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의 원수를 공략합니다-60화 (60/93)

60화

04. 상상하는 모든 이야기는

허. 이게 대체 무슨 꿈이냐. 청춘 영화야? 나 이런 청량한 장면 나오는 영화, 드라마, 소설을 열 개도 넘게 아는 것 같다. 깨고 나니 어제의 일까지 더해져 더욱 짙은 회의감이 들었다. 뜨거운 물에 목욕을 하면서 잡생각을 날리고 창가에 섰다. 창밖에서는 이제 가을로 넘어가는 계절 특유의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장면 하나하나가 기억날 정도로 선명한 꿈이었지만, 특히 마지막에 내가 한 말은 한동안 잊히지 않을 듯이 머리에 남았다. 얼마나 사랑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 꽤 냉정한 말이다.

침대에 있으면 계속 어제 일과 꿈 생각만 날 것 같아서 탑을 나섰다. 갈 곳이라고는 정해져 있었다. 황제궁, 아니면 4황자 궁. 그중에 황제궁은 지금 절대 가고 싶지 않았기에 자연스럽게 시우에게로 향했다.

시우는 갑작스러운 내 방문을 여전히 반겨주었다. 귀찮을 법도 한데. 아니면, 반가운 척하는 걸지도. 어쨌든 호감도를 올려서 시우의 생각을 하나 더 보고 싶다는 마음이 강했다.

“저, 탑주님. 저는 사실 글 쓰는 걸 좋아해서요.”

“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불쑥 시우가 그런 말을 꺼냈다. 글?

“네. 탑주님께서 한번 읽어봐 주시면 안 될까요?”

“뭐…… 그래.”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다. 내 말에 시우는 얼른 옆에 놔두었던 공책을 집었다. 내가 선물해 준 것이었다. 잘 쓰고 있는 모양이다. 받아서 첫 페이지를 펼치자 어린아이의 것처럼 삐뚤빼뚤한 글씨가 보였다.

“그, 글씨가 서툴죠…….”

서툰 건 글씨뿐만이 아니었다. 대충 읽을 순 있었지만, 첫 문장부터 설명이 너무 많고 문장이 조잡해서 도저히 집중이 되지 않았다. 아니, 하지만 아직 말도 서툰데 이 정도면 대단한 성취다. 멍해지려는 정신을 다잡고 다시 꼼꼼히 읽어보았다.

내용은 일종의 로맨스 판타지였다. 공작 가문의 진짜 딸이 가짜 딸에게 자리를 빼앗기고 회귀해 복수하러 돌아온다는 도입부. 정말 이런 내용은 세계와 차원을 막론하고 인기가 있는 모양인데, 그걸 쓴 사람이 시우라는 점에서 나는 말할 수 없는 찜찜함을 느꼈다.

“……왜 하필 이런 내용이야?”

“재미있잖아요!”

“그런가…….”

시우는 신이 나서 다음 내용을 떠들기 시작했다. 결국은 복수에 성공하고 진짜가 자리를 되찾는다는 결말이었다. 시우의 의도가 신경 쓰여 목덜미에 땀이 흘렀다. 일부러 이런 내용을 나에게 말해 주는 건가?

“글을 쓰는 건 정말 좋아요. 작가는 책 속에서 아무리 강한 존재라도 내 마음대로 다룰 수 있잖아요.”

“…….”

그 말에 왜인지 모를 격렬한 거부감이 들었다.

[호감도: 시우]

85%

시우는 ‘어떻게 ■각할까?’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생각할까? 애매한 말이었다. 글을, 아니면 이 상황을. 호감도가 오른 순간 그걸 좋아하기도 전에 머리가 띵해졌다. 갑작스러운 현기증이었다. 갑자기 꿈을 꾸는 것처럼 눈앞이 흐려진다. 여긴 어디지? 미궁? 미궁 속을 헤매는 것 같았다.

주위는 온통 어둡다. 비틀거리다가 벽에 손을 대자, 내 손이 닿은 벽이 한순간 TV 화면처럼 환해졌다. 손을 떼자 곧바로 다시 검은 벽으로 돌아갔고, 다시 대도 환해지진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온통 다 검은 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게 켜지면, 밝아지면 길이 보일 것 같은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갑자기 상실감과 절망감, 무력감이 밀려들었다. 나는 고독 속에서 길을 잃듯이 정신을 잃었다.

“탑주님?”

정신을 차린 건 클로든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클로든? 클로든이 왜 여기에 있지? 4황자 궁에는 세르타를 데리고 갔는데.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가 내가 침대에 누운 채라는 걸 알았다.

“내가 왜 여기…….”

“갑자기 쓰러지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괜찮으십니까?”

“…….”

무심코 체력을 확인했지만 풀피 그대로였다. 시우 앞에서 백일몽 같은 걸 꾼 건 기억이 난다. 그대로 쓰러진 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순식간에 걱정이 깊어지는 클로든의 얼굴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아니, 괜찮아. 잠깐 어지러웠어.”

“약을 준비하겠습니다. 간단히 드실 것을 올릴까요?”

“아냐. 음료나 좀 가져다줘.”

클로든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말했다.

“황제 폐하가 탑 입구에 와 계십니다.”

“뭐……. 언제부터?”

“탑주님이 쓰러져서 돌아오시고 조금 후에 오셨습니다.”

그럼 꽤 오래 기다린 거 아닌가? 얼른 클로든에게 손짓했다. 들어오라고 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도 않아 아테올이 나타났다. 밖에서 기다린 적 따위 없다는 듯 말짱한 얼굴이었다. 클로든을 내보내고 성큼성큼 다가온 그가 내 이마에 손을 짚었다. 그대로 손을 내려 뺨도 만지고, 턱을 눌러서 입술까지 벌려본다.

“뭐 하는 거야?”

“쓰러지셨다기에 놀라서요.”

“…….”

“유리 님.”

“왜.”

아테올은 고개를 옆으로 갸우뚱한 채 짐짓 귀엽게 나를 쳐다보았다.

“탑에 마음대로 들어올 수 있는 권한을 주시면 안 됩니까?”

“뭐?”

“결혼할 사이지 않습니까. 그 정도는 주셔도 될 것 같은데요.”

“누가 결혼할 사이야!”

“아닌가요? 그런 줄 알았는데.”

잘생긴 얼굴에 심각한 유감이 떠올랐다. 마치 내가 혼인 빙자 사기라도 친 것 같은 표정이었다. 억울해져서 뭐라 하려고 벌린 입에 입술이 닿았다. 또, 또 몸으로. 밀어내려 했지만 늘 그렇듯 밀리지 않았다.

그는 내가 숨이 막힐 때까지 거친 키스를 퍼붓다가 그대로 나를 눕혔다. 옷 속으로 손이 들어오는 게 이젠 익숙했다. 그 익숙함 속에서 아테올은 너무 쉽게 나를 펄펄 끓이고 달아오르게 했다. 정신을 차리자 나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채 그의 어깨를 끌어안고 매달려 있었다.

“아읏, 아, 아……, 아……!”

주체할 수 없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몸은 단단히 겹쳐져 밀착한 채였다. 아테올이 내 목을 춥춥 소리가 나도록 빨며 열에 들뜬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제처럼 말씀해 보세요.”

“……시, 싫어…….”

“어서. 이렇게…….”

“아……!”

아테올의 것이 안을 쾅 때렸다. 내벽이 움찔거리며 경련하다가 굵직한 기둥에 달라붙듯이 엉겼다. 찌릿한 감각이 뇌 속에서 퍽 하고 번져 아릿한 두통과 함께 온몸으로 열을 흘려보냈다. 피부가 잔뜩 예민해져 따끔따끔할 지경이었다. 아테올은 몇 번이고 나를 재촉하면서 성기를 꺼냈다가 쑥 집어넣었다. 아쉬운 자극이었다. 가장 느끼는 부분을 피해서, 일부러 느릿하게 밀어 넣기만 하고 있다. 내 입에서 자신이 원하는 말을 끌어내기 위한 수작이었다.

“허락한다고요. 그리고, 그다음에 했던 말도. 네?”

“아아……, 읏, 응…….”

감질나는 자극에 점점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정말 아테올이 원하는 대로 말해 버릴 것 같다. 아니, 그런데. 버틸 필요가 있나? 한마디만 하면 내가 원하는 쾌감을 얻을 수 있는데. 재차 아테올의 것이 몸속을 문지르고 지나갔을 때,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아, 알겠어, 마음대로, 마음대로 해…….”

“좋습니다. 약속하신 겁니다.”

“응, 응, 그리고……, 해줘…….”

아테올이 축축하게 젖은 내 눈에 키스했다.

“어떻게요?”

“해줘……. 아, 안에, 세게 해줘. 그리고…… 으응……, 저번처럼 문질러줘…….”

한 가닥 남은 이성이 나중에 후회할 거라고 말하고 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중에 할 후회보다 지금 얻고 싶은 쾌감 쪽이 중요했다. 절정 직전에서 까딱이고 있는 몸을 어떻게든 폭발하게 하고 싶었다. 아테올의 것으로 강렬한 자극을 얻고 싶었다. 아테올을 꽉 끌어안자, 그는 내게 입술을 붙인 채 내 하체를 콱 끌어안았다. 동시에 성기가 거세게 안으로 치고 들어왔다.

“아앗!”

온몸이 파르르 떨렸다. 머리가 하얗게 비는 듯했다. 퍽, 퍽, 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아테올의 것이 연달아 내 안을 때렸다. 애매하게 자극을 받지 못하던 민감한 지점이 짓눌리고 부딪쳐 온몸에 강한 전류가 퍼졌다. 억눌리고 억눌리다 폭발한 쾌감에 나는 정신을 놓고 신음했다.

“흐, 으응, 읏, 아……, 좋, 아…….”

“기분 좋습니까?”

“응, 으응, 좋아, 기분 좋아…….”

헐떡거리며 매달리는 내 몸을 아테올이 추슬러 안았다. 그리고 성기를 거의 귀두까지 빼냈다가 거세게, 못을 때려 박듯 처넣었다. 내 입에서 비명이 튀어나왔다.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아테올의 힘으로 몸이 좁은 틈도 없이 밀착하면서 성기가 가장 깊은 곳에 딱 맞물려 닿았다. 그는 여러 차례의 마찰로 부어오른 깊은 곳을 딴딴하고 뭉툭한 귀두로 세게 짓눌렀다.

“흐으으윽……! 으읏, 응……!”

내 것에서 정액이 튀어나와 아테올의 배를 적셨다. 삽시간에 차오른 쾌감은 위험 수위에서 찰랑거렸다. 내가 절정에 이른 걸 보고서도 아테올은 힘을 빼지 않았다. 나를 움직이지 못하도록 꽉 끌어안은 채 하체를 문질렀다. 귀두가 진동하는 것처럼 흔들리며 극점을 마구 짓눌렀다. 사정하면서 잔뜩 예민해진 몸에는 너무 강렬했다.

“아아, 흣, 으으응……, 으, 너무, 읏……!”

“너무?”

“아! 아, 아응, 흣……! 아, 아아아……!”

온몸을 비틀며 날뛰고 싶은 기분이었다. 아테올의 허리에 감긴 다리를 버둥거리자 안쪽이 더 자극되어 괴로워졌다. 모양 좋은 등을 손으로 마구 긁어 손톱자국을 내놓았다. 손톱에 살이 걸려 생채기가 생기는데도 어찌하지 못했다. 결국 아테올이 내 안에 정액을 쏟아낼 때 나도 한 번 더 사정했다. 아테올이 약간 몸을 물리자 전신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아테올은 축 늘어진 내 등을 토닥거리며 날 달래다가 불쑥 말했다.

“아, 사실 말씀드릴 게 있어서 왔습니다.”

“……뭔데…….”

“또 이상한 일이 있어서요.”

“이번엔 뭐…….”

말을 하면서 계속 이곳저곳에 입술을 댄다. 여기서 끝나지 않겠구나. 멍한 심정으로 아테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우물이 마른다고 하더군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진짜 뭔데. 이 나라 망하는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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