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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의 원수를 공략합니다-59화 (59/93)

59화

04. 상상하는 모든 이야기는

동시에 마력을 끌어모아서 거미줄처럼 만들어 쥐 마물을 칭칭 휘감았다. 거대한 쥐 마물이 삽시간에 누에고치가 되었다. 그대로 겉에는 물막을 씌우고, 누에고치 안쪽에 불을 질렀다. 지난번 크라켄 건에서 배운 점이었다. 뭔가를 태울 땐 덮개를 씌우자.

이윽고 물막 안에서 거대 쥐 마물이 다 타들어 간 뒤 빈 고치만 남았다. 물막과 고치의 크기를 줄이자 조그마한 공만 해졌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작은 머리들은 애써 외면했다. 아마도 쥐 떼는 이 거대한 쥐에게서 머리가 분리되어 움직인 것들인 듯했다. 그러니 그렇게 칼 같은 움직임이 가능했던 것이다. 애초에 한 몸이니까.

“대, 대단하세요, 탑주님.”

잠시 잊고 있던 목소리가 들렸다. 시우가 잔뜩 흥분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지금 표정을 보니 알겠다. 평소에 시우는 항상 표정 변화가 별로 없고 위축된 상태였구나.

[호감도: 시우]

75%

시우는 ‘저■ 내 ■이 된■■!’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호감도가 오른 건 다행인데, 시우의 생각이 묘했다. 절반이나 가려졌지만 지금 상황이 상황이라서인지 그 깨진 글자가 조금 읽혔다. ‘저게 내 힘이…….’라고. ‘된■■’는 모르겠다. 된다고? 된다면? 뒤가 ‘라고’니까 ‘된다고’나 ‘된다니’일까. 가만히 시우를 바라보았다. 들떠서 빛나는 눈이 이제는 다른 의미로 보였다.

하지만, 이상하다. 이건 원래 시우의 힘이 아닌가? 그렇게 읽으면 꼭 내 것을 빼앗아 가는 것처럼 들리잖아. 내가 너무 내 멋대로 읽은 걸까.

“탑주님?”

시우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날 불렀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곤 고개를 돌렸다. 마침 아테올이 마물의 작은 머리를 하나 집어 들고 있었다.

“시장에게는 이걸 보여주면 될 것 같군요.”

나는 버럭 소리쳤다.

“내 눈에 안 보이게 들고 와줘!”

***

공관으로 돌아오자 반갑지 않게도 칼레우스가 와 있었다. 아테올은 칼레우스의 얼굴을 보더니 손수건으로 감싼 덩어리를 휙 던졌다. 그게 무엇인지 바로 짐작한 나는 칼레우스를 외면하며 고개를 돌렸다. 질척거리는 소리와 함께 칼레우스가 손수건을 푸는 기척이 났다.

“…….”

“히익!”

내용물을 같이 확인했는지 시장이 비명을 질렀다. 슬그머니 다시 칼레우스 쪽을 보자, 그가 재빨리 손수건을 다시 여미고는 시종에게 내미는 게 보였다. 손이 피투성이였으나 얼굴은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물론 겉으로 보기에만 그럴 것이다. 입매가 떨리는 건 감춰도 눈에 스쳐 지나간 모멸감은 감추지 못했으니까.

“작은 머리가 여러 개 달린 쥐 형태의 마물이더군. 처리는 끝냈으니 걱정할 것 없다.”

“감사드립니다, 폐하.”

“감사는 탑주님께.”

아테올이 내게로 화살을 돌렸다. 그냥 그대로 계속 상대해 주면 좋겠는데. 나한테 주목이 쏠리는 건 원치 않는다. 팔짱을 끼고 선 채 고개만 까딱이자 칼레우스와 시장을 비롯해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또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오늘만 벌써 두 번째였다.

시장이 저녁 만찬을 준비했다는 걸 간신히 거절하고 황궁으로 돌아왔다. 시우를 궁으로 보내고 나는 마탑으로 가려는데, 아테올이 당연하다는 듯 따라왔다. 미궁 앞에서 멈춰 서자 그도 나를 따라 발을 멈춘다.

“왜?”

“왜라니요.”

“왜 따라오는 거냐고.”

“흠……. 칼레우스에게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무슨 이야기.”

아테올이 뒷짐을 지더니 몸을 굽혀 내 귀에 입술을 가까이 댔다.

“요즘 이상한 소문이 돈다고 하더군요.”

“뜸 들이지 말고.”

“‘지금 탑에 있는 탑주는 가짜다’라는 소문이요.”

“…….”

“오늘 일로 최소한 리테바 지역에서는 잠잠해질 것 같습니다만.”

굳은 내 얼굴을 보며 아테올은 자세를 바로 하고 말했다.

“소문의 출처는 찾아야겠지요.”

“……그래야겠지. 아니.”

무심결에 동의하려다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테올이 고개를 비뚜름하게 했다. ‘그럼요?’라고 말하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굳이 그럴 필요 있어? 사실인데. 그냥 내가 사라지면 되는 거잖아.”

나는 아테올에게만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글쎄요.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군요.”

“넌 대체 왜 나한테 이렇게 집착하는 거야? 난 가짜라고.”

와, 방금 진짜 소설 같은 대사였다. 소설 속에서 이렇게 소설 같은 대사를 하다니. 그러나 아테올은 이상함을 전혀 못 느낀 듯(당연하다, 그는 소설 속 인물이니까) 어깨만 한 번 으쓱하더니 대답했다.

“당신을 보고 있으면 조바심이 납니다.”

“…….”

“뭐랄까……. 몇 천 개는 되는 계단을 올라와서, 딱 한 칸만 더 가면 목적지인데 뭔가에 가로막혀 오지도 가지도 못하는 상황이라고 할까요.”

“그게 대체 뭔데?”

황당해서 묻자 아테올은 웃었다.

“그렇게 답답하다는 겁니다. 이상하지요. 그런데, 정말 들여보내 주지 않으시려고요? 허락하실 때까지 내내 여기 서서 기다린다고 해도?”

이상해도 보통 이상한 게 아니었다. 붉은 눈은 맑았지만 광기가 엿보였다. 기세에 압도되어 나는 아테올이 침실에 들어오는 걸 허락하고 말았다. 침실 문이 닫히기도 전에 그는 클로든에게 들어오지 말라고 경고하더니, 문고리를 닫아걸어 버리곤 그대로 문에 나를 밀친 채 키스했다.

“……뭐 하는 거야!”

“몸으로 꼬여보려는 겁니다. 지금부터.”

“될 것 같아?! 이, 이익, 하지 마……!”

아테올은 웃으며 로브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결과적으로…… 그는 약간 성공했다. 나는 새벽에 어처구니를 상실한 채 깨어나, 자고 있는 아테올을 걷어차 쫓아내 버리고는 씩씩거리며 다시 누웠다.

“아, 안 할게, 안 도망칠게, 제발, 제발 부탁이야…….”

“…….”

내가 한 말이 떠오르자 얼굴이 달아오르면서 마구 발길질을 하고 싶어졌다. 이불을 걷어차 침대에서 떨어뜨리고, 허탈한 마음으로 다시 주워 오면서 몇 시간 전의 기억을 지우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니, 내 기억은 그대로 두더라도 아테올의 기억만 지우고 싶다고. 하다못해 더 해달라는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아니야, 그건 그래도 나았어. 그다음 말은, 아악.

“아아아아악.”

나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채 작게 소리 지르며 몸부림쳤다. 이불을 또 팡팡 걷어차다가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끌어와서 잤다.

힘들게 잠이 들어서 그런지 꿈자리가 사나웠다. 꿈에도 아테올이 나왔다. 아테올과 나는 일전에 한 번 간 적 있는 그 과일 농장에 있었다.

여전히 나는 사람들 틈에 섞이는 건 싫다면서 언덕에 앉아 농장을 구경했고, 아테올은 내 옆에서 내게 나무딸기를 건넸다. 꿈인데도 그 새콤한 맛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꿈에서는 원래 음식 맛이 안 나는 거 아니었나?

“너도 먹어.”

“네.”

내가 퍽 친절하게 아테올에게 나무딸기를 권했다. 아테올은 거절하지 않고 입에 빨갛고 말랑말랑한 열매를 집어넣었다. 신맛이 강했는지 그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꿈속의 나는 그걸 무려, 귀엽다고 생각해서 그에게 손짓했다. 다가온 그의 뺨에 입 맞췄을 때는 아무리 꿈이라도 내가 뭘 하고 있는 건가 싶었다.

그때 갑자기 하늘이 꾸물거리기 시작했다.

“이런, 비가 올 것 같진 않았는데요.”

“원래 이 계절에는 날씨를 짐작하기 어렵지.”

비를 피할 준비가 아무것도 안 된 채였다. 심지어 기사와 시종들도 멀리 떨어뜨려 두고 와서 부를 사람조차 없었다. 이내 빗방울이 툭툭 떨어졌다. 아테올은 망토를 들어 내 머리 위로 드리웠다. 자기는 비를 맞으면서도. 나는 웃으며 아테올의 팔을 밀어냈다. 머리와 뺨에 떨어지는 비의 촉감이 나쁘지 않았다.

“가끔은 비 맞는 것도 좋은데.”

“뭐…… 감기는 안 걸리시니 괜찮은 걸까요.”

“그렇게 말하면 너무 멋이 없잖아.”

비는 딱 맞기 적당한 정도였다. 부슬부슬 내리는 빗속에서 허둥거리며 주위를 정리하고 뛰어다니는 사람들과, 물기를 머금어가는 연둣빛 잎새와 붉은 나무딸기 열매를 바라보았다.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음악 같았다.

아테올이 나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몸을 기울였다. 서로의 젖은 입술이 맞닿았다. 나는 피하지 않고 그의 입술을 받아들였다. 고개를 조금씩 틀며 키스하는 동안 빗물이 눈가와 콧날, 뺨을 타고 흘렀다. 로브를 벗어 덥게 느껴지던 몸을 시원하게 식히는 비였다. 한참 키스를 나누던 중, 갑자기 빗줄기가 거세어졌다.

나와 아테올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떨어져서는 눈을 둥글게 떴다. 곧 비는 눈도 뜨기 어려울 만큼 세차게 쏟아붓기 시작했다. 나는 웃음을 터뜨리고는 후드도 뒤집어쓰지 않은 채 아테올의 손을 잡았다. 아테올 역시 희미하게 웃으며 내 손을 꼭 붙잡고 뛰었다. 신전이 가까운 곳에 있었다.

신전의 대기도실은 비를 피하러 온 사람으로 가득했다. 나와 아테올은 대기도실 밖에서 살짝 기웃거리다가 인파를 피해 여러 개로 나뉜 소기도실 중 하나를 찾아 들어갔다. 다행히 그 작은 예배당에는 아무도 없었다.

비를 피해 찾아온 사람들을 위해 신전에서 준비한 수건과 난로가 놓여 있었다. 수건으로 머리카락과 몸의 물기를 닦아내고 난로를 사이에 둔 채 앉았다. 둘 다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꾹꾹 누르다가 눈이 마주쳤다. 어린애처럼 웃음이 나왔다.

“탑주님……. 유리 님.”

“응.”

“시간이 흘러도 이런 기억은 잊히지 않을까요?”

아테올의 말에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글쎄, 얼마나 사랑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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