 침대에 두 팔을 짚고 몸을 숙인 아테올이 내게 얼굴을 바짝 붙인 채 웃었다.
“왜 그렇게 배고픈 얼굴로 보고 계십니까? ……먹여드릴까요?”
“뭐, 뭘?!”
아테올은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까딱였다. 그 입에서 굉장한 말이 나올 것 같아 일단 그를 외면했으나, 시선이 계속해서 느껴졌다. 어색함에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다른 화제를 찾았다. 다행히 금방 다른 화젯거리가 떠올랐다.
“내, 내가 얼마나 잠들었었어? 아직 어둡고…… 얼마 안 지난 것 같은데.”
바깥이 어두운 걸 보니 길어야 한 시간 정도 지난 듯했다.
응? 그런데 왜 이렇게 몸이 개운하지? 배 속이 조금 지끈거리긴 하지만 온몸이 깨끗했고 피로도 심하지 않았다. 상태창을 힐끗 확인하자 체력은 10까지 채워진 채였다. 아테올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루를 꼬박 주무셨죠.”
“…….”
한 시간이 아니라 스물다섯 시간을 잔 모양이다. 그 정신없던 중에 체력이 다 닳아서 기절하고, 그대로 하루. 이제 웃기지도 않았다.
“그럼 너는 왜 아직도 벗고 있는 건데.”
“입었다가 벗은 거죠. 저는 원래 벗고 잡니다.”
풍기문란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테올은 그대로 몸을 더 굽히더니 내게 키스했다. 뜨뜻한 혀가 입 안으로 들어와 멋대로 돌아다니다가 내 혀를 얽어내고, 입술 사이로 드나들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꾹 조였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제 그가 섹스하던 도중에 갑자기 꺼냈던 말이 떠올라서였다. 우물이, 뭐랬더라.
“어젭……, 읍, 후읏……. 잠까, 압…….”
아테올은 내가 말할 틈을 주지 않았다. 키스가 길게 이어졌고 손은 자연스럽게 가슴으로 올라왔다. 아무것도 없는 납작한 가슴을 한 손이 움켜쥐더니 유두를 툭툭 건드렸다. 저절로 다리가 움찔거렸다. 이내 아테올의 다른 손이 다리로 내려가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스륵 벌어진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은 아테올이 밀어내려 하는 내 손목을 한데 붙잡았다. 손힘이 얼마나 좋은지, 밧줄에 꽁꽁 묶인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결국 내가 어제 아테올이 하려던 이야기를 제대로 들은 건 한바탕 일을 치른 후 욕실에서였다. 그는 축 늘어진 나를 자기 몸에 걸쳐놓다시피 한 채 손빗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빗겼다. 방금까지도 그렇게 거칠던 태도는 어딜 갔는지, 머리카락을 살살 쓸어내리는 손길은 부드러웠다.
“무슨 이야기였죠? 아, 우물이 마른다고 했었지.”
“…….”
상당히 심각한 이야기가 아닌가 싶은데 아테올은 태연했다. 하긴 어제도 무슨 섹스 중에 잠깐 지나가는 잡담 꺼내듯이 말을 꺼내긴 했지.
“네사레라는 이름의 그리 크지 않은 도시입니다. 들어본 적 있으십니까?”
물론 들어봤다. 아무리 제국이 넓고 도시가 수없이 많다지만 네사레는 수도에서 가까운 편이었고, 뭐였더라. 뭔가 유명한 게 있었는데. 자세히 기억은 안 나지만 내가 이름을 알 정도로는 알려진 도시였다. 고개를 끄덕이자 아테올이 의외라는 듯 눈썹을 까딱였다.
“소도시라서 모르실 줄 알았는데요. 잠깐 사이에 공부를 열심히 하셨군요.”
아, 맞아. 기억 상실. 나 기억 상실이었지. 솔직히 한국에도 서울만 벗어나면 모르는 도시 이름이 있다. 아테올이 내가 모를 거라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설명하기는 귀찮아서 입을 다물자, 아테올도 그리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갔다.
“그곳은 지형상 상수도 설치가 어려워서 아직 우물에 의존하는 가구가 많은데, 그 우물이 하나씩 말라간다는 모양입니다. 갑자기 한 지역의 수맥이 끊길 리는 없으니까 물을 말리는 마물의 소행이라는 거죠.”
“음…….”
일리 있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우물이 마른다니, 상당히…….”
“불길한 재앙 같죠?”
이 세계에서도 그런 종류는 역시 재앙으로 취급되는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탑주님과 제가 같이 가는 겁니다. 안 그래도 흉흉한 말이 도는데, 아무래도 이런 일을 해결하면 소문 진화에 도움이 될 테니까요.”
“흉흉한 말?”
“당신이 가짜라는 것 말입니다.”
흉흉한 말은 무슨, 사실인데. 그걸 또 굳이 잠재우겠다고 내가 가야 하는 건가……. 아테올 좋은 일만 시키는 거 아닌가. 그냥 안 간다고 해버릴까. 아테올만 혼자 보내놓고 나는 그 틈에 도망치면 딱 좋을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한 순간 아테올의 눈이 희번덕거리며 빛났다. 나는 흠칫해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건가? 아니면 소리 내서 말했나?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빤히 읽힙니다. 저를 혼자 보내고 도망치겠다는 궁리나 하고 있겠죠.”
“…….”
어떻게 알았지. 눈을 피했으나 시선이 매섭게 따라왔다.
“같이 가고 싶게 만들어 드려야겠군요.”
“무슨 수로? 아, 앗!”
첨벙 소리와 함께 아테올과 내 몸이 물속에서 요동쳤다. 넓은 욕조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고 한 시간가량을 붙들려 있던 결과, 나는 결국 “갈게, 갈게, 그러니까 제발 용서해 줘.”라고 질질 짜며 아테올에게 빌어야 했다. 아테올이 여유 만만한 얼굴로 웃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
네사레가 무엇으로 유명한 곳인지는 도착한 후에 깨달았다. 이곳은 비와 연인의 도시로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정확히는, 비를 맞는 연인.
옛날에 밀리사와 아리아라는 연인이 집안에서 반대하는 연애를 했다. 그런 그들이 집안으로부터 도망쳐 온 곳이 네사레였다. 금방 들통이 나 집안의 추격자들에게 쫓기게 되었는데(그래도 가족인데 추격자까지 보낼 일인가) 도망치던 도중에 폭우가 쏟아붓기 시작했다.
빗속을 달리던 연인은 차라리 그냥 죽기로 마음을 먹고(갑자기 너무 극단적이지 않나?) 비를 맞으며 열정적인 키스를 나눈 뒤 함께 우물로 뛰어든다.
그렇게 비극적인 결말로 끝나는 소설이 한때 제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덕분에 소설의 배경이 된 네사레에 비 오는 날 찾아와서 키스를 하는 게 연인들 사이에 어떤 낭만적인 행위가 되어 명소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잘된 연인도 아니고 둘 다 우물에 뛰어들어서 죽었는데 왜 그들의 키스 신을 한창 잘 지내는 사이에서 재현한단 말인가? 재수가 없어도 보통 없는 게 아닌데, 마치 덕수궁 돌담을 일부러 걷는 연인 같았다. 혹은 남산에 자물쇠 걸러 가는 연인이거나…… 로미오와 줄리엣 코스프레를 하는 연인…….
“유리 님.”
“아악!”
생각에 빠져 있던 나는 펄쩍 뛰어올랐다. 아테올이 나를 부르며 귀에 바람을 훅 불어서였다. 귓속으로 들어온 바람에 온몸이 근지러워졌다. 이 인간은 분명히 맞은편에 앉아 있었는데 어느 틈에 옆으로 왔는지 모르겠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뭘. 아무 생각도 안 해.”
“그럼 눈을 뜨고 주무신 모양입니다. 몇 번을 불렀는데도 못 들으시니 제가 이리 올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
몇 번이나 부른 거지? 한 번 부르고 이러는 거 아냐? 그럴 가능성이 없지 않, 아니, 아주 컸다. 슬쩍 노려보며 벗고 있던 후드를 두 손으로 잡아 팍 뒤집어썼다. 그러나 아테올은 아랑곳하지 않고 입술을 들이밀었다. 옆으로 몸을 피하려 했으나 그가 더 빨랐다. 키스하는 그의 등을 퍽퍽 때려보았지만, 결국 마차가 멈출 때까지 그는 나를 붙들고 있었다.
겨우 그가 몸의 힘을 풀어준 후에 나는 그의 가슴을 밀쳐냈다. 그는 누가 봐도 봐준다는 얼굴로 밀려났다.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왜 이러는 거야’에는 여러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는 내게 한쪽 눈을 찡긋하더니 말했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몸으로 꾈 생각이라고.”
아주 태연한 목소리였다. 기가 막혀서 헛웃음을 치고는 입술을 벅벅 닦고, 후드를 깊이 눌러 쓴 뒤 마차 문 쪽으로 몸을 뺐다. 기다리고 있었던 듯 세르타가 문을 열었다. 입술이 부은 게 티 나지 말아야 할 텐데. 일부러 아테올에게 잘 보이도록 세르타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하지만 곧바로 따라 내린 아테올이 내게 속삭였다.
“귀여운 행동이지만, 그러지 않으시는 게 당신을 위해 좋을 겁니다. 이미 제가 눈이 돌아간 미친놈인 걸 아시면서, 명석하신 당신이 왜 그러는지 조금…… 이해가 안 가는군요.”
“…….”
“질투해 주길 바라신 거라면 더더욱 귀엽긴 하네요.”
미, 미친놈. 이놈을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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